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아! 나는 우리 사이를 추억의 하나로 마음에 담고 있었다. 네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상처를 받은 데 대해 늦기나마 사과를 할게. 정말 미안하다. 그리고 우리 집사람하고 성화 집사람은 의심 안 했으면 좋겠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니야. 그날 송희씨도 우리 집사람도 고주망태가 돼 자는 걸 보고 성화하고 내하고 한잔 더 하려 갔었어. 두 사람이 다음 날 못 일어나서 우리 어머니에게 혼이 날 정도였으니 그런 의심은 안 했으면 좋겠다.”
이수현이 눈시울에 눈물은 남아있었지만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그럼! 너희들은?”
“야 임마! 농담이라도 그런 잔인한 말은 하지 마라. 우리는 확실한 증인이 셋이나 있어. 네가 날 구해줬어 눈물겹도록 고마워 한번 껴안으려고 했는데 김샜다. 그래도 진짜 고맙다. 여러 가지로 내가 너한테 죄인이구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막막하다.”
“고맙긴. 내한테 이런 일만 없었다면 내가 더 고맙지. 그런데 이건 꼭 기억해. 너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 내 잘못은 논바닥에 쪼그려 앉아 미꾸라지 잡은 것뿐이야. 그것도 따져보면 네 잘못이야.”
김근수가 어깨만 으쓱하며 빈 병과 안주 부스러기를 봉지에 주섬주섬 담으며 일어서며 힘없이 말했다.
“단지 우리 입장에서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미안하다는 말밖에 없구나.”
이수현도 힘없이 일어서며 김근수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김근수가 손을 밀어내며 말했다.
“잡지마. 잡으면 껴안아서 위로 해주고 싶고 그 뒤는 나도 감당 못해. 너도 마찬가지잖아?”
“매정한 놈! 변한 게 하나도 없어. 그래! 알았다. 나! 뛰어갈래. 뒤에 와!”
“너 지금 나 고문하는 거지. 같이 가 임마! 마음 아프게 하지 말고.”
그러나 이 말이 출발하라는 신호탄이었다. 이수현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입을 막고 뛰기 시작했다. 뒤쫓아 가려던 김근수가 멈칫하며 서서 이수현의 뒤 모습만 보다가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고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집으로 가던 김근수가 그날을 생각하면서, 만약에 그때 아내인 정미경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지 않고 이수현을 붙잡아 데모 대열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를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다.
양반 집 맏딸인 어머니가 머슴으로 있던 집안의 여식을 며느리로 받아 들였을까? 받아들였다면 지금 이수현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지금의 삶보다 더 고단한 하루, 하루를 가시밭길 걷듯이 걷는 고통. 손바닥 보듯 훤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차라리 혼자인 지금이 낫다는 생각을 하면서 뒤를 돌아봤다. 그때 멀찌감치 뒤에서 정미경이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살금살금 뒤따라 걷다가 길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만약에 그때! 이수현이 팔을 잡았을 때 동정과 연민을 떠나 과거로 회귀해 김근수가 이수현의 손을 잡고 그 다음 행위들을 했다면,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그렇잖아도 겨울 문턱에 들어서 부는 바람보다 더 세찬 바람이 덮쳤을 것이다.
김근수가 그런 불행을 떠올리며 사지를 떨고 있을 때 정미경은 길바닥에 바짝 엎드려 오돌돌 떨면서 기도하며 뇌까리고 있었다.
‘빨리 가던 방향으로 고개 돌려라. 차가워 죽겠다.’
그 모습이 김근수의 눈에 딱 들어왔다.
‘지금이 일으켜줘야 할 때인데! 아는 척하면 눈치 빠른 정미경 여사가 방금 전 이수현에게 매정하게 굴었던 의도를 단번에 눈치 챌 거고...... . 일단은 모른 척! 최대한 빨리 뛰자? 아니지! 튀자!’
결정을 내린 순간! 김근수는 전 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 저 놈이 왜 갑자기 속도를 내? 아이! 무서워!’
같이 가자며 ‘야!’하고 싶었지만 도둑질 한 기분이 던 정미경이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김근수의 뒤를 쫓아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월은 또 쏜살같이 지나가면서 지난 세월의 흔적들을 떠올릴 겨를도 없이 잊으려고 노력하며, 현실과 미래만을 보면서, 모두를 불행했던 과거를 잊어져 가고 있었다.
김근수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김근수는 아들 하나를 더 얻었다. 일곱 살 된 딸은 재혼을 하지 않은 이수현의 집에서, 이수현이 마치 자기 엄마인 것처럼 드나들지도 않고 아예 거기 눌러 붙어 있었다.
거의 10년의 세월 동안 그 모습을 본 정미경의 가슴에서는 염증이 생겼다가 암이 되었다가 자동으로 없어지기를 반복하며 지금은 아예 무감각해져 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한가지 무감각해 하면서도 신경을 쓰이게 하는 게 하나 있었다. 김근수의 도랑에 대한 집착.
“아빠 어디 갔냐?”
아들이 가리킨 곳은 앞 도랑이었다. 그때 후로 농약이나 지저분한 이물질을 없앤다고 도랑에 들어가서 청소를 시작하게 되면서 농사보다 더 열심히 하더니, 지금은 지방 방송에 간혹 나올 정도로 환경 활동가가 돼 버렸다. 그렇다고 활동가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짬 나는 시간마다 전국으로 혼자만 다니며 바닷물만 빼고 물이 있는 어떤 곳이면 들어가 ‘우리 자손들이 안전하게 놀게 하기 위해서’라며 청소를 하고 있었다.
‘요즘 누가 개울에서 논다고’라며 면박을 주면 사라졌던 험상궂은 인상만 되살리는 꼴이 돼 정미경은 입도 뻥긋하지 않고 지켜보지도 않고 아예 외면해버리는 상황이 돼 있었다.
“빨리 점심 먹으러 오라고 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문 밖으로 달려 나가 버렸다. 그때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보고 야단을 치고 있었다.
“애를 얼마나 후려 잡았길래 말이 떨어지기도 무섭게 저렇게 뛰어가냐? 그러지 마라. 애들 기 죽는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돌려 한번 콧방귀를 치고 언성을 조금 높여 대꾸 성 발언을 했다.
“오냐! 오냐! 했다가 누구 고생 시키려고요. 저는 자신 없어요.”
정미경이 뒤탈이 무서운지 서둘러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축사로 들어가 서둘러 들어갔다.
“아이고 우리 며느리 잘한다. 허허허!”
시아버지가 너스레를 떨면서 축사를 볼 때 시어머니가 잠자고 있는 셋째 손주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이고! 우리 장군님! 제 아비하고 똑 같이 생겼네. 허허허!”
그때 김근수 아버지 인상이 바로 성난 호랑이가 돼 어머니를 노려보며 호통을 쳤다.
“어디다가 저런 머저리 놈과 비교를 해.”
그때 그 머저리가 아들 손을 잡고 대문으로 들어오다가 아버지 눈을 마주치자마자 아내가 있는 축사로 도망치듯이 사라져버렸다. 그때 아들도 뒤따라 가려다가 할아버지의 호통소리에 아버지를 따라가지도 못할 난감한 사태임을 파악하고 바짝 긴장한 자세로 아버지가 사라진 축사와 마루에 앉은 할아버지를 번갈아 보면서 어디로 튈지를 결정하느라 시간을 지체하고 있었다.
“야 이놈아! 그 놈 따라다니지마. 물들어!”
“이 영감이 애들한테…….”
김근수 어머니가 김근수 아버지를 노려보며 야단을 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축사로 도망쳐 갔던 김근수도 정미경에게도 야단을 맞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