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약 13년의 세월 동안도 김근수에게는 목표란 게 없었다. 보여주기 식의 허송세월만 보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김근수는 겉으로 보기에는 씩씩해 보였지만 속을 곪아가고 있었다. 그 사이 아내를 닮은 딸이 태어나 그나마 김근수는 살아야 하는 이유 정도만 깨우쳤지 달라진 건 하나도 없이 세월만 따라가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한 직장에서, 한 부서에서, 한가지 일에만 최선을 다하다가 정년 퇴직한 사람보다 더 못한 사람이 돼 있었다. 그들은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나름 계획을 세우고 퇴직을 했지만 김근수는 아무런 준비 없이 정년퇴직 임박 전에 해고당한 사람처럼 농사 일이 끝나면 딸을 업고 다니며, 삼십 년이나 사십 년 뒤에 손주를 업고 다닐 예행연습을 하듯이 돈 두렁을 걸으며 사색을 즐기는 게 하루의 전부가 돼 있었다.
그러나 정미경은 달랐다. 젖소를 전부 처분하고 축사에는 한우들로 꽉 차게 했다. 농사일은 어릴 때부터 해온 터라 빠르게 적응해 잘하는 건 당연해서 놀라울 것은 없었다. 문제는 이수현이었다. 남편과 이수현과의 깊은 내막까지 모르던 아내는 이수현과 자매처럼 지내는 사이로 발전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식이 없던 이수현이 김근수 아들을 자기 집에 데려가 친아들처럼 보살피기까지 했다. 김근수의 하루 하루는 살얼음판이었다. 하루는 갑갑했던 김근수가 물었다.
“저 사람은 당신은 원수라면 원수야. 그런데 어떻게 친하게 지낼 수 있어? 저 친구 아주 영악한 여자야. 조심해!”
이렇게 이간질도 했지만 오히려 야단만 맞게 되었다.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이네. 나는 거들떠도 안 보고 울러 매고 갈 때는 언제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끈기가 없어 싫어했다는 그 사람 말이 딱 맞네. 과거에 얽매이면 발전이 없어. 당신도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해. 내가 보니까 당신은 힘만 셌지 농사는 영 꽝이야. 이제 서른! 세상 다 살은 영감처럼 뒷짐지고 논두렁이나 걸어 다는 짓도 그만하고 뭐 할까 고민부터 해. 딱 일년 줄 테니까 그때까지 못 정하면 축사에 가서 소 똥이나 열심히 치우게 할거야. 알겠어?”
“무슨 개똥 소리를 하고 있어. 그 씹할 년이 그러데? 신랑이 뒈지더니 정신이 돌아버렸나. 나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아가리를 함부로 나불거려. 기분 더럽게. 에이 씹할 년! 돈이나 좀 줘. 입 좀 헹구게.”
“애들 들어. 이제 말도 조심해서 하고. 그리고 소 똥이지 개 똥이 아니다.”
정미경이 주머니를 뒤척거리면서 2천원을 주면서 김근수 등을 대문 쪽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집에 막걸리 많은데 돈 쓰고 안달 난 사람 같아. 맥주도 한 병 사와.”
“이걸로 모자라!”
“어제도 가져 간 돈 남아있잖아. 주머니에 있는 거 봤어. 목말라. 빨리 갔다 와.”
뒷짐을 지고 어슬렁거리고 마당을 나갈 때 어머니가 불렀다.
“어디 가냐?”
김근수의 눈이 번쩍 했다.
“엄마! 만원만 줘!”
“나도 애기한테 타 쓴다. 내가 확실히 사람을 잘못 봤어. 저렇게 독할 줄 몰랐다. 부녀회 아낙들이 지금 학을 떼고 있다. 얼마나 독한지…….”
“왜? 돈만 빼돌리다가 들켰겠지 뭐! 그거 말고는 없잖아.”
“그래도 어느 정도는 눈감아 줘야지. 일 원짜리 하나라도 틀리면 난리란다. 어제는 부녀회 회의 때 먹을 과자 부스러기 사 오다가 공금으로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었다고 난리를 쳤다 더라.”
어머니가 징그럽다는 듯이 슬며시 고개를 뒤로 돌리다가 딱 걸려들었다.
“어머님! 어머님이 누누이 며느리에게 교육을 시켰었습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며! 신랑 감시 잘 하려고 그렇게 타이르고도 잊었습니까?”
“아이고 이놈아!”
기어이 뒤통수를 한대 맞고 심부름을 가던 길에 이수현과 원수는 외 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있듯이 딱 마주쳤다. 김근수가 먼산만 보고 모른 척하고 지나쳐버렸다.
“야! 너 왜 그래? 기분 나쁘게!”
김근수가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너 이 새끼! 우리 집사람한테 뭐라고 그랬어? 내가 끈기가 없다고? 어디다가 함부로 말해. 기분 더럽게. 네가 나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함부로 쳐 죽게? 앞으로 우리 집 사람 만나지 마. 물들어.”
“야! 너 방금 뭐라고 그랬어? 물들어? 이 새끼가 어디다가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나불거려. 네가 임마 끈기 없는 건 맞잖아. 내가 틀린 말 했어?”
“이게 씨!”
“뭐! 씨 다음도 나와야지. 그래야 김근수 지!”
이수현이 동네방네 다 들리게 대차게 대들자마자 김근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 새끼가 여자라고 봐줬더니 겁 대가리를 아예 상실했구나!”
동네 사람들은 이들이 처녀총각이 아닌 줄 알지만 길가던 사람들은 아니었다. 처녀총각간에 벌어지는 혈투의 순간이었다. 구경꾼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미경도 김근수 어머니도 달려 나왔다. 그때 누군가가 박수를 치면서 싸움을 부축이고 있었다.
“그래 잘한다. 잘한다. 이제야 동네가 좀 살아나는 것 같네. 너희들이 있어야 생기가 돌지.”
“아이고 저 놈들은 붙었다 하면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이야!”
“사랑싸움인지 알았는데 정말 앙숙이었네. 저놈들은 언제까지 저렇게 머리 채를 쥐어 뜯을까?”
그때 뒤에서 ‘비켜!’하는 고함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정미경이었다. 양동이에 물을 채워 들고 쫓아와 피할 겨를도 없이 퍼부어 버렸다.
“에이 이런 똥개들!”
멱살을 붙잡고 있던 김근수와 이수현이 놀란 눈으로 정미경을 넋이 나가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 몰골은 길바닥에서 발정 난 똥개 수컷이 암컷 궁둥이에 올라 타 쑤셔놓은 거시기를 빼지도 못해 안절부절 하는 형상과 똑같았다. 김근수는 그래도 머리카락이 짧아 그런대로 봐 줄만 했지만 이수현은 그의 신세를 떠오르게 할 만큼 처량하기 그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정미경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검지 손가락을 곧게 세운 채 팔을 쭉 뻗어 이수현의 눈을 찌를 듯이 향하게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야! 이것들이 쇼를 하네. 쇼를 해. 내가 그 동안 꾹 참고 있었더니 누굴 병신으로 아냐! 지랄염병 그만 하고 당장 떨어져. 안 떨어지면 바로 똥 물도 퍼부어버린다.”
그렇게 기고만장하던 이수현이 얼굴을 가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엉거주춤 하던 김근수가 뒤를 따라 달릴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야! 너! 거기 안 서. 따라 가기만 해봐. 집에 들어 올 생각하지마. 내 원망할 짓 만들지마!”
구경하던 사람들이 살벌한지 끽 소리도 못하고 입을 막고 정미경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아주머니 한 사람이 박수를 치면서 정미경의 기세를 올려주고 있었다.
“아이고 잘 한다. 아이고 잘 한다. 저 놈이 이제 임자 제대로 만났네. 아이고 꼬시다.”
김근수 단골 술집 여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