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몇 명까지 죽여봤어?
“몇 명까지 죽여봤냐고?”
뱀파이어가 묻자 효령이 말하였다.
“저기 말이야, 이 21세기 현대 법치 문명 선진 국가에서 그런 야만스러운 질문을 받으니 매우 난감하구만 그래.”
그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 보이며 말했다.
“파리 새끼 하나 내 손으로 못 죽이는 소심한 남자한테 그런 질문은 부디 삼가 달라고.”
효령의 말에 뱀파이어가 코웃음을 치며 말하였다.
“지나가는 개도 그 말은 안 믿을 텐데. 하긴, 차도살인의 대가니 ‘네 손으로’ 죽인 건 아닌 건가?”
“저기, 다 좋은데 일단 이것 좀 치우고 근처 어디 술집에라도 들어가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인간은 목이 잘리면 보통은 죽거든? 내가 죽으면 니가 온 보람이 없잖아?”
현재 효령의 목젖에는 날카로운 단검의 날이 바짝 닿아 있는 상태다.
그리고 그 단검의 손잡이는 효령의 뒤에서 그를 끌어안다시피하고 있는 뱀파이어의 손에 들려 있다.
지나다니는 이 없는, 가로등조차 없는 좁고 어두운 골목길이다.
이미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
“밤길에 목 조심하라고 경고했을 텐데.”
“아아, 물론 기억하지. 근데 지금은 밤이 아니고 새벽이잖아?”
그 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한 자루의 수리검이 뱀파이어를 향하여 날아들었다.
뱀파이어는 효령의 목에 대고 있던 단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단검의 날에 부딪힌 수리검은 탕 하는 충돌음과 함께 방향을 바꾸어 허공으로 날아갔다.
뱀파이어는 빠르게 뒤로 몸을 날려 순식간에 효령으로부터 다섯 걸음 이상 떨어져 섰다.
그 몸놀림은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빠르기였다.
효령을 기준으로 뱀파이어와 반대쪽 골목 코너에서 여자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장님 나이샷! 이야, 집 나간 딜러가 기막힌 타이밍에 돌아왔구나!”
효령이 한숨을 크게 내쉰 뒤 살았다는 표정으로 목을 손으로 닦는 시늉을 하며 말하였다.
“어휴, 하마터면 죽을 뻔 했네. 난 딜러나 탱커가 아니라 위대한 지략가, 뭐 그런 쪽이라서, 하하.”
여자가 효령 쪽으로 걸어와,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녀는 등에 길다란 악기 케이스를 메고 있었다.
그 케이스를 보며 뱀파이어는 생각했다.
흔들리는 정도로 보아 진짜 악기가 들어 있진 않는 것 같고, 그렇다고 화약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야.
아마도 도검류겠군.
효령을 돕고 검을 다루는 여자라면, 아마도 그 여자겠지.
최초의 뱀파이어, 일단.
300년을 살면서 익히 들었지만, 실물로 이 여자를 보는 건 처음이군.
“왜, 향수가 맘에 안 들었어? 그거 엄청 비싼 거라고.”
효령의 말에 뱀파이어가 말하였다.
“아무래도 내가 좀 이득을 본 장사인 것 같아서.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그래서 은혜 갚으려고 다짜고짜 이 야밤에 등 뒤에서 목에다 칼을 들이대셨다?”
“새벽이라더니.”
“그 쫌, 넘어가자.”
효령이 짜증난다는 투로 말하자, 뱀파이어는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향수에 대한 보상의 의미로 사진 한 장 찍어주지.”
“프로필 사진? 이 나이에 연예인 데뷔할 생각은 없는데.”
“그 나이니까, 영정사진 한 장은 찍어 둬야지. 언제 갈지 모르는데.”
뱀파이어의 말에 효령의 옆에 서 있던 일단의 손이 악기케이스 쪽으로 반사적으로 향하였지만, 당사자인 효령은 오히려 태평한 어조로 말하였다.
“설마 진심으로 날 죽이려고 온 거였냐? 그 차림으로? 참고로 난 남자 뱀파이어한테 성적으로 매혹되는 취미는 없다.”
“오늘 낮, 일본에서 수호자가 당했다.”
효령은 얼굴을 찌푸릴 뿐 뱀파이어의 말에 딱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번엔 교통사고. 도쿄 롯폰기 한가운데서 승합차로 밀어버렸어. 수호자는 즉사. 운전자는 자기가 왜 그랬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하고.”
“어디 보자…지난 달 루마니아의 마르첼은 공장 폭발 사고로 죽었고, 이번 달 시애틀에서 제리는 강도살해, 그리고 이제 도쿄에서 고바야시는 교통사고라. 다양하네.”
“그래서, 아직 살아 있을 때 영정사진이나 미리 찍어주러 왔다.”
“그냥 경고해 주러 왔다고 하면 송곳니가 썩어 들어가냐?”
“이 정도 정보면 향수 값은 되겠지.”
“아직도 안 갔어?”
효령이 쏘아 붙이듯 말하자 뱀파이어는 훗 하는 코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웬만하면 본체는 숨어 있고, 지금처럼 분신으로 돌아다니는 게 좋을 거야.”
“뭐야, 이게 분신인 거 알고 있었냐? 갑자기 재미가 뚝 떨어지네.”
“아무도 안 믿고 사는 천하의 모사꾼 효령이 등 뒤에서 발자국 소리까지 다 내면서 다가온 자에게 기습을 허락한다고? 그것도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걸어갔고, 점점 멀어지더니 결국 골목길을 돌아 효령과 일단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효령이 일단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살기가 참 쉽지 않아, 그치? 그래도 웰컴 홈! 마이 시스터!”
일단이 별 반응 없이 품에서 종이를 꺼내 효령에게 건넸다.
“여긴 왜 가로등도 없어…”
효령은 핸드폰을 꺼내서 핸드폰 불빛으로 종이를 비춰 보았다.
“’재(再)’라…”
그는 그 이상 특별히 종이에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한 태도로 종이를 접어서 바지 주머니에 넣어버린 뒤 말하였다.
“가자,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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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왔구나, 일단.”
효령과 일단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실에 있던 영실이 반갑게 둘을 맞이하였다.
“그래, 일단 돌아왔고 또 나갈 거야.”
효령이 아재개그를 던졌고, 일단은 그의 개그를 무시하며 악기 케이스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소파에 곧바로 몸을 던졌다.
“피곤하네. 종이 찾으려고 중국을 세 달 동안 쏘다녔으니.”
“피로회복에 좋은 차 한 잔 줄까?”
“부탁해.”
영실이 주방으로 가는 것을 보며, 효령이 말하였다.
“난 이 종이 처리하러 간다. 굿나잇.”
그리고 효령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은 효령은 바지 주머니에서 아까 접어 넣은 종이를 꺼내 왼손에 쥐었다.
“아, 귀찮아 귀찮아…육백 년 동안 귀찮았고, 오늘도 귀찮고, 앞으로도 귀찮아…그래도 해야겠지?”
효령은 잔뜩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비어 있는 오른손을 들어 벽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입을 열어, 고대어 주문을 외웠다.
“@#$%%$.(수호자의 문, 개방.)”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하얀 벽면이 일렁거리더니, 마치 동굴과도 같은 길이 생겨났다.
효령이 한숨을 한 번 푹 내쉰 뒤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벽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방 안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