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율 여화를 찾기 위해 다시 만나기로 한 오늘.
나는 일찍이 호지 궁에 와서 화연님을 기다렸다.
“은가람!”
저 부름 한번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을 안겨준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살짝 유혹을 섞어 웃으며 화연님을 반겼다.
“네, 화연님. 어서 오세요.”
그런데 화연님은 내 미소에 넋을 놓기는커녕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한율 여화가 어디 있는지 안다며, 월궁에 있을 거라며 거기부터 가자 신나하셨다.
지금 내가 심혈을 기울여 웃은 미소보다 한율 여화를 찾는 게 더 중요하신 건가? 에 대한 서운함, 한율 여화가 월궁에 있을 거란 건 어떻게 아신 거지 하는 의문이 밀려올 때 화연님이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내 손을 잡아서!
나는 심장이 멈춘다는 게 이런 거다, 를 경험하며 숨을 들이켰다.
동시에 세상이 멈춘다.
“은가람?”
“아,”
그러나 화연님의 부름 한 번에 세상이 다시 돈다.
심장이 멈춘 느낌이 거짓이었다는 양 이젠 터질 듯이 뛴다.
화연님은 여기서 손을 잡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시겠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친절히 의미를 가르쳐주고 화연님과 저는 연인 사이가 아니니 손을 잡으면 안 됩니다, 라며 괜한 기회를 날려 먹을 정도로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쑥스러움을 최대한 숨기며 화제를 돌렸다.
“화연님, 월궁은 그쪽이 아니에요.”
그에 화연님이 머쓱해 하며 내게 길 안내를 맡겼다.
내 손을 꼭 잡으신 그대로.
심혈을 기울인 내 반김보다 한율 여화 찾는 게 중요하면 어때, 한울 여화가 월궁에 있다는 걸 알아챘으면 어때.
화연님이 내 손을 잡은 그 자체로 나는 이미 세상을 다 가졌다.
*
화연님은 나와 손을 잡고 있다는 걸 까먹었는지 월궁에 와서도 내 손을 꼭 잡은 채였다.
이대로 손을 잡은 채 한율 여화에게로 간다면 한율 여화는 나와 천호의 앙숙 같은 사이를 잘 아니 내 손에서 화연님의 손을 빼내려 할 거다.
한율 여화는 차마 화연님에게 화내진 못하고 나에게 적의를 들어내겠지.
그때 내가 약한 척 조금만 해주면 상황을 파악할 수 없는 화연님은 일단 약해 보이는 내편을 들어주실 거다.
그럼 한율 여화는 높은 확률로 쌓이고 쌓였던 상처가 터져 화연님에게 화내겠지.
그에 내가 약간씩 끼어들어 상황을 조종하면 오늘도 화연님과 한율 여화의 화해는 저 멀리.
나쁘지 않은 계획을 꼭 씹는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다급한 한율 여화의 인기척이 잡혔다.
와라, 멍청한 한율 여화.
“화연, 더러운 것이 화연의 손을 잡고 있었다면 내치셨어야죠.”
한율 여화는 그리 말하며 화연님의 손을 잡고 있던 내 손을 거칠게 빼냈다.
아,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멍청하긴.
어떻게 이렇게 내 생각대로 움직여 줄 수가 있나 싶었다.
나는 한율 여화의 손을 뿌리치고 한율 여화에게 잡혔던 내 손목이 무척 아프다는 양 인상 쓰며 다른 손으로 한율 여화에게 잡혔던 손목을 감쌌다.
자연스럽게 화연님의 시선이 한율 여화에게 잡혔던 내 손목으로 향했다.
그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 눈가에 눈물이 맺히게 했다.
음, 어떤 식으로 갈까.
그래, 아픔 따위에 눈물 흘리지 않겠다 결심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연약해서 보호해주고 싶은 느낌으로 가자.
“하,”
그런 나에 한율 여화가 무척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쳤지만 그건 내 신경 밖의 일이었다.
아, 아니네.
한율 여화는 고맙게도 나를 공격하려는지 룬을 위험하게 움직이며 내게 다가오려 했다.
평소 같으면 나 또한 바로 룬을 움직였겠지만 지금은 화연님이 있다.
여기와는 다른 세계에서 살다 와 우리와는 생각이 조금 다른 화연님이.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역시.
화연님은 나를 위협하는 한율여화에게서 나를 보호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세게 말하시는데?
뭐, 내가 나서지 않아도 싸우게 되는 분위기라면 나로선 나쁘지 않은 징조였다.
"그깟 손 한번 잡았다고 누가 이딴 식으로 굴어? 내 앞에서, 내 사람을, 죽일 듯이 룬으로 위협해놓고 그딴 표정이라니. 또 나만 나쁜 사람 만들려고?“
"그깟, 그깟 손 한 번이라 하셨습니까"
“그래, 그깟 손. 바론과도 실컷 잡은 그깟 손.”
어찌 독설을 내뱉는 것조차 사랑스러우실까.
나는 화연님의 사랑스러움에 녹아내리며 한율 여화에게 내 손을 흔들었다.
대충 나랑도 방금까지 실컷 잡으셨지, 를 담은 도발.
순간적으로 나를 으깨놓을 듯 노려본 한율여화는 시선을 내리깔더니 화연님을 정확히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화연의, 약혼자입니다. 제 명예에 흠을 내는 것도 정도껏 하십시오. 화연."
상처를 꾹꾹 담아 내뱉은 한율 여화의 말을 받아치는 화연님.
이번 대답은 나에게도 좋은 쪽은 아니었다.
“좋아서 약혼한 게 아니라 이용하려고 약혼한 사이인데 명예에 흠내는 정도가 대순가? 응? 한율 여화.”
이건 마치 화연님이 아니라 천호가 말하는 것 같은 말.
순간 불안감이 치솟았다.
알고 보니 화연님이 아니라 천호였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내가 멍청한 한율 여화도 아니고 천호와 화연님을 구분 못 할 리가.
그 사이 한율 여화는 상처받아 뛰쳐나갔고 화연님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아...”
그 뒤에 들리는 잡음.
“감히 고귀한 천호 폐하께 저리 무례하게 굴다니.”
“그러니 사랑을 못 받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리 기가 세서야. 반려면 천호 폐하의 기를 살려 줄 줄도 알고, 천호 폐하가 실수 몇 번 하셔도 너그러이 용서해줘야지. 그래야 천호의 반려 아니겠나.”
“에헤이, 그래도 저건 아니지. 한율 여화가 폐하의 약혼남인 걸 다들 잊었나?”
“그래도요. 약혼남이라 해도 천호 폐하는 많은 이성을 거느려야 할 의무가 있는 위치예요. 저 혼자 욕심부려 이사단이 난 거 아니겠어요? 자업자득이죠.”
“쉿, 다들 말조심해. 천호 폐하든 백호가 보름의 자식인 한율 여화든 함부로 거론하며 입을 놀리면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거야.”
그리고 미친, 역시 난 쓰레기야... 절망하고 있는 화연님의 반응.
그에 안심했다.
‘아니, 그건 시스템이 패널티 줘서 제 멋대로 행동해지는거거든. 나도 쓰레기 짓 하기 싫단 말이야!’
이 또한 패널티라는 것이겠지.
그래, 내가 화연님과 천호를 구분 못할 리 없다. 실수할 리 없다.
내 심장은 화연님에 의해서만 두근거리니까.
나는 안도하며 원래의 계획대로 연기했다.
처음은 죄송함을 담아 시무룩하게,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한율과 화해하려다 되려 싸우시고..."
"너 때문 아니니깐 죄송할 필요 없어. 어디 다친 곳은 없고?"
끝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순진하게 웃으며.
"네... 화연님 덕분에요. 감사합니다."
목표는 착한 사람으로 각인시키기인데 화연님은 오, 치유된다... 를 얼굴에 써놓은 채 내 얼굴을 감상하기 바빴다.
뭐, 화연님이 치유된다는데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한가.
나는 혹여 못생겨 보일까 긴장하며 화연님의 시선이 쑥스럽지 않은 척 견뎠다.
그러다 문득 화연님이 아, 하며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왜 어제 월궁부터 안갔어?”
살짝 당황하긴 했지만 이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겠지, 예상했던 나는 미리 준비해뒀던 말을 내뱉었다.
“너무 당연한 거라... 어떠한 이유로 화연님이 월궁을 제외하셨기 때문에 제게 한율이 어디 있냐 물어본 줄 알아서 그랬어요”
그에 화연님은 잠시 생각하다, 어떤 식으로든 납득했는지 혼자 고개를 끄덕이셨다.
어찌 이리 순진하고 귀여울 수가.
나는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풍경을 감상하는 척 얼굴을 돌렸다.
*
오늘은 운이 좋으려나 보다.
나는 저 멀리서 보이는 화연님에 곧바로 달려갔다.
“화연님.”
물론, 화연님이 시선이 닿을 땐 뛰지 않은 척, 우연히 만난 척 했지만.
“아, 은가람. 안녕.”
“네, 안녕하세요. 근데 어딜 가시길래 이리 기쁜 표정이신가요?”
“천궁에 가고 있었어. 초콜릿이나 사탕 좀 가져오게.”
그렇다면 중요한 일은 없으시단 이야기겠지.
나는 자연스레 같이 있을 것을 권했다.
“아, 혹 화연님께서 괜찮으시다면 그것들을 받으시고 저와 함께 나들이 안 가실래요?”
살풋, 화연님의 취향에 맞게 웃는 건 덤이었다.
그에 화연님은 곧바로 당연히 가야지! 라고 대답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
“미안, 혹시 다음으로 괜찮을까?”
그러나 나온 것은 거절.
“아...”
나는 자연스레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습관적으로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서운한 척 연기한 것이 맞긴 하지만, 7할은 진짜로 거절당해서 우울한 거였다.
그런 내 표정에 화연님은 저가 다 가슴 아파하는 표정을 지으시며 입술을 움직였다.
그에 순간적으로 기대했으나 돌아오는 건 완곡한 거절.
“진짜 미안. 나도 놀고 싶긴 한데 오늘은 한율한테 사과해야 해서 안돼. 다음에, 아니면 내일. 천궁으로 와. 같이 나들이 가자.”
그래, 바로 내일. 그것도 천궁으로 오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이걸로라도 만족... 잠깐.
“한율 여화에게 사과하는 것 때문에 오늘 나들이 못 가시는 거예요?”
“응? 응.”
당연하다는 듯 답하는 화연님에 순간 충격받아 나도 모르게 생각한 그대로를 내뱉었다.
“왜요...? 화연님은 천호시잖아요. 사과 따위 할 필요가,”
“울렸는데 사과는 해야지. 근데 너 한율이랑 친구 아니었어?”
아차.
명백한 내 실수.
게다가 천호니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이쪽에서나 할 생각이었다.
나는 급하게 변명을 생각해ㅐ 내뱉었다.
“맞,아요... 죄송해요. 저번에 한율이 저를 더러운 것이라 칭했던 섭섭함이 남아있었나 봐요.”
“뭐, 그럴 수도 있겠네. 너도 나중에 그거에 대해선 한율에게 사과받아. 그건 한율이 잘못한 거니까.”
“네. 화연님의 말씀대로 할게요.”
다행이 화연님은 아무런 의심 없이 넘어가는 듯했다.
한율 여화와 친구임이 아님을 벌써 들키기엔 아까웠다.
왜냐면 이렇게 한율 여화와 화연님의 화해를 방해해야 하니까.
나는 슬쩍 서두를 띄웠다.
“아, 그럼 천궁에 사탕이나 초콜릿을 받으러 간다는 것도 한율 여화에게 주기 위함인가요?”
“응, 사과할 때 주면 좋을 거 같아서.”
딱 좋네.
화해를 비틀기에 딱 좋아.
나는 짐짓 과하게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이런, 화연님. 모르셨군요. 한율 여화는 이런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거 싫어해요. 화해하자고 그런 걸 주면 질색하는 걸 넘어 화낼 수도 있을 거예요. 괜한 발걸음 하지 않으시는 걸 추천드릴게요.”
“...그래? 그럼 어쩌지.”
“걱정 마세요. 그런 한율 여화가 좋아하는 사탕이 딱 하나 있거든요. 한율과 ‘친구인’ 저만 아는 정보지만 특별히 화연님께도 알려드릴게요. 알고 싶으세요?”
순진한 화연님은 내 말을 굳게 믿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너무 귀여워 나도 모르게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은 채 대충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곤 손에 잡히는 메론 맛 싸구려 사탕.
오늘 아침, 경계를 마치고 번화가에서 어린아이에게 받았던 감사의 사탕이었다.
운 좋게도 한율 여화가 무척 싫어하는 그 사탕.
역시 오늘 하루는 운이 좋았다.
나는 태연하게 메론 맛 사탕을 내밀었다.
“이거예요. 이게 한율이 죽고 못 사는 사탕. 아주아주 비싼 사탕이죠. 어찌나 이 사탕을 좋아하는지, 아무 말 없이 이것만 줘도 바로 화해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이걸 그 정도로 좋아해?”
화연님은 약간 의아해하면서도 의심 없이 내가 건네는 사탕을 받아 소중히 챙겼다.
그게 사랑스러웠지만 한편으론 한율 여화에게 줄 사탕을 소중히 챙긴다는 점에서 묘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이건 조금의 심술.
“아, 그리고 한율 여화. 보기보다 사과나 화해 요청 그런 거 듣는 거 쑥스러워하니깐 그냥 사탕만 조용히 건네주세요. 그게 더 효과적일 거예요”
효과적이긴 무슨, 한율 여화 성격에 말도 없이 저가 제일 싫어하는 사탕을 대뜸 내민다면 친히 시비 걸러 온줄 착각할 거다.
뭐, 불쌍한 한율 여화는 시비 걸려는 거지만 그래도 저를 보러온 거긴 하니까, 라며 기뻐할지도 모르겠네.
나는 한껏 비틀어져 나올 비식거림을 숨기며 화연님의 칭찬을 받아들였다.
“진짜 천사야...?”
“찬사에 감사드립니다.”
“진짜 고마워. 내일 꼭 천궁으로 와. 맛있는 거 들고 나들이 가자.”
“당연하죠. 꼭 갈게요.”
저리 순진한 화연님을 속이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한율 여화따위에게 밀려날 순 없으니까.
화연님이 나를 두고 한율 여화따위를 선택하는 꼴은 못 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