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責)잡힐 짓 하지 말자. 수현이에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널 보고 하는 말이기도 하고. 미경씨가 왜 수현이하고 친하게 지내는 지 잘 생각을 해봐라. 멀리서 감시하기 싫어서 옆에 딱 붙여 둔거잖아. 그 사실을 너만 모르고.”
윤성화가 마음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꼭꼭 찔러서 하는 말에 비위가 상한 김근수 인상이 사납게 비틀어졌지만 그렇다고 화는 내지 않고 있었다. 그때 붙잡혀 가서 고문당하지 않게 도움을 준 사람이 윤성화뿐 인줄 알았는데 이수현의 도움도 있었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된 김근수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윤성화가 공치사나 하는 그런 소인배가 아니다는 걸 훤히 알고 있지만 혹시나 공을 수현에게 돌리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까 고민을 하다가 말을 빙 돌리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니까! 만약에라도……. 그럴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하지만 네가 노년에 혼자 와 있을 때와 같다니까. 내가 고향을 지키고 있는데 저렇게 외롭게 있으니 마음이 쓰여서 그렇지. 다른 이유는 없어.”
윤성화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객지생활 하는 애들보다 고향을 떠나지 않고 있는 애들이 더 많아. 너도 수현이한테 다른 애들과 똑같이 대해. 너처럼 그런 사연 있는 애들도 많이는 아니더라도 몇 명은 있어. 그 친구들도 지금 네 마음과 똑같이, 지금 너처럼 각자 가정을 위해 외면하는 거야. 그렇듯이 너도 외면해.”
씁쓸히 웃으며 김근수가 말했다.
“알았다! 자식! 잔소리 되게 많네. 송희씨는 후유증 없어. ”
윤성화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신경을 잘못 건드렸는지 허리가 자꾸 아프다네. 너는 안 물어봐도 되지?”
“자식이! 벌써 물었잖아. 내가 집사람에게 얼마나 무관심한 놈인지 최근에 알았다. 상처를 보고서야 10년 넘게 살면서 목욕탕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우치게 하더라. 이런 거 있지! 불편하지 않으니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거. 나는 우리 집사람이 그런 흉터가 있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어. 만약에 내가 총각이나 발정 난 똥개로 밖에 싸돌아 다니며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했다면 당연히 여자들 거기를 봤겠지. 우리 집사람은 그냥 내 생활의 일부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거기를 봤는지 안 봤는지도 기억도 없었는데 얼마 전에 보고 죄책감이 들더라.”
고해성사하듯이 고개를 숙이고 하는 말에 윤성화가 김근수의 정수리를 세게 쥐어박으며 호통치듯이 말했다.
“그렇게 뉘우치면서 옛정에 갈팡질팡 하냐? 소 똥만 치우지 말고 네 머리 속도 좀 깨끗이 치우고 빡빡 문질러 지우고 닦아내라 이놈아!”
“허허! 치워도, 치워도 자꾸 싸대는 데 어쩌겠냐? 아이구 일어나자. 진짜 소 똥 치우러 가야 된다.”
본가로 올라가는 윤성화의 뒤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래저래 복 많은 놈이구나!’ 되뇌면서도 왠지 모를 불안한 기류가 몰려온다는 느낌이 들어, 멀찌감치 보이는 수현의 집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차라리 내 같은 놈을 생각하지 말고 인두에 지져지지. 그랬으면 청상과부는 안 되었지. 차라리 친구라고 하지 말지.
고조선 이후로 얼마나 많은 나라가 생겼다가 사라졌나?
그 놈들 구속되고 나오고 또 다른 우두머리가 나라의 대장이라고 설치는 세상. 또 바뀔 건 데. 세상이 바뀌어도 왜 이렇게 갑갑한가? 김근수가 뒤로 돌아서 대문으로 들어갈 때 돌고 도는 역사 속의 한 인물인 아들이 인사만 꾸벅 하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외동 아들인 내가 아들 둘에 딸 하나!
앞으로 대략 30년 뒤에, 60년 뒤에, 90년 뒤에…… . 아이구 속 시끄러워라.
공부 잘 한다고 펄펄 날던 윤성화는 직장에서 일을 충실히 잘해 차장이라고 했나?
부장이라고 했나?
피차일반이었던 수현이는 지금? 남편을 둘째치고 운송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고.
나는?
소 똥이나 치우고 도랑에서 사금이나 주우려 다니고. 과연 내가 이 집안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이럴 수 있을까?
논에서 벼 농사 짓고, 밭에서 밭 농사 짓고, 틈틈이 사금 주워 아내에게 상납하고. 기반만 다르다 뿐이지 다른 농군과 다를 게 무엇인가?
마루도 아닌 대문 입구에 있는 화단에 쪼그려 앉아 신세 한탄을 하고 있을 때 마루에서는 김근수의 어머니와 아내인 정미경이 나란히 앉아 한심한 눈으로 내려보고 있었다.
“아이구! 마~아~, 다른 애들 공부할 때 같이 공부나 하지, 저놈의 샌드백에 주먹질이나 하고 걷어차더니 저게 무슨 꼴이냐? 아이고 속 터져라! 속 터져!”
“아이 참! 어머님! 재능이 없는 데 자꾸 공부, 공부 했으니까 남들 강남 간다고 따라 갔다가 저렇게 됐죠. 힘도 세겠다. 농사 짓게 가만히 놔뒀으면 제가 이렇게 힘들었겠어요? 어떻게 농사도 하나 제대로 지을 줄 몰라요? 아이구 한심해! 한심해!”
시어머니의 눈에 불이 켜지면서 그래도 아들이라고 두둔하고 있었다.
“이 애가 지금 무슨 소리하고 있어. 애 아버지도 공부 잘 했어. 너보다 훨씬 나았다. 저기 지나가던 성화도 한참 아래였어! 애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렇잖아도 이글거리는 시어머니의 염장을 파헤친 정미영이 이번엔 공부하다가 잠시 쉬러 나와, 자두나무에 매달아놓은 샌드백을 걷어차면서 몸을 푸는 아들을 보고 고함을 질었다.
“거기서 뭐해? 들어가서 공부 안하고. 빨리 들어가!”
아들이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듯이 놀란 눈으로 돌아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뭘 잘못 드셔나?’ 딱 그 표정으로 보다가 불끈 쥔 주먹으로, 팔목이 접질릴까? 심히 우려될 정도로 샌드백에 강렬한 펀치를 날리고 돌아서다가, 거기서도 갑자기 생긴 화를 풀지 못했는지, 붕 날아서 뒷발로 샌드백을 걷어차고, 자기 아버지가 간혹 눈을 부라렸을 때보다 더 심하게 눈알을 부라려 어머니를 노려보고, 콧바람도 어머니인 정미경에게 세게 날리고, 우물가로 가서 한 두레박 물을 퍼 올리려 벌컥벌컥 마시거나, 머리에 붓는 게 아니라, 어머니를 향해 사정없이 물을 날리고, 혀를 쏙 내밀고 마당을 지나 대문을 지나 도망쳐 버렸다.
“아이 차가워! 야 임마! 어휴~~ 성질머리! 어떻게 갈수록 닮아가! 정말 대책 없네!’
물을 한 두레박 덮어쓴 정미경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그때 멀찌감치 뒤에서 지켜보던 시어머니가, 물을 덮어쓴 며느리를 위로는 못할지언정 오히려 인상을 찡그리고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애한테 왜 그래? 잠시 쉬러 나왔는데. 그러지 마라!”
“어이 정말! 쉴 시간이 어디에 있어요. 오냐! 오냐! 하면 안 되요. 누구 아들 아니랄 까봐 갈수록 똑같이 해! 똑같이 해! 정말 대책 없네!”
김근수 어머니 인상이 사납게 돌변해 며느리를 노려보며 물었다.
“누구? 누구를 닮았단 말이야? 내 눈에는 자네하고 똑 같은데!”
시어머니의 성난 고함과 함께 뺨으로 날아오는 찬바람이 정미경을 멈칫하게 했다. 게다가 ‘왜 나를 집어 넣으세요?’ 도 따지고 싶었지만 이미 자존심이 상해버린 시어머니가 손자처럼 휑하니 돌아서 큰방으로 가 버려, 머쓱하게 돌아서 마루로 가고 있었다.
그때 우체부가 등기를 들고 왔다. 정미경이 발신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면서 내용물을 끄집어 냈다. 남편 학과 동기회장단에서 보낸 송년회 초대장이었다. 그때 문득 어디 가서 어느 대학 나왔냐며 물으면 고졸이라며 누누이 당부한 남편의 어명이 떠올랐다.
어떻게 할까?
고개를 들어 남편을 쳐다봤지만 화단에 쪼그려 앉아 청승만 떨고 있어 물어봤자 짜증을 낼 건 불을 보듯 뻔 한 것.
어명을 거스를 수 없었던 정미경이 멈칫멈칫하면서 방으로 들고 가 내용물을 펴보았다. 남편도 학교에 대해 일체 함구를 했지만 정미경도 학교를 떠올리면 몸서리를 칠 정도였다. 그러나 초대장에 있는 학교전경을 보면서, 그때 쓰러져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들었던 그 장소도 나오자, 남편을 데리고 가서, 그때와 달리 멱살을 붙잡고 다시 한번 욕을 해보라며, 달려들고 싶다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충동이 일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