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어의 감정(진지함)과 심각성 인지 능력 저하를 해제합니다.}
띠링, 하고 감정과 인지 능력 저하가 해제됐다.
그 탓에 뭔가 확, 하고 현실감이 와닿을 줄 알았건만 그런 것도 아니였다.
약간의 어벙벙함과 미치도록 생생한...
그래, 한 백 년 정도 더 발전한 vr 게임을 체험한 기분만 있었다.
하긴, 갑자기 이상한 장소로 와서 천호라는 타인이 되었는데 실감 나면 그게 더 이상하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 나는 앉을 곳도 찾을 겸, 정원도 구경할 겸 천천히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었다.
하인? 하녀? 시종? 뭐라 불러야 할까 궁인? 아, 궁인. 궁인 한 명 보이지 않는 정원은 아까의 소란과 달리 조용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아, 편안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스템은 배려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들어오자마자 나를 두고 치정 싸움이라니.
그리고 세계관에 대한 정보만 주면 뭐 하나, 내 현 상황에 대한 정보가 없는데.
“아,”
순간 튜토리얼이 생각나며 정원에서 한가히 있을 때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아까처럼 의도치 않게 상처 주는 걸 막기 위해 자동 행동, 대화 기능을 꺼야 한다.
그러려면 튜토리얼의 정답을 맞춰야겠지.
내가 처한 현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말이라. 새 됐다?
{오답입니다.}
그럼... 부와 권력, 미인. 삼박자를 고루 갖춘 천호가 되었으니 개이득이다?
{오답입니다.
팁 : 중요 포인트를 입력하여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토대로 현 상황에 대해 파악한 뒤 ‘생각’하고 입력해보자.}
참을성 없는 시스템이네.
두 번 틀렸다고 바로 팁 주는 거 봐.
거기다 생각이란 단어를 강조하면서 생각 없이 내뱉지 말라고 눈치까지 주는 센스까지.
대애단하시다.
뜬금없이 치정 싸움 부분부터 시작할 때와 자동 대화, 행동 기능으로 바론과 한율을 떠나보낸 시스템에게 짜증이나 약간, 정말 약간 비아냥거렸더니 바로 보복이 날라왔다.
띠링-.
{ [시스템은 죄가 없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시스템을 욕하다니 플레이어의 인성이 의심됩니다.
그러므로 패널티가 주어집니다. + 1
중요한 순간 패널티가 적용되며 그에 대한 감당은 오로지 플레이어의 몫.}
“하,”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그뿐이랴? 욕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닌데 순간 욕 나올뻔했다.
솔직히 이 정도 불만은 표해도 되지 않나?
속 좁기는.
띠링-.
{ [시스템은 죄가 없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시스템을 욕하다니 플레이어의 인성이 의심됩니다.
그러므로 패널티가 주어집니다. + 2
중요한 순간 패널티가 적용되며 그에 대한 감당은 오로지 플레이어의 몫.}
“이런 씨,”
띠링-.
{ [시스템은 죄가 없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시스템을 욕하다니 플레이어의 인성이 의심됩니다.
그러므로 패널티가 주어집니다. + 3
중요한 순간 패널티가 적용되며 그에 대한 감당은 오로지 플레이어의 몫.}
“...”
좋아, 그냥 조용히 중요 포인트 찾자.
좋은 생각이라는 듯 시스템 창이 조용해졌다.
그에 약간의 화를 억누른 나는 부러 중요 포인트 찾기에 집중했다.
혹시라도 시스템을 욕하려다 패널티를 먹으면 안 되니까.
패널티가 딱 뭐다, 뭐다 이렇게 안 정해져 있고 저런 식의 예고로 나오니깐 의외로 더 신경 쓰여 막 행동하기가 그랬다.
그리고 시스템은 기계 일 텐데 기계랑 싸워서 뭐 해. 중요 포인트가 뭔지나 고민해야지.
포인트를 입력하면 정보 얻기가 쉽다고 했으니 뭐 이런 건가? 이 궁의 지도?
띠링,
맞다는 듯 시스템 음이 울리고 반투명의 천호 궁 전체 지도가 나타났다.
거기다 세모 모양의 빨간 불로 내 위치 표시까지.
앞뒤로 약간 뛰듯이 움직여 보니 빨간 불도 앞뒤로 아주 미세하게 왔다갔다 했다.
방향 표시까지 해주니 길 잃을 걱정은 없겠네.
거기다 건물들의 이름과 그 건물이 뭐 하는 곳인지 짧게 주석이 달려있었고 지도 확대도 축소도, 이름을 띄웠다가 없앴다 하는 것도 전부 생각만 하면 자동으로 이뤄졌다.
햐, 편하네.
어쨋든 정보는 이런 식으로 포인트만 생각하면 떠오른다 이거지?
이 뒤로 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화폐, 돈, 음식, 계급, 진급, 직책, 부서 등등의 포인트를 입력했고 그 정보를 받아들이기 바빴다.
여호의 계급은... 아, 이거 달 이름에서 따왔네.
보름, 하현, 상현, 그믐, 초승 순으로 낮은 계급이라니.
직급은 오, 이런 식으로 좀 간단한 것도 있고 복잡한 것도 있네.
직책은... 역시 뭐가 많고. 부서도 많네?
이런 식으로 몇 시간 동안 정보를 얻은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천호 호위 담당 부서도 있고 전용 궁인도 있는데 왜 지금 내 주위엔 아무도 없지?
스토리 진행 때문에 시스템이 잠깐 없애버린 건가?
그렇다는 듯 저 멀리서 한 사람이 누가 봐도 호위무사요, 하는 복장으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폐하! 혼자 어딜 가신 건가 하여 몇 시간 동안 찾아 헤맸더니 고작 여기 계신 겁니까!”
앗, 죄송.
내가 하려던 말과 달리 내뱉어진 건 잔뜩 신경질 담긴 반항이었다.
“하, 천호인 내가 일일이 너에게 보고를 하고 다녀야 하나?”
마치 적을 대하는 듯한 그런 말투에 뭐지? 라며 의아해할 때 호위기사가 다급히 강요했다.
“백호가 보름이 찾으십니다! 어서 가시지요!”
보름이면... 여호 중 제일 높은 직급이었고 백호가, 란건 가문인가?
그런 거겠지?
여기선 가문이 성 대신 쓰이는 건가?
얻은 정보와 대충 짐작해보고 있자니 내 다리는 자동 행동 기능에 맞게 호위무사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아니, 근데 나 천호잖아?
보통 더 높은 직책이 늦는 건 상관없는 게 계급사회 아닌가?
약간 의문이 들었지만 몸은 충실히, 호지 궁이라고 천호가 직무를 보는 궁에 숨이 벅차도록 뛰어 도착한 지 오래였다.
미닫이문에서 멈춰선 호위 무사가 어딘가에 자신의 기운을 넣으니, 잠깐 기운?
이것도 중요 포인트였는지 띠링, 하는 음이 울리며 시스템 창이 올라왔다.
{천의 나라 사람이라면 모두 한 종류씩 가지고 있다는 룬.
그것은 환각을 보게 할 수도 물을 움직일 수도 불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또한 같은 룬을 가졌다고 하여도 누구는 집채만 한 불을 만들어 낼 정도의 강한 룬을, 누구는 책 하나의 크기만큼의 불도 만들어내지 못할 만큼 약한 룬을 가진다.
이처럼 각자가 갖는 종류도 힘의 크기도 각양각색이지만 한 개 이상의 룬을 소유할 수 없다는 건 동일.
다만 천호는 제외이다.
천호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룬을 다룰 수 있다.}
초능력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네.
정보를 정리하고 있자 미닫이문이 착,소리를 내며 양쪽으로 갈라지 듯 열렸다.
그런 뒤 또 나타난 미닫이문이 착, 또 나타난 미닫이문이 착.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미닫이 문들이 차례차례 갈라지며 열리고 천호가 직무 보는 곳일 게 뻔한 고급스러운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초조히 기다리던 호위무사는 다급히 뛰어 들어갔고 나 또한 다급히 뛰어 들어갔다.
고급스러운 방, 즉, 천호의 집무실. 그곳에 나까지 발을 들이자마자 뒤에서 미닫이문이 착,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에 점점 멀어지는 착, 착 문 닫히는 소리.
그것이 마치 감옥에서 죄수를 수감하고 탈출 못 하게 문 여러 개 닫는 것처럼 느껴져서 약간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자동 행동 기능으로 높은 사람 뵙듯 공손한 자세로 땅바닥만 쳐다보던 내 몸이 한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응? 왜지? 라는 의문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백호가 보름이라는 사람이 내 앞에 온 듯 내 시야에 동양풍의 고급스러운 신발이 들어왔다.
“뭐하십니까, 폐하. 당당히. 천호처럼 고개 드시지요.”
강압적이면서도 비꼬는 의도가 가득한 음성.
그에 고개를 들자 보이는 건 누가 봐도 한율과 혈연관계인 중년의 남성이었다.
오, 중년치고 잘생겼는데.
유전자 어디 안 가나 봐.
그래도 나이 많다는 점에서 한율처럼의 감격은 안 나오지만.
이번엔 심각함 인지 능력이 저하 된 것도 아닌데 심각함 없이 속으로 헛짓거리했다.
아, 이게 진짜로 내가 행동하는 게 아니라서 그런 거 분명했다.
어쩌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퀄리티 미친 vr게임 하는 기분이다.
이번에도 가벼운 속마음과는 달리, 덜덜 떨며 고개는 들었으나 백호가 보름의 시선을 빗겨내는 내가 있었다.
“제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는지, 천호 폐하를 불러냈는지 잘 아실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 때문인데?
난 모르는데.
“예...”
아니네, 알고 있네.
어차피 진짜로 내가 행동하고 움직이는 것도 아니니 정신 놓고 있자 분노가 압축된 듯한 경고가 내 귀에 박혔다.
“또다시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죽은 듯 살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면 천호가 되었다고 제 말을, 제가 했던 경고들을 가볍게 넘기신 건지요. 아들의 간절한 부탁으로 그 천한 무사와 놀아나는 걸 눈감아주었더니 오늘 드디어 선을 넘으셨더군요, 폐하.”
나는 그 어떠한 대답도 못 하고 공손히 모은 두 손을 하얗게 질리도록 꽉 쥘 뿐이었다.
물론 속으론 와,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되지 않는걸. 대충 아들이 한율이고 천한 무사는... 음, 바론 인가? 하는 추측과 또 다시라니, 예전에 죽은 사람처럼 살았나? 무슨 뜻이지? 유일한 천호인데? 등의 의문을 생성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너.”
갑자기 불똥이 호위무사에게로 튀었다.
“네!”
나한테는 다그치기까지 했으면서 갑자기 군기가 빡 들어 대답하는 호위무사에게 배신감 느끼는 것도 잠시, 백호가 보름이 호위무사에게 경고했다.
“천호를 감시하라고 아무런 연고 없는 너를 호위무사 자리에 넣어줬더니 별 쓸모가 없는 듯하구나. 은혜도 모르는 널, 내 어찌해야 할까.”
오, 호위무사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래, 나와 같은 약자였구나. 묘하게 기쁜 동질감에 친근하게 느껴지려고 했건만 호위무사는 곧바로 저 살려고 나를 팔아버렸다.
“아닙니다! 천, 천호 폐하가 한율을 만나러 갈 터이니 따라오지 말라고... 물론 천호 폐하의 의사는 제가 고려할 사안이 아니 오나 한율 여화께서 싫어할 거라 하시기에 한율 여화의 의견을 존중해 따라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에 백호가 보름이 납득한다는 듯, 무슨 상황이었는지 다 파악됐다는 듯 말했다.
“그래, 내 우리 한율과 천호. 둘이 있을땐 한율의 의견을 존중하라 명하긴 하였지.”
그러면서 날 보는 게 마치 ‘한율 핑계로 호위무사를 떼어놓고 바론 이란 천한 무사를 만나려 했던 죄가 추가됐는데, 요걸 어떻게 작살낼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에 내 의사완 상관없이 심장이 쿵, 멈추며 피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내 얼굴은 하얗게 질렸겠구나
이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백호가 보름의 입이 다시 한번 움직이려 할 때, 착. 착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오나? 그 생각으로 열리고 있는 문을 쳐다봤다는데 놀랍게도 한율있었다.
“아버지!”
자동 행동 기능이 장착된 나만큼이나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백호가 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한율.
그에 백호가 보름은 혀를 쯧, 찼다.
“아버지! 제가 이러지 마시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 어서 나가시지요!”
“한율아, 나는 그런 게 아니라.”
“어서요!”
점잖게 저를 진정시키려는 백호가 보름의 말을 단칼에 자른 한율.
그에 다시 한번 혀를 쯧, 찬 백호가 보름은 못이기는 척 퇴장했다.
물론 퇴장하기 직전 나에게 눈빛으로 경고했다.
‘지금은 우리 한율을 봐서 넘어가지만 한 번 더 이런 일이 있을 시 이처럼 가볍게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역시나 나 몸은 이런 일이 뭔데. 아니, 그것보다 이게 다 무슨 상황이야? 라며 머리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내 속과 달리 흠칫, 제대로 경고를 알아먹은 양 굴었다.
“너도 나가거라!”
한율의 호통에 호위무사도 얌전히 퇴장했다.
아, 잠깐만. 이거 뭔가 한율이, 백호가 보름이 나보다 위인 것처럼 구는데?
이건 마치 권력과 부 가득한 천호가 아니라 허수아비 천호...?
슬금슬금 불길한 기운이 올라올 때 한율이 두려움과 불안함 가득한, 죄지어 낑낑거리는 강아지 같은 얼굴로 나에게 다급히 변명하듯 말했다.
“화연, 화연.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아버지께 이른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 길로 곧장 월궁에 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틀어박혀 있었어요.”
제발 제 말을 믿어달라는 듯 애절한 한율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 당연히 믿지. 내가 너 아니면 누구 말을 믿어.라며 달래고 싶었지만 혹시나 역시나. 내 몸이, 내 입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하, 응당 그러시겠죠. 한율 여화. 직접 백호가 보름에게 일러바치는 대신 울 듯한 얼굴로 다들 날 보시오! 보고 제 아버지께 천호가 날 울렸다고 일러주시오! 하며 사방팔방 나 때문에 상처 입은 가녀린 짐승을 연기하며 월 궁에 갔겠지! 그 역겨운 머리로 그런 역겨운 생각한 걸 내가 모를 줄 아나!”
오, 아까 백호가 보름에게 벌벌 떨던 태도는 어디 가고 이 정도 분노 표출이라니.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이 천호는 강약약강의 표본을 보여주고 있었다.
쓰레기 같은데?
근데 그게 납니다.
하하. 나는 아니지만 납니다.
남들 눈엔 저런 행동 전부 제가 한 것처럼 보이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