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미친놈한테 잘못 걸렸다.
「하, 하읏...!」
시녀 리오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크고 두려운 것에 일찍 겁을 먹고 입을 막았다.
자신의 앞에 있는 나체의 대공에 리오네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으윽, 아파요..!」
기어이 자신의 속을 비집고 들어온 크고 단단한 것에 리오네의 눈이 대번에 커졌다.
처음 겪는 일에 그녀는 아프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리오네, 아프지 않게 해줄게.」
그는 컸다. 마음도 씀씀이도. 모든 게 다.
잔뜩 부풀어 오른 용기는 그날의 밤을 덮쳤다. 밤은 길고 길었다.
“이러지 마세요, 후으‥‥‥.”
혼잣말과 함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꿈에는 내가 빙의되기 전 읽던 소설의 한 장면이 그대로 펼쳐졌다.
“아우,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네.”
어찌나 후끈하던지. 그들의 정사를 몰래 훔쳐 본 다른 조연이 된 것만 같아 나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행여 잠꼬대를 들었을까 싶어 주위를 살폈지만, 방 안엔 나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손을 이리저리 휘휘 저어 들어보니 나를 구속했던 밧줄은 이미 풀어진지 오래였다. 완벽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아, 따가. 아쓰쓰...”
손목의 밧줄자국은 붉게 남아있어 만지면 은근히 쓰라려 인상을 찌푸려졌다.
“맞다. 나 또 납치 됐지?”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미친놈에게 또 한 번 납치 된 사실을 깨닫고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변태 또라이를 겨우 벗어났다 했더니, 이번엔 자칭 구원자라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앞이 깜깜해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머리를 헝클이고 쭈그려 앉아 걱정 어린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나는 이대로 또 납치를 당해 생을 마감하는 걸까? 내가 빙의한 캐릭터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고 이렇게 비참하게?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탈옥경험도 한 번 있으니, 그 값진 경험을 토대로 또 탈출을 하는 수 밖에.
실행에 옮기기 위해 나는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아까 벽에 부딪혀 다친 허리와 무릎이 멀쩡했다.
“‥‥‥아, 진짜 이상하네.”
나는 온 몸을 이리저리 돌리고 구부리며 별 짓을 다 했다. 그러나 몸이 전혀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쌩쌩했다.
몸 주인이 회복력이 빠르네. 나는 기쁨의 미소를 지으며 방문으로 향했다.
완벽한 탈출의 요건을 갖추게 된 이상,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그런 그때였다.
어디선가 쿵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쾅 닫혀 있는 방의 문이 우악스럽게 열렸다.
“꺅!”
방문 앞에 있던 나는 깜짝 놀라 몸을 굽히며 비명을 질렀다. 이번엔 손과 발이 자유로워져 수틀리면 칠 기세로 주먹을 꽉 쥐었다.
“‥‥누, 누구세요?”
당황스러울 정도로 말이 버벅 거려졌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방이 수상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한참을 올려다봐야 얼굴이 보일 정도로 길게 쭉 뻗은 다리와 큰 키, 비스듬히 열린 창문 새로 불어오는 바람에 어깨까지 오는 긴 은색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장발의 미남자였다.
“인간?”
그는 나를 데리고 온 남자와 똑같은 반응을 하며, 갖은 인상을 찌푸렸다.
줄줄이 미남을 보는 건 참으로 흔치 않는 기회인데, 줄줄이 똥 씹은 표정을 마주하는 것도 흔치 않았다.
“네, 인간..인데요?”
대뜸 울컥함이 치밀어 올라 한 마디 대꾸하니, 장발 미남의 미간이 또 한 번 찌푸려진다.
팔짱을 낀 채 고고한 태도를 유지하는 남자의 머리카락이 또 한 번 바람에 흩날렸다.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콧대는 또 어찌나 미끈한지, 얼굴은 하얘 은색 머리와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남자는 그런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얼마안가 입 꼬리를 활짝 올렸다.
“실례했네요. 아무튼 잘 왔어요, 아름다운 레이디.”
아름다운, 레이디? 처음 맞아보는 환대에 오히려 표정이 더 어색하게 굳어졌다. 그러자 남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제가 말실수라도 했나요?”
“아, 아니요! 절대요.”
이렇게 사람이 한 순간에 태도가 변할 수가 있다고? 나를 바라보던 아까의 경계어린 눈빛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미남이 내게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몸은 괜찮아요? 주인님께서 인간을 모시고 왔다길래 조금 놀랐는데. 다친 상태시더라구요.”
“아, 설마. 치료를‥‥‥.”
남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도 원래 회복력이 좋으신 편이라, 치료는 수월했어요. 아, 레이디.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이, 이름이요?”
나를 향해 혐오 섞인 표정을 짓던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하게 내게 물으며 상황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름이 그니까‥‥‥.”
그러고 보니, 내 이름도 모르잖아? 이 세계로 온지 건 일주일 그 이상이 넘어가는 시간동안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어, 그러니까‥‥‥.”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두 눈만 굴렸다.
“이름이‥‥‥.”
이름.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게 이름이라 이토록 고심한 적이 없었다.
한국 이름을 말해야하나? 내가 이해랑이라고? 그럼 여기 소설의 전개가 완전 엉망 되겠지?
근데 여기 소설 속 인건 맞긴 해?
머릿속이 점점 복잡했다.
“혹시 이름을 모르는 건가요?”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했다.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게 좋다고,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조금 까칠하게 대답했다.
“설마요. 제가 제 이름도 모를까 봐요?”
“아차, 제가 또 실수를.”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해왔다. 어떤 이름이 좋을까 하며 생각하다 이내 무언가가 번뜩 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나는 아! 하며 입을 열었다.
“메리엔.”
긴 고민 끝에 나온 이름은 ‘메리엔’ 이었다. 내가 빙의되기 전 네일 받으러 갔던 네일 샵의 이름이었다.
그 원장님이 참 잘 해주셨는데‥‥‥.
“리, 릴리즈 메리엔이요. ‥‥‥제 이름이에요.”
뒤이어 성까지 붙이니 제법 그럴싸한 로맨스 소설 주인공 이름 같았다.
누가 봐도 여주인공 이름 같지 않나?
“릴리즈 메리엔?”
남자가 연거푸 묻자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이게 아닌가하는 의심도 들어 눈치를 살폈다.
“레이디에게 어울리는 아름다운 이름이네요.”
내 생각과는 달리, 남자는 아무런 의심조차 하지 않으며 무던히 잘 넘어갔다.
“예뻐요.”
심지어 어울리는 이름이란다. 황송한 미남에 칭찬에 입 꼬리가 올라갔다.
“감사합니다.”
몸 주인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아이큐가 세 자리 수가 되는 내 지적감각에 감탄을 하며 나는 한국에 계실 원장님들에게 속으로 감사인사를 표했다.
원장님, 예쁜 이름 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남자가 나보다 더 예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전 리베히 도니스 라고 합니다. 전 이 저택의 주인님을 모시는 집사이자 대리인입니다. 편하게 리베히라고 불러줘요. 레이디.”
장발 미남자의 이름은 리베히 도니스. 남자야말로 그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아, 네. 저도 그냥 메리라고 불러주세요.”
뭔가 성스러워 보이는?
예전 모 만화의 청명한 그 남자와도 닮은 것도 같다.
그 생각이 들자, 어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쯤 되면 현실감각이 있을 법도 한데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호호호.”
매우 차분한 웃음이었지만, 머릿속은 난장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난 아무생각이 없었다. 대체 난 지금 여기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 정도 였다.
이 남자도 잘생겼고, 그 사채업자 미치광이도 잘생겼고. 확실히 소설인가보다. 그때,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레이디, 그럼 저 따라 가실까요?”
나는 내게 내민 남자의 손을 잡고 생각했다. 부드러운데다가 다정하기까지.
새로운 남자주인공인가?
‥‥‥그렇다면, 합격이다.
***
남자주인공2는 나를 데리고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허름한 방 안에서는 몰랐는데 막상 방에서 나오니 꽤나 넓고 깨끗한 복도가 나와 입이 떡 벌려졌다.
곳곳에 장식 된 화려한 문양의 공간들을 보니 대충 여기도 꽤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의 저택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사채업자는 아닌가 보네.
그럼 자작보다 더 높은 위치?
단발성으로 출연한 베르테 자작의 저택도 꽤나 볼거리가 풍부했으니까. 여기 사람들은 대체로 잘 사는 건가?
그것도 아닐 거다. 그러고 보니 <대공님> 소설의 대공도 엄청나게 화려한 저택의 소유자였지 않나. 뭔가 그 소설 속 저택과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설마.”
‥‥‥진짜 그 소설 속 대공의 저택인 거 아니야? 절로 터져 나온 감탄사에 앞서 걷던 리베히가 뒤를 돌았다.
“무슨 일인가요?”
나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속마음을 들켰다는 생각에 귀가 빨개진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얼마안가 리베히는 엄청난 크기의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를 따라 나도 멈춰서 위엄 있는 문을 올려다보았다.
“‥‥‥우와.”
내가 감탄하고 있는 사이, 리베히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 굳이 그를 지켜보고 있지 않아도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라는 걸 어렴풋 느낄 수 있었다.
“리, 리베히님?”
나는 눈치를 살피며 그의 이름을 조심스레 불렀다.
내 부름에도 미동 없던 리베히가 순간적으로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난 또 베르테 자작처럼 미친놈인가 싶어 뒷걸음질을 쳐대었다.
“아, 아. 몸 상태가 안 좋아져서 저도 모르게 예민해졌네요. 미안해요.”
다행히 그는 다시 원래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달래듯 말했다. 나는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잠시만.”
리베히는 문을 열지 않고 머뭇거렸다.
“아, 아닙니다.”
거 되게 우물쭈물 거리시네. 약간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인가 보다.
“그런 성격은 아닙니다.”
그때, 리베히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눈만 멀뚱히 떴다.
“저 아무 말도 안했는데‥‥‥.”
“들어가시죠.”
마치 내 생각을 다 들여다보고 대답을 하는 거 같아 나는 리베히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내 시선을 끝까지 무시한 채, 방안으로 날 안내했다.
“‥‥‥.”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베르테 자작보다 훨씬 더 화려한데다가 고풍스럽기까지 한 내부.
소설 속에서만 봤던 것들을 직접 눈앞에서 본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나를 구원시켜준 자칭 구원자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