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 깔끔한 타격음과 함께 고통이 찾아왔다.

　평소라면 천애 고아인 가람휘 따위가 가군 여호의 자식인 저를 때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네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천호님을 압박하는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꼴에 화났다고 목소리를 내리까는 미천한 자식의 모양새나 말보다 벽기둥 사이로 보이는 화연의 옷자락이 더 중요했다.

　"내가 천호님을 이용하면 뭐 어-"

　"바론"

　"?!"

　화연의 부름에 놀란 미천한 자식이 당황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급히 뒤돌았다.

　화연이 미천한 자식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내 기억 속의 화연은 자신을 이용한다는 것에 치를 떠는 분이기에 표정 정도야 쉽게 예상 가능했다.

　앞으로 저 미천한 자식을 다정히 대해주는 화연은 볼 수 없겠지.

　그 사실에 화연과 관련된 일임에도 오랜만에 진실된 웃음이 지어졌다.

　["너 또한 나를 이용하고자 하는 것뿐이지 않나?"

　"그때 그건 그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에 화연은 싸늘히 굳은 표정만큼이나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네가 아니라면 아니겠지. 아니어야지. 안 그래? 대단하신 가군 여화의 장손 한율?"]

　그것도 잠시, 떠오르는 추억에 쓰라린 웃음으로 변했지만 말이다.

　추억에 잠시 젖어있을 때 당황을 감추지 못한 천한 자식의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호 폐하..."

　바론은 화연에게 본명을 허락받진 못한 관계.

　호칭에선 자신이 저 천한 자식보다 앞선다는 것.

　그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던 것도 이젠 끝이다.

　천한 자식은 화연을 불러놓고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저 주먹만 꽉 쥐었다.

　화연의 그 차가운 시선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고 납득 가능함과 동시에 차갑더라도 화연의 시선인데 저 천한 자식이 감히 독점하고 있다는 게 짜증 났다.

　애초에 저 자식은 존재 자체부터 짜증 났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지도 모를 놈이 그저 룬과 창 고작 잘 다룬다고 천호 궁에 들어온 것부터 결국엔 화연의 옆자리를 꿰차낸 것까지.

　지금이라도 화연 곁에서 떨어진다면 해를 가하진 않겠다는 자비로운 처사에도 코웃음 치며 거절한 전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감정은 곧 승리감으로 바뀌었다.

　이제 저 자식을 감싸주는 화연은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이때까지 꾹, 눌러 참고 있던 감정이 일렁여 결국엔 이죽거렸다.

　"히, 들었습니까 화연. 이 미천한 자가 감히 화연을 이용한답니다. 그것도 모자라 저까지 같은 취급을 하려 하네요. 제가 이 치와 어울리지 말란 이유를 알겠습니까?"

　그러나 화연은 으레 그렇듯 내 예상을 벗어나 행동했다. 좋지 않은 방향으로.

　"바론"

　"!"

　화연의 다정한 목소리에 천한 자식은 그저 놀랬을 뿐이겠지만 나는 심장이 욱신거렸다.

　이런 내 심정도 모르고...

　아니, 알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화연은 여전히 다정한 태도로 천한 자식에게 말했다.

　"괜찮으니 손 풀어"

　"...예, 천호페하."

　어떻게, 어떻게 약혼자인 내 앞에서...!

　천한 자식의 손을 스스럼없이 다정하게 감싸는 화연의 손을 보는 순간, 약혼자인 내 앞에서 자연스럽게 손을 잡는 순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소리쳤다.

　"화연! 방금 이 치가 한 말을 못 들었습니까?! 하, 이런 상황에서까지-!"

　"한율."

　싸늘한 어조, 싸늘한 시선, 싸늘한 표정.

　단지 내 이름 두 글자를 부를 뿐임에도, 언제나처럼 부르는 것뿐임에도 이 싸늘함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여느 때처럼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어째서, 왜... 예전과 똑같은 상황이었는데, 다른 거라곤 말을 내뱉은 인물이 뿐인데.

　...오해를 뒤집어써도, 나쁜 말을 한 건 상대방임에도 잘못한 사람은 언제나 저인 건가요, 화연.

　화연이 어떤 대답을 할지 알고 있기에 영원히 물어보지 못할 물음이 입안에서 맴돌고 억울함이 가슴께에서 울렁였다.

　허나 티 낼 수는 없기에 그저 얌전히 대답했다.

　"네, 화연"

　이건 체념이었다.

　""...""

　대답을 했음에도 침묵만이 돌아온 이 상황이 그저 한없이 깊은 불안만 만들어냈고 그 탓에 내 심장은 토할 듯이 쿵쾅거렸다.

　"똑똑해, 내가 이 시간쯤 여기 온단 걸 기억해서 일부러 바론을 도발하고 맞아주기까지 하고. 그래놓고 내가 오니 타이밍 좋게 피해자인 척."

　위에서 모든 걸 내려다보며 가소롭다는 듯 말하는 화연의 말이 오늘따라 유난히 부정적인 감정을 부추겼다.

　미움, 억울함, 왠지 모를 배신감, 집착, 서러움.

　"계속 그렇게 해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예, 화연! 원하시는 대로 어디 한번 계속 이렇게 해보겠습니다!"

　치기 어린 반항이 담긴 말을 내뱉으며 뛰쳐나갔지만 역시나 화연은 나를 잡지 않았다.

　그게 너무 밉고도 서러워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입술 짓이 끼는 거로 참았다.

　인적이 드문 곳에 한참을 서서 숨을 골랐다.

　자꾸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은 둘째 치더라도 이럴 때만 되면 떠오르는 어린 시절 추억들이 더 가슴 아프게 만들었다.

　갑자기 돌변하신 후로 틱틱 거리셨어도 나를 챙겨주었고 이리 잔인하게 내치진 않으셨다.

　가끔은 웃기도 하셨고 먼저 손 내밀기도 하셨는데. 왜, 왜 나는...

　나는 아직도 화연이 나만 바라보지 않는다고 하여 아버지께 일러바친 어렸을 때의 나를 저주하고 있다.

　스스로, 그래. 스스로가 내친 따스함이다.

　나의 치기 어린 생떼가 화연을 그리 괴롭게 했을 줄이야...

　결국 자책으로 이어지며 감정이 무뎌졌다.

　너덜너덜해져 이젠 아픔이 느껴지지도 않는, 그런 무딤.

　“하,”

　그래, 다 내 책임이다.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 나는 다른 궁인들에게 붉어진 눈가를 들키지 않게 얼굴을 가리며 빠르게 월궁으로 갔다.

　가서 가만히, 슬픔에 잠긴 채 미동도 없이, 멍하니 앉아있을 뿐.

　그러다 이내 정신 차렸다.

　평소와 다름없을 뿐이었다.

　그래. 나로 인해 내 아버지가 화연에게 정신적 학대를 가했다는 걸 안 그 순간부터 이 정도는 예상했잖아.

　견딜 수 있다.

　화연에게 고통을 줬으면서 염치없이 화연을 사랑하고 있는 죄.

　그에 합당한 벌일 뿐이다.

　이 또한 인내하리라.

　그제야 멀쩡히 돌아온 정신 덕에 아까 화연에게 저지른 제 무례를 인지할수있었다.

　‘예, 화연! 원하시는 대로 어디 한번 계속 이렇게 해보겠습니다!’

　감히 화연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고 오다니. 사죄하러 가야 했다.

　사죄한다 해도 화연에게 범한 무례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 얼마나 버릇없다 생각하셨을까.

　이런 나이니 화연에게 미움받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걸지도 몰랐다.

　나는 화연에게 욕먹을 각오를 하면서 화연을 찾았다.

　“화연이 어디 계시는지 아느냐.”

　“그, 그것이...”

　궁인의 시선이 불안하게 호지 궁을 향했다.

　순간, 섬칫 올라오는 불안감에 궁인의 답변을 채 듣지도 않고 호지 궁으로 뛰어갔다.

　설마, 또 아버지가...!　

　부러 인기척이 드문 곳에서 숨을 고르고 얼굴을 가리며 월궁으로 뛰어 들어가는 수고를 들여 아버지 귀에 들어가지 않게 했는데...!

　불안함 예감은 왜 틀리지 않는지.

　열리는 문들 사이로 화연을 협박하고 있는 듯한 모양의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

　기겁하는 내 부름에 나를 돌아보는 아버지와... 화연.

　안돼, 또 미움받을 거야.

　다급해진 나는 무작정 아버지를 내보냈다.

　“아버지! 제가 이러지 마시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 어서 나가시지요!”

　“한율아, 나는 그런 게 아니라.”

　“어서요!”

　그리고 아버지가 화연에게 붙인 감시자, 호위무사도.

　“너도 나가거라!”

　탁, 문이 닫히고 집무실엔 화연과 저 둘만이 남았다.

　또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미움받고 싶지않 다.

　그 생각 하나로 화연에게 진실을 고했다.

　“화연, 화연.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아버지에게 이른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 길로 곧장 월궁에 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틀어박혀 있었어요.”

　“하, 응당 그러시겠죠. 한율 여화. 직접 백호가 보름에게 일러바치는 대신 울 듯한 얼굴로 다들 날 보시오! 보고 제 아버지에게 천호가 날 울렸다고 일러주시오! 하며 사방팔방 나 때문에 상처 입은 가녀린 짐승을 연기하며 월 궁에 갔겠지!　그 역겨운 머리로 그런 역겨운 생각한 걸 내가 모를 줄 아나!”

　“아니에요!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화연이 더 나를 싫어할 게 뻔한데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저는 혹여나 아버지 귀에 들어갈까,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까 궁인이나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들어갔어요!”

　“변명, 변명, 변명!　언제까지 착한 척 연기하며 가증스런 속내를 감추고 있을 셈이지?!　차라리 네 아버지처럼 대놓고 말해!　도대체 네 진심은 뭐야!　네 아버지처럼 날 꼭두각시로 만들고 싶어?! 그것도 아니면!　그저 날 놀리고 싶은 건가?! 그것도 아니면　네 행동 하나 하나에! 네 말, 시선! 네 존재 그 자체에 고통받는 날 보며　즐기고 싶은 거냐고!”

　아,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네 존재 그 자체에 고통받는 날 보며’

　‘네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천호님을 압박하는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생각하나 봅니다.’

　방금 화연의 말과 몇 시간 전 천한 것이 분수도 모르고 내뱉었던 말이 머릿속에서 겹쳐 울렸다.

　나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화연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인가?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걸 당사자에게 직접 듣는 것은 다르다.

　커다란 충격에 휩싸여 정신을 놓고 있자니 화연이 나에게 호통치며 나를 잡아끌었다.

　“나가! 여기 이곳에서! 천호의 허락 없이 들어오면 안 되는 이곳에서 나가!”

　반항할 생각도, 반항할 힘도 없었다. 어느새 문과 문 사이, 작다면 작은 공간에 내팽개쳐졌다.

　화연이 나를.

　나는 내팽개쳐진 그대로 화연을 올려다보았다.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화연. 말하려고 하는 순간 화연이 등을 돌렸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

　그게 마치 화연과 나 사이의 단절을 고하는 거 같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왜, 왜... 이번엔 정말 제가 이른 것이 아닌데.

　어째서 제 말은 한 번도 들어주지 않으시고.

　아, 아니야. 아니다. 나는 전적이 있으니 화연의 저런 반응은 마땅해.

　그래, 내가 좀 더 노력하자. 사과드리자.

　비틀거리며 일어난 나는 문을 열려고 했다.

　“으아아아!”

　분노에 가득 찬 화연의 고함만 아니었다면.

　‘네 존재 그 자체에 고통받는 날 보며　즐기고 싶은 거냐고!’

　‘네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폐하를 압박하는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생각하나 봅니다.’

　아,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내려와 턱 끝에 맺혔다.

　나는 문을 열려고 뻗은 손을 거두었다.

　나는 정말로 화연에게. 존재 자체만으로도 고통을 주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