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주말에 일본에 온다는 소식으로 유경은 매우 들떠 있었다. 디자인스쿨의 꽉 짜여 진 커리큘럼으로 늘 바쁘고,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가끔 오빠가 일본에 오면 연인처럼 시내 구경도 하고 외식도 했다. 오빠는 늘 한국음식과 아기자기한 선물들을 사 오곤 했는데 그런 기대감으로 주말까지 기다릴 생각을 하니 마음속이 꽉 찬 것 같았다.
멀찌감치 마을버스 정류장에 43번 버스가 보였다. 유경의 원룸으로 가는 43번 버스는 30분마다 오는데 이곳 정류장에 도착하려면 아직 5분이 더 남았다.
'어? 웬일이지?'
유경은 버스를 잡아보려고 달렸지만 버스는 정류장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싣고 떠나버렸다. 곧 날이 저물 것 같다. 다음 버스를 타기 위해 30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어둑어둑한 정류장에서 아쉽게 놓쳐버린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은 날이다.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틈틈이 스케치 하라고 오빠가 사 준 액정이 큰 최신 스마트 폰이다. 거기에 오빠가 사 준 스마트 폰 커버, 오빠가 사 준 고리. 유경의 일상 구석구석에는 오빠의 흔적이 빼곡했다. 30분이면 캐릭터 하나 쯤 충분히 그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유경은 터치펜으로 오빠를 닮은 캐릭터를 그리기 시작했다. 몇 번의 터치로 금방 캐릭터의 생명력이 느껴질 만큼 유경의 재능은 뛰어났다.
유경이 다니는 디자인스쿨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선만 긋다가 나온 느낌이 들 정도로 단순한 작업을 많이 시켰다. 소림사의 무술 고수가 되기 위해 처음 몇 년간 청소나 밥을 짓는 것처럼 한국에서 키워 온 재능이나 자격증은 전혀 인정을 하지 않는 밑바닥 생활이었다. 처음엔 한국에서 온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쏟아지는 막노동 수준의 작업에 지치고 화도 났지만 오빠가 10여년 넘게 연구소에서 한 길을 가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며 꿋꿋이 참았다. 그녀가 그었던 수많은 선들로 그녀는 이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과 사물들의 외형을 머리속에서 자유자재로 변형하거나 생명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감각을 가지게 되었다. 유경은 이곳에서의 공부를 마친 후 한국으로 돌아가 캐릭터나 상품디자인을 하는 전문 프리랜서 생활을 하고 싶었다.
"끼이익!"
캐릭터의 아웃라인을 마무리하고 색칠을 하려던 순간 정류장에 43번 버스가 들어왔다.
"어? 아저씨, 이 버스 43번 맞아요? 하라쿠라 가는?"
"예! 맞습니다."
앞 차가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도착한 버스. 유경은 급히 버스에 오르면서 앞서 떠난 버스를 잘못 보았나 하는 생각을 했고 지금 자신이 타는 이 버스가 정시에 도착한 것으로 여겼다. 유경은 평소 때처럼 버스 뒤쪽으로 걸어가 앉았다. 20명 쯤 탈 수 있는 버스지만 앞서 떠난 버스가 사람들을 모두 태우고 떠나 버렸기 때문에 버스 안에는 유경 외에 아무도 없었다. 유경은 다시 휴대폰을 꺼내어 스케치를 계속 했다.
43번 버스 기사는 백미러로 유경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마스크 형태의 방독면을 착용한 후 지니고 있던 무선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버스 제일 뒷좌석 아래에 놓여있던 작은 물체의 전원이 켜졌다. 유경은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갑자기 졸음이 밀려왔다. 그리고는 이내 버스 유리창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