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보니 시침은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잠에서 막 깬 지금이 저녁 9시일 리는 없을 텐데, 그렇다고 아침 9시라고 하기엔 방 안이 너무 어둑했다. 불을 켜 놓지 않았으니 당연할 법도 하지만, 커튼으로 가려놓은 창가를 바라보니 햇살 하나 비쳐들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스산한 기운이 전해져 온다.
나는 일어나 커튼을 걷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앞에는, 온통 붉게 물든 세상이 있었다.
하지만 불에 탔다거나 전쟁이 났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공기가 새빨갛게 변해버린 것이다. 사방이 온통 유리로 된 원형 거실로 나가보니, 원래의 색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조차 없는 것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숯처럼 까맣게 탄 빌딩들이 내려다보이고
자동차며, 사람들, 휘날리는 나뭇잎들마저 전부 새까맸다.
불덩이 같은 공기에 몽땅 다 타버린 걸까. 빨갛기만 빨갛고 열기는 없지만 말이다.
유난히 가라앉은 자동차의 경적 소리조차 소각된 잔재가 되어 껄끄럽게 허공에 부유하는 듯했다.
“음....”
나는 커피 한 잔을 타 마시며 한동안 그 전경을 바라보다가
붉은 빛에 둘러싸인 거실 한복판의 소파를 향해 차분한 걸음을 쓸었다. 그곳에 늘어져 앉아 뉴스를 틀어보았다.
『빛이 산란되어 나타나는 현상으로, 여러분은 크게 당황하지 않으셔도....』
그런 여러 설명을 덧붙여가며 화면 너머의 이들을 진정시키려 아나운서는 고군분투했지만, 세상은 조금도 진정치 않고 빵빵대고 있었다. 이 높은 곳까지 짜증 섞인 소리들이 피어오르는 시점에서 이미 진정이란 글러먹은 것이 아닐까.
그래도 나는 이 소동이 싫지 않다.
정체모를 안락감이 든다는 점에서 장대비가 내리는 날과 닮아 있으면서도, 실상은 그와 정반대라는 느낌이다. 예컨데 비는 백색 줄기와 소음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감춰버리지만, 이 붉은 세상은 밑바닥에 가라앉아 흐르던 모든 껄끄러운 것들을 끄집어내어 다시 도시 속으로 부유시켜놓는다. 잿더미처럼, 부슬부슬.
적색 고양감에 듬뿍 빠져 두 눈이 충혈 되어 오른 이들은 깊은 파장을 내뿜는다. 그것이 좋다. 진득하면서도, 안락하다. 무언가가 있을 자리에 있는 느낌. 아무것도 엇나가지 않고 꼼꼼히 뭉쳐들어 완전한 구형이 된 느낌이다.
텔레비전에서 아나운서의 당황한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오는 가운데, 나는 모닝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세상은 계속해서 열기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유리창을 흔들며 바람도 제법 부는 것이, 성경에서 보았던 불길한 풍경과 굉장히 닮아 있다. 그 때는 재앙이 들이닥쳤지만, 지금은 별 다른 일 없이 공기만 새빨갈 뿐이었다.
“......흠.”
개인적으로는 한번 혼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은데.
세계전쟁의 주기도 슬슬 돌아왔건만, 어딘가에서 사람 한 둘 죽었다는 소식 말고는 신경을 크게 좀먹는 일도 없다. 다만 쉬지 않고 꾸준히 그러는 게 문제다. 전쟁이 났을 때는 차라리 경각심이라도 생겼지, 요즘엔 옆 동네 사람의 죽음에도 별 감흥 없이 지나치다 문득 독설이나 맞고 죽어버린다.
뭔가 조금 요상하단 생각이 드는데, 정상이겠지?
....아닌가.
뭐 하여튼 도통 세상이 돌아가는 것 같지가 않는다는 느낌이랄까, 인간이란 게 정말 별 의미 없는 생물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 같은 께름칙한 기분이 든다.
나는 커피 한 잔을 다 비운 뒤에도, 대충 그런 의미 없는 생각들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자살률이 높다는 건 죽을 일이 자살밖에 없다는 거지 그러니까 평화롭다는 거지.』
[JUSTHIS(저스디스)_Gone 노래 가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