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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Plume
작가 : 별하랑
작품등록일 : 2019.9.10

(오후 11시~00시)"신이 되어야만 해." "싫습니다." 단호히 거절한 소녀를 보며 높은 신은 비웃는다. 어차피 소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네가 나고. 내가 너야.]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

"평생 함께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연인.

"살려주세요." 울부짖는 아이.

"너에게 기억을 잊을 수 있는 기회를 줄게." 매혹적인 신은 소녀에게 속닥거렸다.

"자, 어때? 결정은......

네 몫이야."

 
[서장] 7회
작성일 : 19-09-17 00:30     조회 : 218     추천 : 0     분량 : 9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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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았다.'

 

  이 소리 하나에 모든 기력이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온몸을 휘감는다. 어떤 힘인지는 모르겠으나, 압도적인 무언가에 짓눌려 마나가 아예 나오지 않았다.

 

  제아무리 진희라 해도 그 자리에서 동상처럼 굳어버린 건 마찬가지.

 

  또각또각.

 

  구두굽이 땅에 닿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 질수록 더욱 압도적으로 다가오며 움직임을 막는 것을 피부로 느낀 진희가 눈색 눈동자만을 데굴데굴 굴렸다.

 

  머릿속에서 울리던 목소리 때문에 가뜩이나 안 좋던 몸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는 게 느껴졌다. 구두 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으읍......!"

 

  구역질이 나온다. 어째서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 지는 자기 자신도 모른다. 저 소리가 가까워질 수록 더욱 심해진다는 것 하나만은 알겠다만은.

 

  서서히 구두소리 주인의 형상이 보이긴 했으나 지금은 눈을 치켜 뜰 힘도 없다. 어떻게든 몸을 수그리고 배를 움켜 쥐었으나 통증은 계속되었고 마나는 나오지도 않았다.

 

  "뭐야. 왜 그러고 있어."

 

  아까 들었던 고운 목소리가 귀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정말 무슨 위대한 인물이라도 되는지, 가면 갈수록 심해지는 고통에 신음조차 내뱉지 못 했다.

 

  "으음... 왜 그럴까. 아."

 

  진희의 앞까지 한 걸음에 다가와서 잠시 고민하던 여인이 생각났다는 듯 피식 웃으며 백옥같은 가는 손을 진희의 머리 위에 얹었다.

 

  "... ...!"

 

  연두색 머리와 백옥같은 손이 닿자 신비로운 빛의 결합이 주위를 떠돌았다. 손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몽환적인 은하수 같은 별무리들이 뿔뿔이 흩어지며 소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단말마의 고통이 별무리에 빨려들어간다. 그 아픔들은 다 어디로 가고 노곤노곤한 저만이 남았다.

 

  뭔......

 

  놀라울만큼 멀쩡해진 제 모습에 놀라기도 했지만, 자신을 이렇게 치료해낸 여인이 더 궁금했다.

 

  "감사합... 니......"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고개를 들어 감사 인사를 전하려던 입술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작은 얼굴에 오목조목 모여있는 이목구비. 모든 피부가 백옥 마냥 희고 깨끗했다. 높은 콧대, 앵두같은 입술, 날카로운 눈꼬리와 달리 큰 눈망울. 나비 날개처럼 파르르 떨리는 흰 속눈썹.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어떻게 저리 조화로울 수가 있을까.

 

  눈동자조차 우주를 그대로 담은 듯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뽐냈다. 문희의 머리색과 눈동자도 참 신비롭다, 생각했는데 가장 신비로이 여기게 되는 자가 제 눈 앞에 있다.

 

  엉덩이까지 쭉 내려오는 물결치듯 웨이브 진 머리조차 우주를 담은 듯 신비로웠다. 양 옆 사이드만 땋아서 반묶음을 했는데 그조차 요정 같다. 전체적으로 검은색에 짙은 푸른빛과 보라빛이 이곳저곳 섞여 있고, 곳곳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붙어 있다. 정수리 부터 앞머리까지는 흰머리인데, 흰머리에서 검은색으로 가는 그라데이션이 너무 완벽해서 어안이 벙벙해 질 정도였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담.

 

  "감사 인사는 됐고, 나랑 어디 좀 가자."

  "에, 예......?"

  "그럼 가기로 한 거다?"

  "예?"

 

  아니, 선생님 그니까 뭐가요. 뭐가.

 

  애초에 진희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던 여인은 입을 떡 벌린 채 지켜만 보는 시온과 카를을 보고는 눈을 번뜩였다. 이내 시온과 카를의 눈동자가 여인의 눈동자 색으로 물들어가더니 스스로 결계 밖으로 나가도록 만들었다.

 

  "저 벌레가 왔다더니 사실이었네."

  "네?"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경멸로 파도치던 눈동자가 금새 잠잠해진다. 팔이 붙잡혀 무엇도 보지 못 했던 진희의 눈치를 살피다 바로 얼굴에 생글생글 미소를 띄운 여인이 허공에 손을 넣고 부드럽게 저어 포털을 만들어냈다.

 

  "가자."

 

  ***

 

  "우와......"

 

  구태여 감탄만이 흘러나왔다. 청록색 덩쿨이 보기 좋게 적당히 감겨 있는 석고로 된 기둥이 곳곳에 박혀 있고, 땅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다.

 

  곳곳에 배치된 한 번도 보지 못한 형형색색의 꽃들이 봉화모양 화분에 정갈하게 꽂혀있었고, 처음 보는 새들이 제 아름다운 음색을 뽐내며 날아다녔다.

 

  "여긴 입구야."

  "입... 구요?"

 

  웬 입구. 그니까 어디 입구요, 선생님.

 

  제발 설명이라는 걸 해주세요. 속으로 목청 터져라 외치고 있는 문장이지만 밖으로 꺼냈다가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여러 갈래로 나뉘어진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며 따라오라 손짓했다. 좀 말로 해주면 뭐가 덧 나나. 입을 삐죽 내밀고 난생 처음 보는 풍경을 눈에 꼼꼼히 담고 있는데 갑자기 여인이 멈춰섰다.

 

  "아, 두고 왔네."

  "에?"

  "에이씨. 귀찮은데."

 

  가녀린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짜증을 내뱉었다. 아까 그 사람과 정녕 동일인물이 맞는지.

 

  그나저나 그 머리카락 그렇게 쓸 거면 나 줘요.

 

  "너 체력은 좀 되는 거 맞지."

  "네? 아, 네."

  "흠......"

 

  큰 눈망울이 위 아래로 움직였다. 제 몸을 훑어보는 게 묘하게 기분이 나빠도 말 한 마디 할 수 없는 진희였기에 인내심으로 꾹 참았다.

 

  "딱 봐도 약해빠졌구만. 이런 애가 후보라니."

  "예?"

 

  아니, 왜 보자마자 그렇게......! 이야, 처음부터 까내리네.

 

  후보라는 단어에도 묘하게 기분이 나빴지만, 갑자기 디스 먼저 시작하는 여인에 대한 호감도가 바닥까지 떨어졌다.

 

  어디서 배워먹은 예의야, 저거는.

 

  "됐어. 내가 무슨 얘길 하니."

 

  네, 하지 마세요.

 

  "아, 플로라나 시킬까. 으음, 그게 좋겠다."

 

  이 언니 혼자 잘 노네.

 

  혼자서 계속 중얼거리는 여인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던 진희가 천천히 뒷걸음질을 했다. 지금이 도망갈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도망갈 기회가 없다.

 

  최신형 핸드폰을 들더니 알 수 없는 기호를 입력하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지금이 최고의 타이밍이다.

 

  "어. 플로라. 일 중이야? 아, 별건 아니고 나 입군데, 그거 좀 가져다 줘. 어, 그거그거. 내 책상 위에 있을 거야. 응. 부탁 좀 할게."

 

  튀어.

 

  내가 이렇게 빨리 뛸 수 있구나, 라는 걸 내심 깨달은 진희가 세상을 다 가진듯한 미소를 띠며 왔던 곳으로 열심히 달렸다. 허나 진희는 잠시 잊고 있었다.

 

  "너 뭐하냐?"

 

  이곳을 포털로 왔다는 것을.

 

  그 사이에 들켜버린지라 어떻게 변명해야 할까,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동자를 진정 시키지 못 하고 머리만 긁적이던 진희가 입을 열었다.

 

  "아, 이거 꽃이 너무 이뻐서 구경 좀 하려고 그런 거예요."

  "응. 플로라. 거의 다 왔다고?"

  "... ... ."

 

  와, 나 잠깐만. 와아. 와.

 

  진희에게 말을 툭 던지는 와중에도 통화중이었던 여인이 흰 장갑을 끼며 어깨를 최대한 높이 들어 핸드폰을 얼굴과 어깨 사이에 끼워두고 통화를 이어갔다.

 

  졸지에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진희만 허탈한 채로 애꿎은 땅만 발로 툭툭 찼다.

 

  저 인간 이렇게 칠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

 

  "연진희."

  "예, 예!"

  "따라 와."

  "아, 예."

 

  진짜 이렇게까지 기분 더럽게하는 것도 능력이다, 능력이야.

 

  가볍게 혀를 차며 더러워도 따라가는데, 또다시 여인이 걸음을 멈췄다. 등에 코를 그대로 부딪힌 진희가 손으로 코를 감싸며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데 묘하게 내려앉은 공기에 의문을 품었다.

 

  "네가 여기까진 어떻게 왔지."

  "어떻게 오긴요. 저도 여기 올 수 있는데."

 

  멈춘 여인과 대화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익숙해도 너무 익숙했다. 이 목소리를 헷갈리면 다시 태어나도 할 말 없다.

 

  "연진화. 네가 여길 무슨 낯짝으로 오냐는 거다."

  "정말이지...... 너무하시네요."

 

  선배가 왜 여기서 나와......?

 

  분명 연진화는 진희를 보내고 나서 필르야티엘에 머물러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째서 여기 있는 건지. 평소보다 더 사늘하고 차가운 진화의 억양에 진희가 몸을 움츠렸다.

 

  온몸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의 마나를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이는 여인이 마나로 손을 집어 넣어 그대로 마나를 소멸시켰다.

 

  "......?!"

 

  저게 가능한 거야...?

 

  황금빛 마나가 제 팔을 감싸도 가소롭다는 듯 그냥 탈탈 털고 말았다. 얼마나 강한 건 지 가늠도 채 안 된다. 어찌보면 둘 보다 약하지만, 어찌보면 둘 보다 강한 진희가 사이에 껴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다.

 

  가운데 낀 사람이 제일 고생한다더니, 틀린 말 하나 없네.

 

  "놔주세요. 진희는 제가 데리고 갈 테니까."

  "네가 뭔데. 네 주제에 누굴 데려가?"

 

  아니, 저기요. 왜 둘 다 나 갖고 그러세요.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드라마에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막 그려지는 걸 휘휘 내젓고 어떻게든 말려보자는 생각만 했다. 무슨 잘못을 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자신이 원인이라는 거니까.

 

  "둘 다 진정......"

  "넌 빠져있어."

  "진희야, 넌 가만히 있어."

 

  서러워서 살겠나.

 

  거, 참 너무하네. 괜히 더 툴툴거리며 보란듯이 정신사납게 이리저리 움직여도 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애초에 안중에도 없었다. 진희가 뭘 하건 말건, 둘은 서로를 응시하며 알 수 없는 대화만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 참에 도망가려고 해도 두 거물이 떡 하니 앞에 있는데 어떻게 가겠는가.

 

  "네가 내 소속이라고 해도 난 인정 안 하니까. 리니아 밑으로 들어가던가."

  "...... 아직도 그 일인가요, 렌나님."

 

  네? 뭐요? 렌나요? 예? 소속이요?

 

  반항심에 이리저리 움직이던 발걸음이 멈춘다. 저가 아는 렌나는 분명 능력자를 만든 신이었다. 그럼 이 자가 그 신이란 말인가. 거기에 진화가 렌나의 소속이라니. 당황스러움에 흔들리는 눈동자가 제자리를 못 찾았다.

 

  나지막이 또박또박 글자를 읊조린 진화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날렵하게 솟은 눈꼬리를 본 큰 눈망울에 짙게 묻어나던 생기가 가려졌다.

 

  "네가 미쳤구나."

  "데려갈 수 있게 해주시죠."

  "난 뭐 데려가고 싶어서 데려가? 어차피 내 의사로는 안 된단다, 꼬맹아."

 

  흰 속눈썹을 팔랑 내린 렌나가 제 머리를 쓸어넘겼다. 구겨진 미간이 보여주는 감정에 진화의 주먹에 힘을 불어넣었다.

 

  "어째서 진희여야 했던건데요."

  "그걸 왜 나한테 묻냐고! 나도 모른다고! 잘나신 분이 정하셨는데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당신도 신이니까."

 

  그럼 신이 한 명이 아니라는 뜻인가.

 

  석고 기둥에 몸을 반쯤 기댄 채로 둘의 언쟁을 지켜보던 진희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 나갔다. 들어도 들어도 무슨 소리인 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짐작은 갔다.

 

  "그럼 뭐하니? 결정은 다 윗대가리가 하는데. 내 의견? 받지도 않아. 나도 이런 약꼴 후보로 들이기도 싫어."

  "아니, 거. 얌전히 듣고만 있으니까 이러네. 제가 약한 건 인정하는데 굳이 꼭 그렇게......!"

  "그래, 인정했네. 그럼 된 거지."

  "......."

 

  무슨 이딴 막무가내가 다 있어?

 

  아예 상대방을 말 못 하게 막아버리는 데는 렌나가 선수급이었다. 이건 인정해야 한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분노를 표출하는 진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살포시 미소 지은 진화가 렌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데리고 간다는 사실은 안 변할 겁니다."

  "하아...... 그래, 데려가 봐. 넌 아마 소멸일 거다."

 

  반쯤 뜬 눈으로 무덤덤하게 바라본 렌나의 말엔 꽤나 꺼림칙한 단어가 담겨 있었다. 진화는 예상했다는 듯 주먹만 쥐었고, 정신 사납게 날뛰던 진희는 그 상태로 굳었다.

 

  "......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용납이 안 됩니다."

  "둘이 긴밀한 관계라는 건 아는데, 선 넘지 마. 연진화, 미운 정이라도 있어서 봐주는 거야. 돌아가."

 

  긴밀한 관계라니?

 

  의문점이 솟아났다. 진화와 무슨 긴밀한 관계라는 뜻인 걸까. 관계라고 정의를 내려봤자 학교 선후배일 뿐이었다.

 

  긴밀한 관계, 이 단어에 몸을 움찔거린 진화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눈치가 아무리 없다해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살의를 뿜어내며 주변 공기를 짖이겨댔다. 이 상황이 그저 재미있는 건지 피식 웃은 렌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그래. 말 안 할게."

  "저번에도 그러셨습니다."

  "그러냐?"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 렌나가 바로 표정을 굳혔다. 아니, 어찌보면 자동으로 굳혀졌다고 봐야했다.

 

  "...... 다 고개 숙여."

 

  사늘해진 렌나와 진화의 표정에 어리둥절하며 기둥에 찰싹 달라붙어 있자, 진화가 서둘러 진희의 머리를 푹 눌렀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그저 얼떨떨하기만 한 진희의 심정 따윈 상관 없었다. 둘은 눈동자의 움직임으로만 한 곳을 응시한다. 유독 밝고 찬란해 보이는, 어찌 보면 어두운, 그런 형상이 소리 없이 조용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챘기에 진희의 머리를 더 깊이 눌렀다.

 

  "어머. 조용히 온다고 조용히 왔는데, 아닌가 보네."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 근처에서 많이 들어봤을 법한 친근한 목소리에 딱히 긴장이 안 되는 진희가 입을 비죽 내밀고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이내 그것은 중단되었다.

 

  "우리 진희는 불만이 많은가 봐. 속에서 난리가 났어."

 

  뭐야.

 

  섬찟한 느낌에 고개를 든 진희의 녹색 눈동자에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광망이 들어왔다. 찰랑찰랑 소리를 내며 오는 여인의 발치에선 끝없는 별무리가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소복한 눈처럼 흰 머메이드 드레스에 주렁주렁 달린 금빛 장신구들이 사치에 사치를 더했다. 엉덩이까지 부드럽게 내려오는 찬란한 금빛 생머리가 바람에 살랑 휘날렸다. 묘한 감정들이 뒤죽박죽 섞인 것만 같은 탁한 색상의 눈이 갑작스레 무색으로 옅어진다.

 

  언뜻보면 투명해 보이는 옅은 회색빛 눈동자. 사이드와 동공만이 검고 나머진 전부 눈의 그 색깔에서 뿌옇게 안개를 흩뿌린 것만 같았다.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징그럽고 사치스럽다.

 

  어떻게 눈이 불투명할 수가 있는 걸까. 거기에 표정이 바뀔 때마다 눈동자의 색깔이 미묘하게 변화되었다.

 

  "...... 제 1대 신이신 르레이스비 님께 축복이 있기를. 제 3대 신, 렌나가 인사를 올립니다."

  "제 1대 신이신 르레이스비 님께 축복이 있기를. 제 2대 숲의 관리자, 연진화가 인사를 올립니다."

 

  아니, 진짜 이거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신이 몇인지. 렌나만 신인 줄 알았건만 저건 1대 신이란다. 그리고 숲의 관리자는 또 뭘까.

 

  그들만의 세상에 은근슬쩍 빠지는 것도 불가능한 터라 더욱 애매했다. 이럴 거면 가르쳐주던가, 보내주던가.

 

  "그래, 그래. 렌나는 잘 했고, 진화는 돌아가보렴. 나중에 얘기하자꾸나."

  "...... 예."

 

  렌나와 언쟁을 하던 진화가 고분고분하게 허리를 숙였다. 확실히 1대 신인 지 뭔지, 절대로 까불 수 없는 영역인 것 같았다.

 

  불투명한 눈동자가 이번엔 에메랄드빛으로 물들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고 기이한데, 렌나와 진화는 익숙하다는 듯 무덤덤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 진희만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석고 기둥에 기대어 그대로 주르륵 주저앉았다.

 

  술에 취한 자 마냥 헤롱헤롱 거리는 정신이 퉁명스러운 그들의 말을 주워 담지 못 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자신이 미쳐서 꿈이라도 꾸는 것인지.

 

  차라리 꿈이길 바라는 진희에게 세상은 냉정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임을 알리듯 르레이스비가 맨발로 사박사박 걸어와 가늘고 긴 손을 내밀었다.

 

  "자, 우린 가자. 우리 둘만 조용한 곳에서 얘기 좀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네, 네?"

  "좀 어지러울 거야."

  "예?"

 

  아니, 내 의사는요.

 

  르레이스비는 그저 눈을 반달처럼 접어 곱게 웃고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냥 따라오렴."

 

  진화의 황금빛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찬란하고 위압감이 느껴지는,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의 무거운 황금빛이 순식간에 르레이스비와 진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

 

  "정신이 들어?"

  "에......?"

 

  천천히 꿈뻑이다 떠진 눈동자엔 황금빛 여인, 르레이스비가 아른거린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금발을 귀 뒤로 살짝 넘긴 르레이스비가 살포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이것이 거짓으로 찍어 바른 가식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미소, 한 떨기의 꽃을 보는 것처럼 고아했다.

 

  벨벳 소제의 푹신한 와인빛 소파에 눕혀져 있던 진희가 놀라 황급히 일어나려 했지만, 르레이스비의 손에 다시 눕혀져야만 했다.

 

  "일단은 좀 누워있어. 속이 많이 놀랐을 테니 차라도 내 올게. 좀 괜찮아지면 앉으렴."

  "아...... 네."

 

  얼떨결에 대답 했지만 썩 내키진 않았다. 혹시 제 내장을 몽땅 꺼낸 건 아닐까, 신종 장기 매매인가, 진지하게 고민해 봤자 어차피 엎어진 물임을 깨달았다. 신이라는 작자가 그딴 짓 할 리도 없는 터다.

 

  마주 보고 있는 소파 가운데 놓여진 작은 유리 테이블 위엔, 자줏빛 색깔의 마름모 모양 식탁보가 놓여져 있었다. 테이블보다 큰 크기에 밖으로 물결치듯 흐른 식탁보 위로 선명한 황금빛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서로 어울리는 듯 안 어울리는 듯, 애매하게 얽혀 있는 고리 모양의 문양엔 뜬금없은 뱀이 그려져 있었고, 그 옆엔 장미 덩쿨이 애워싸고 있었다.

 

  참 취향 독특하네.

 

  속으로 말을 곱씹으며 몸을 일으켜 세워 뭘 뒤질 지 고민했다. 신기하니까. 이리저리 움직이며 커다란 방을 눈으로 뜯어보았다.

 

  성당 같이 높게 치솟은 천장에 아찔하게 매달린 화려한 샹들리에에선 계속해서 빛의 조각들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고, 구석에 보이는 침대를 감싼 커튼들은 하나같이 고급져 보였다.

 

  척 봐도 푹신해 보이는 또다른 침대 옆엔 선반의 역할을 대신 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협탁이 놓여있었는데, 누군가가 방금 먹은 듯한 셔벗이 그대로 위에 올려져 있었다.

 

  아마 저 신의 방일텐데, 정말 청소 안 하는 신이라고 생각하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

 

  셔벗이 심하게 시선을 강탈해서 잘 몰랐었는데, 협탁 뒤로 구멍 같은 게 얼핏 보였다. 좀 더 가까이 가보니 그곳에서 기묘한 힘의 기류가 느껴졌다. 은은한 것 같으면서도 탁한 푸른 기가 끈임없이 찬 바람과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뭘까. 손을 뻗어 확인해보려던 순간.

 

  "뭐하니?"

 

  찬 기류와 함께 귀를 스윽 스쳐 지나간 날이 선 목소리에 흠칫하며 뒤를 돌아봤을 땐, 이미 르레이스비가 코 앞까지 다가온 후였다.

 

  다정함으로 감쌌던 가면의 일부가 깨진 모양인지 입꼬리가 추욱 내려가 있었다. 날카로워진 눈매에 진희가 한 생각은 아주 단순했다.

 

  ×됐다.

 

  "아, 그게 아니라. 막 빛 같은 게 보여서 그냥 뭔지만 보려고......"

 

  이런 변명따위 통할 리 없겠지. 속으로 온갖 신이란 신, 아는 신들을 총동원해가며 쩔쩔매고 있는데, 이미 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르레이스비가 눈을 곱게 접어 웃어보였다.

 

  "응. 그게 신기했구나? 그냥 장식이야, 장식. 일단 차 좀 마실래?"

  "앗... 네, 네."

 

  얼떨결에 대답한 진희를 보는 르레이스비의 시선은 참 오묘했다. 차가운 것 같으면서도 따뜻한 것 같고, 딱딱한 것 같으면서도 부드러웠다.

 

  어느새 진희의 머리색을 그대로 눈동자에 품은 르레이스비가 연두색 눈동자를 고정시킨 채 뒤를 돌았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매번 카멜레온 마냥 색을 휙휙 바꾸는 것이 기이하면서도 이상했다. 밤에 전등 하나만 켜진 상태로 르레이스비를 보면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지 않을까.

 

  으으, 소리를 내며 자신이 한 무서운 생각에 두 팔을 움켜 쥐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맨발로 보드라운 카펫 위를 사박사박 걸어간 르레이스비가 테이블 위로 티세트를 올려두고는 소파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이거 앉으라는 거지......?

 

  대충 손만 휘적이는 르레이스비를 보면 참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엉망진창인 머릿속은 나중에 정리하기로 하고 맞은편 소파에 조심스레 앉자마자, 르레이스비는 편히 앉을 시간도 주지 않은 채 큰 입을 열었다.

 

  "거두절미하고 말할게."

 

  아니, 그니까 뭘.

 

  처음부터 자꾸 자기들만 아는 얘기를 하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었었는데 또 저런다. 유독 진지해보이는 표정 때문에 잔뜩 긴장한 진희의 귓가로 들려오는 다음 말은 정신을 쏙 빼가는데 충분했다.

 

  "신이 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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