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자체만으로도 미움을 받는다는 그 사실이 나를 깊은 무력감에 빠지게 했다.
광활한 하늘 아래, 심천이라는 곳에 혼자 아득히 남겨진 기분이 이러할까.
“하...”
나도 모르게 한숨 쉬었다.
세상 모든 의욕을 잃은 듯이 엎어지고 싶었지만 천호의 반려는 몸가짐을 바로 해야 하기에 그럴 수도 없는 사실이 나를 옥죄고 있어서.
그것이 답답해 우울하게 있자 내 전담 궁인이 문밖에서 조용히 말했다.
“목욕물을 데워놓겠습니다.”
천호의 반려에게 이성 궁인이 붙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당연하게도 나의 전담 궁인은 남성.
백호 가에서부터 여기까지, 꽤나 오랫동안 나와 함께 해온 궁인, 미르는 월궁으로 들어온 내 상태를 보더니 익숙히 목욕물을 대우로 갔다.
일종의 배려였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니 따스한 물에 잠겨 조금이라도 위로받으라는.
그래, 몸가짐을 바로 하면서도 우울함을 풀건 목욕밖에 없겠지.
예전 백호 가의 여화 때처럼 상처가 생길 것을 감수하며 누군가와 대련하는 등의, 몸을 격하게 움직이는 건 화연의 허락 없이는 상상도 할 수 없으니까.
몸매 관리를 해야 하기에 운동은 꾸준히 한다지만 예전처럼은 못한다는 것.
그게 못내 아쉬웠다.
물론 화연이 나를 바라봐주기만 한다면 이런 것들 따위 견뎌낼 수 있다.
아니, 견딘다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모든 게 즐겁고 행복해지겠지.
그런데 화연의 미움만 받고 있는 지금, 과연 이 행동들에 의미가 있을까.
이럴 때면 때때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졌다.
그냥 화연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백호 가의 여화로서 자유롭게 살던 때로 돌아갈까. 그럴 때 내 마음을 붙잡아주는 건 그 누구도 아닌 오랫동안 함께 해온 전담 궁인, 미르였다.
미르가 따스한 물에 시원한 향이 담긴 푸른 꽃잎 들을 뿌린다.
‘글세, 내 개인적인 취향으론 내 남자한테선 시원한 향이 나는 게 좋더라. 뭐. 잘생기면 뭔들 안 어울리겠어.’
기억이 흐릿해질 정도로 어릴 적, 그때의 화연이 했던 말에 영향받은 향이었다.
곱게, 소리 없이 떨어지는 꽃잎을 보고 있자니 미르가 조용히, 조심스럽게 화두를 띄웠다.
“백호가 보름 님은 여화님이 돌아가고 싶어 하신 다하면 두 손 들며 환영하실 분입니다.”
그러니 화연의 약혼자 자리를 포기하고 단순하고도 자유로웠던 자리, 한율 여화로 돌아가자는 권유였다.
“여화께서 여화로 남고 싶으시다고 말씀하셔도, 여호가 되고 싶다고 말씀하셔도. 지금의 천호 대신 천호 자리에 앉고 싶다고 말씀하셔도. 여화의 아버지, 백호가 보름은 뭐든 여화의 뜻대로 이뤄주실 겁니다.”
나에겐 화연 말고도 다른 선택지가 얼마든지 있으니 굳이 고통스러운 길을 택하지 말라는 권유.
그러나 그런 말들이 오히려 나를 다잡아주었다.
“아니. 그냥 이대로. 화연의 약혼자로 남아있을 것이다.”
저런 말, 화연이 내 곁에 없다는 걸 가정으로 한 저런 말들만 들어도 이리 슬프고 애타는데 어찌 화연의 곁을 떠난단 말인가.
나는 화연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꽃이었다.
*
언제나처럼 가벼운 운동으로 아침을 시작하려 했다.
두고 온 목검이 생각나 다시 월궁으로 돌아가기 전까진, 은가람과 손을 잡고 월궁에 찾아온 화연의 뒷모습을 보기 전까진.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화연이 그 누구도 아닌 은가람과?
차라리 모르는 남자 궁인과 함께,라는 쪽이 더 현실에 가까웠다.
그러나 눈을 비비고 봐도 화연 옆에 있는 자는 은가람이었다.
한율은 저절로 화연과 은가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넌 내가 아는 천호가 아니야.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뭐...? 너, 너 감히 천호인 나에게 그딴 말을...!”
모욕감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씩씩거리는 화연에 은가람은 피식, 고아하게 비웃음을 입에 걸치며 말했다.
“하면 뭐. 껍데기뿐인 천호인 네가 현무가 보름의 자식인 나에게 뭘 할 수 있길래 그딴 식으로 말하지?”
“너, 너...! 이익!”
모욕감에, 분에 못이긴 화연이 살기를 담아 룬 자체를 움직여 은가람을 공격하려 했다.
다만, 하찮고 더러운 것 보듯 인상을 찌푸린 은가람이 더 빨랐을 뿐.
은가람에 손짓에 따라 움직인 둔탁한 얼음덩어리들이 화연에게 날아간다.
“아악!”
꼴에 하늘의 피를 이었다고 수많은 얼음덩어리들 중 단 하나의 얼음덩어리에 맞은 화연은 그마저도 아파죽겠는지 단말마를 내지르며 맞은 곳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화연의 손 틈새로 피가 찔끔 새어 나와도 은가람은 아무런 동요 없이 경고할 뿐이었다.
“너, 앞으로 내 눈에 띄지 마. 죽기 싫으면.”
“화연!”
기분 좋게 화연에게 줄 꽃을 따오던 한율이 그 모습에 경악하며 뛰어와도 은가람의 싸늘한 태도는 똑같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은가람 여화.”
화륵, 한율의 분노에 따라 그의 주위에 불꽃이 올랐다 사라졌다.
그에 은가람은 한심하단 표정으로 한율의 위아래를 훑으며 말했다.
“너도 참 멍청하다. 너도 알잖아. 네가 아는 그 천호가 아니란 거.”
“...”]
회상을 끝낸 한율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 뒤론 분명 화연은 은가람을 경멸했을 터, 천호에 대한 존중을 배우지 못한 더러운 것으로 취급했을 터.
저도 그런 화연에게 맞춰 은가람을 멀리했었다.
어차피 은가람 또한 저를 한심하게 여겼고.
그런데 저 둘이 왜...?
이해 안 됐지만 그저 은가람의 손을, 화연에게 닿은 은가람의 손을 치워야한다는 생각에 움직였다.
“화연, 더러운 것이 화연의 손을 잡고 있었다면 내치셨어야죠.”
“하,”
“지금 뭐 하는 짓이야.”
화난 화연의 음성에 생각이 멈추고 또다시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왜? 왜지...?
나는 단지 화연을 위해서-,
억울한 심정은 차갑게 식어있는 화연의 두 눈과 마주치자 사라졌다.
“...”
화내지 마세요 화연. 나를 그리 차가운 시선으로 보지 말아 주세요.
불안해하며, 애원을 담아 화연을 쳐다봤음에도 화연은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탓했다.
"그깟 손 한번 잡았다고 누가 이딴 식으로 굴어? 내 앞에서, 내 사람을, 죽일 듯이 룬으로 위협해놓고 그딴 표정이라니. 또 나만 나쁜 사람 만들려고?“
내 사람이라니. 언제부터 은가람과, 라는 충격도 잠시, 그깟 손이라니.
서운함과 화남이 울컥 치밀어 올라 오래된 상처를 아프게 건드렸다.
"그깟, 그깟 손 한 번이라 하셨습니까"
그깟 손 저는 단 한 번도 잡아주신 적 없는 분이-
“그래, 그깟 손. 바론이랑도 실컷 잡은 그깟 손.”
아,
순간 주위 소음이 사라지고 온몸에 힘이 빠져 눈앞이 까맣게 점칠 되었다.
휘청이지 않은 게 용할 정도의 충격.
화연 또한 지금 말이 무척 심했단 걸 아셨는지 말씀하시다 멈추셨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들었으니까.
"..."
아팠다.
내 경쟁자로 지체 높은 여호 집안의 자제를 선택한 것도 아닌, 천하디천한, 바론이란 자식을 선택하셨을 때도.
보란 듯이 내 앞에서 다른 이에게 애정을 표하며 나를 비웃고 가실 때도.
뒤에서 못된 말로 나를 욕보이는 이들을 발견했음에도 관심 없다는 태도로 못 본 척 가만히 지나가실 때도.
곪다 못해 썩어 들어간 상처들이라 더 이상 안 아플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깟 손.
한번더 후벼파진 상처는 언제나처럼, 아니. 더욱 아팠다.
그 고통에 세어나온, 티끌같은 자존감이 담긴 애원.
"저는, 화연의, 약혼자입니다. 제 명예에 흠을 내는 것도 정도껏 하십시오. 화연."
그러나 화연은 내 애원 따위 가볍게 조롱했다.
“좋아서 약혼한 게 아니라 이용하려고 약혼한 사이인데 명예에 흠내는 정도가 대순가?”
너도 알고 있잖아?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읊었을 뿐이라는 듯한 고조 없는 표정이 마치 그렇게 되묻는 것 같았다.
“응? 한율 여화.”
동의를 구하는 척 비아냥거리는 화연은 언제나처럼 잔인했다.
울지 않으려 힘쓰던 것이 부질없게도 눈 한번 깜빡이자 눈물이 구멍 뚫린 듯 쏟아졌다.
그럼에도 네가 왜 우냐는 듯 황당해하는 화연의 표정.
그에 상처받아 예가 아님에도 휙, 돌아 화연에게서 벗어났다.
*
밤이 지나 아침이 되었다.
이틀이 지나고 삼일이 지났다.
화연은 당연히도 날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 당연하겠지.
어딜 감히 물러나란 말도 안 했는데 뛰처나갔냐고 나를 책망하러 찾아오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바스러진 지 오래였다.
이젠 차라리 그런 이유 때문이라도 나를 보러오시지, 싶었다. 화연이 나를 아예 찾지 않는 건...
내겐 너무 가혹한 일이니까.
그 때문일까,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숨이 잘 쉬어지지 않고 속이 울렁거렸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눈물은 나올 것 같은데 나오지 않으니 이 심정은 뭐라 표현해야 좋을까.
이대로 월궁에 있으면 너무도 답답하고 미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짙은 무력감에 월궁에 처박혀 있다 정오인 지금 이 시각, 드디어 밖으로 나가자 마음먹고 궁인을 불러 산책할 채비를 마쳤다.
막연히, 아무런 목적 없이 걸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대로 속에 쌓아두고만 있으면 내가 망가질 것 같아서 월궁과 가까운 화원에 가려 하는 것이었다.
그곳에 가서 조금만, 조금만 울다 오자.
속에 담긴 감정을 조금만 토해내고 오자.
원래는 천호의 반려들 중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반려 한 명만이, 월궁에서 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단 한 명의 반려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화원.
생각하는 대로, 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화원의 풍경과 느낌, 구성요소들이 달라지는, 그런 특별함.
지금 내가 가려 하는 곳은 그런 곳이었다.
사랑은커녕, 미움만 받고 있으면서도 이 화원은 내게 소중했다.
내가 이 화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아직 화연에게 나보다 소중한 이가 없다는 뜻이니까.
안다, 사실은 내 아버지 덕분에 내가 이 화원을 아직도 가질 수 있다는 거. 그
래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니, 믿고 있었다.
천호인 화연은 당연히 이 화원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니 화연을 위해 잔뜩 심은 동백꽃들과 매화, 모란 등의 형형색색 꽃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이 광경을 함께 볼 일은 없었다.
화연...
싱그럽게 웃어주던 어릴 적 화연을 떠올리며 동백꽃의 꽃잎을 어루만졌다.
행여 짓물릴까 스치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이리 고운데..."
부드러운 꽃잎에 눈물 한 방울이 툭, 자국을 남기곤 굴곡을 따라 미끄러졌다.
눈물 한 방울을 끝으로 눈물샘이 메말랐는지 더 이상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상했다.
펑펑 울 작정으로 온 건데 막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하긴, 이런 적이 한두 번이어야지.
자조적으로 웃으며 우는 것을 포기하고 정자로 가 앉았다.
그리곤 떨어지지 말라고 설치해놓은 턱을 팔에 괴어 엎드리곤 고개만 들어 정원의 풍경을 구경했다.
높고 푸른 하늘, 유유자적 흐르는 그림 같은 구름, 선선하게 살랑 불어오는 바람과 바람 따라 흔들리는 꽃잎들.
"평화롭네..."
여기에 화연만 있어 준다면... 너무 많은 바람인가.
뭘 생각해도 결국 화연으로 이어지는 생각에 시선은 정원 입구로 향했다.
계곡이 흐르는 곳엔 연꽃이 피어있고 계곡의 가운데엔 나무다리가 위치해있다.
안쪽으로 들어오려면 저 나무다리를 건너와야 했다.
와주세요, 화연.
오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바라보며 하염없이 나무다리만 쳐다봤다.
방금도 상처받았으면서 아직도 화연을 원하는 스스로가 어리석다 여기면서도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