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가씨, 준비 도와드리겠습니다. "
아, 공작이 온다던가 뭔가 준비해야한다는 걸 얼핏 들은 것 같긴 한데 그냥 연기하는 꼬맹이가 기분 나빠 홧김에 한 말이었고 진짜로 귀찮은 짓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 진짜
" 들어와 "
" 먼저 씻으셔야겠습니다. "
먼저 씻으셔야겠다니 말이 좀 뭐랄까 낮잡아 본다고 해야하나 뭐야 저 기분 나빠하는 표정은? 지금 기분 나쁜 건 난데. 준비를 도와드리러 왔으면 보나마나 시녀나 하녀 쯤 될 터인데 막말로 지들 주인은 공작이라지만 주인의 딸인 나에게 지을 수 있는 표정은 아닌데
뭔가 이상했다.
" 옷은, 준비한 걸로 도와드리겠습니다. "
보통은 뭐 입을 지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닌가? 내가 괜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아닌데. 사용인들의 태도는 상당히 예의를 차리는 듯 해 보였지만 조금만 깊게 봐도 불쾌했다. 상당히
" 뭐... 이걸 입으라고? "
준비했다기래 얼마나 대단한 옷을 준비했을까 생각해며 본 옷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기괴했다. 붉은 색 프릴이 잔뜩 달리고 가슴과 등이 깊게 파였으며 여기저기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보석을 단
아무리 봐도 이제 18살 된 공녀가 입을 옷도, 겨우 공작이 공작가에 돌아와서 마중나간다고 입을 옷도 아니었다.
" 하, 공녀님께서 추천해주신 옷입니다. 그냥 입으시죠 "
공녀? 공녀는 난데 무슨 공녀. 아젤란 말하는건가. 걔가 추천해준 옷을 내가 왜 입어. 가뜩이나 금방 와서 나에게 할 말 못 할 말 안 가리고 내뱉고 간 아인데
" 야 그냥 입어? 내가 이 옷을? "
" ...... "
" 너 같으면 입겠니? 이딴 기괴한 옷을 골라온 공녀님 얼굴 좀 볼까? 내가 다시 고를테니 가지고 저기 서 있는 아이 빼고 다 나가 "
이딴 유치한 장단에 맞추기엔 내가 너무 귀찮다. 뒤에 그저 멀뚱하게 서있는 귀엽게 생긴 갈색머리 아이만 남기고 다 나가라고 명령하자 한숨을 쉬며 인사조차 하지 않고 나가는 사용인들을 벌하고 싶지만 귀찮으니 다음을 노려야지
" 거기 이름이 뭐니 "
" 델...카 입니다. 저 그냥 저는 한미한 하녀...인데요 "
남아라는 나의 말의 뜻이 잘못 전해지기라도 한 마냥 벌벌 떨며 서 있었다. 델카. 델카라 귀여운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센 이름이네
" 한미한 하녀면 어때 아까 나간 그 아줌마보단 낫잖니, 잡담은 그만하고 얌전한 드레스 좀 가져다줄래? "
" 제가...어찌 감히 아가씨가 입을 드레스를 고릅니까... "
귀여운 외모와 센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소극적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가 고를 수 밖에 옷장을 촥 펼치니 눈 앞에 보이는 건 화려하고 아름다고 뭐 그런 옷이 아닌
오래되어 보이고 냄새가 날 것 같은 옛날 옷 뿐이었다. 와- 저런 이건 또 무슨 일이야
확실하게 공작가에서 상당히 미움을 받고 있는 듯 싶다.
" 델카, 내가 옷이 이렇게 없었나 "
" 그...거야 아가씨의 예산은 공작부인께서 관리하시고... 게다가 아가씨는 활동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셔서 방안에만 계셔서 몇 년 동안 옷 사실 일이 없으셨죠... "
아 그러니깐 네 말은 지금 내 예산은 공작부인이 다 가져가고, 나는 방에만 콕 틀어박혀있는 미움털 박힌 공녀라는거네, 아 기구하다 기왕 부잣집에 태어났으면 즐길 건 즐겨야지
" 혹시 입으실 옷이 없으시면 아젤란 아가씨게 빌리시는게... "
내가 미쳤다고 막말을 쏘아내고 이상한 드레스를 사용인들에게 들려보내 입히려는 얘한테 옷을 빌리겠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델카는 죄가 없었으니 화풀이를 할 수 없어 입을 꾹 다물고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옷을 집어들었다.
" 이거 어때 "
" 아가씨야 워낙 미모가 대단하셔서 다 잘 어울리죠... 근데 그 드레스 원래 발목까지 오는건데... "
좀 짧긴 하네, 아예 짧으려면 짧던가 어중간하게 무릎 밑까지 온다라 뭐 패션에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입을 수만 있는 옷이면 딱히 상관은 없다
" 이거 입을게 좀 도와줄래? "
" 물론이죠! 와... 아가씨 너무 예쁘세요. 정말로요 "
" 녀석, 빈말은 "
말로는 빈말이라 했지만 솔직히 거울을 보고 조금 놀라는 중이다. 눈에 띄지 않게 수수했던 초록색 원피스가 내가 입자 마냥 파릇파릇한 잎같이 반짝였다.
역시 예쁜건 행복해
" 저...근데 공녀님 역시 길이가... "
그러니깐 말이다 소매도 좀 짧아보이고, 정말 방에 틀어박혀 사는 인생인가 보다 옷장에서 상태가 제일 괜찮은 옷을 골랐는데도 이러다니
" 괜찮아 델카,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 나갈 준비하자 "
" 아젤란 공녀님은 이것저것 예쁘게 치장하고 오실텐데... "
왜 저가 더 아쉬워할까 나름 귀엽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좀 있어.
" 나 정말 괜찮아, 더 있다간 공작님께서 이미 오시겠다. 나가자 "
나도 좀 아쉬운 마음이 없잖아 있었지만 정말로 늦을 것 같았기에 델카를 데리고 서둘러 방에서 나왔다. 흐음 그러니깐 클레라의 방은 2층이고 1층 현관으로 가려면 저기로 돌아서
팍
" 압 "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가는 모퉁이에서 무언가 딱딱한 것과 내 예쁘고 소중한 이마가 부딪쳤다. 고통에서 참는 것에 재능이 있어서 주저앉거나 큰 소리는 내지 못했지만 '압' 이라는 함축적이고 이상한 단어가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아 쪽팔려
" 클...레라? "
" 죄송합니다. "
아무래도 진짜 돌덩이에 부딪쳤나 멍 들것 같이 화끈 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앞에 버티고있는 남색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키 엄청 크네 목 아파 안 볼래
" 밖에 나온거야? "
뭐야 저 남자 나 알아? 아니 당연히 알겠구나 내 앞에 서 있는 남자는 클레라의 오빠인 클렛프였다. 밖에 나왔냐니 그건 무슨 황당한 소리래
" 네 나왔는데요 소공작님"
" 무슨...일로 "
" 공작님 오신다고 하셔서요 "
눈썹이 까딱하고 움직인다. 내 말이 무슨 신경을 거슬렀나 기분이 언짢아 보인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 그저 무표정이었지만 남들 감정을 한 눈에 알아보는 나는 느꼈다.
아 뭔가 기분이 나쁘구나
" 네가... 그런 일로 방에서 나온 적은 없었잖니 "
아니 사람을 뭘로 보고 공작님이 오신다는데 나가지도 않을 사람으로 보이나. 물론 클레라가 워나 방콕이었다는 건 알겠지만
" 아아 그냥 심경의 변화가 좀 생겨서요 "
" 3년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잖나 "
뭐 미친 무슨 3년이요? 무슨 사람이 3년동안 방안에만 처박혀 있어요. 이 소공작님 유머 감각이 좀 있으시네
" 제가? 3년 동안이나? 에이 설마요 "
" 정확히는 2년 276일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지 "
2년 276이나 3년이나, 아니 거기다가 소공작님은 그걸 왜 세고 계시는데요.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클레라에게는 큰 문제가 있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