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젖기를 멈추고 이번에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김근수의 문신을 다시 보면서 나지막이 한탄을 했다.
“너 정말 대책이 없는 애 같아. 나는 겉으로 드러난 내 상처는 부끄럽지 않아. 내가 정말로 치욕을 느끼는 건 그 놈이 강제로 내 팬티를 벗겨 여길 지진 그때였어. 그 놈은 죄값으로 이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내 마음의 상처는 여전히 여기에 있단 말이야. 자의로 낸 상처와 치욕을 느끼며 받은 상처와는 전혀 달라. 이 멍청이야. 어디 봐! 얼마나 크게 그렸는지 다시 보자.”
정미경이 다시 김근수의 바지를 내리려고 했다. 김근수가 허리춤을 꽉 잡아 버티며 물었다.
“봐서 뭐하게?”
정미경의 주먹이 김근수의 가슴으로 서너 번 날아갔다.
“없애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 지 알아야 할 거 아니냐? 너는 왜 쓸데없는 데 돈을 낭비하려고 해? 물러 받을 재산이 많아서 여기 들어 갈 돈은 돈 같지도 않지? 아! 정말 대책 없는 놈이네. 내가 네 같은 놈과 평생 동안 산다는 건 악몽을 꾸는 것과 같을 것 같다. 어이 씨! 정말!”
이번에는 정미경의 손바닥이 김근수의 허벅지사타구니로 날아갔다.
“찰싹!”, “억!”
“아~~~. 야! 거길 때리면 어떻게?”
김근수가 불알을 잡고 나뒹굴고 있었다. 그때였다.
“야 이놈들아! 싸우려면 밖에 가서 싸워라. 시끄러워 잠을 못 자겠다. 예쁘기만 하드만!”
“어이 씨! 내가 정말 미치겠어. 엄마하고 이놈하고 둘이 살아! 죽이 착착 맞네. 맞아! 어이 씨!”
정미경이 비틀거리며 일어서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와! 성질 무섭네. 어머님 원래 저랬어요?”
“어이 시끄러워! 잠 좀 자자! 잠! 너도 이놈아 여자 보는 눈이 그렇게 없나? 제 성질 고약해! 골라도 어떻게 저런 애를 골랐어. 멍청하게!”
김근수가 입 꼬리를 비틀어 피씩 웃으며, 정미경 어머니 옆에 누워 천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를 골고 있었다. 밖으로 나간 정미경도 5분도 지나지 않아 씩씩대며 방으로 들어와 김근수를 걷어차 옆으로 밀어내고 중간에 꼭 낀 채 잠들었다.
며칠 뒤에 정미경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합방을 시키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내가 이해가 되지 않아. 당신이 그 놈은 안 된다고 해놓고선 왜 또 손바닥을 뒤집어?”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 놈이 아주 마음에 든다고 했지.”
“술 친구로 마음에 든다고 했지 사위로는 안 된다고 했잖아!”
“그 참 별 소리 다 하네.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럼 다 큰 애들을 저렇게 버려 둘 거에요. 동네 창피하게.”
“곧 졸업하잖아. 그때도 늦지 않아. 만약에라도 그 놈이 취업이라도 못 해봐. 그땐 어쩔 건데?”
정미경 어머니가 겨드랑이에 두 주먹을 숨기며 기고만장하게 말했다.
“그까짓 월급쟁이 시켜서 뭐하게? 내가 당신 마음만 보고 결혼하자고 했지 재산보고 하자고 했어요? 재산을 봤다면 논 한 마지기도 없는 당신보고 내가 미쳤다고 청혼을 했겠어요. 사람 팔자는 다 타고 난다고 했잖아요? 아무리 파닥거려봤자 안 되는 놈은 안되고 되는 놈은 가만히 누워 있어도 된다고 당신이 늘 그랬던 것도 잊었어요? 그 놈 관상도 봤잖아요. 애 굶길 걱정은 절대로 없으니 약혼을 시키던 합방을 시키던 서둘러 시켜버립시다.”
대답은 하지 않고 한숨만 푹 내쉬던 정미경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머니가 빙긋이 웃으며 붙잡지 않고 뒤 모습만 보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어머니가 예상한대로였다.
“당신만 사전 답사하고 왔지? 나도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빨리 나와!”
눈썰미가 좋은 정미경 어머니의 안내로 한달음에 김근수 본가가 있는 마을에 도착한 아버지가 말했다.
“어! 여긴 내가 와 본 동넨데. 우리 집 소도 저 집에서 샀는데.”
정미경 아버지가 손짓을 한 집이 김근수 집이었다.
“가만! 온 김에 젖소 한 마리 봐야겠다.”
남편이 김근수의 집을 알고 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젖소가 왜 필요한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었다.
“젖소 키우게?”
“당연하지. 단련을 시켜서 저 집에 시집 보내야지. 내가 그 놈 아버지 성격을 잘 알아. 무슨 일이던 서툴게 하면 바로 불 호령이 떨어져. 허허허! 그나저나 우리 미경이 횡재했네. 횡재했어.”
큰소리로 웃으면서 말과 다르게 젖소를 보려고도, 김근수의 아버지를 만나지도 않고 바로 차를 돌려 집으로 내려가면서 다시 한번 확인 차 물었다.
“마주쳤으면 민망할 뻔 했네. 아니지. 얼마나 경망스럽게 생각했을까? 그런데 저 집 확실하지? 그 놈이 면장님 외동 아들이란 말이지? 그러고 보니 얼굴이 비슷하네. 허허! 고향이 여기라고 할 때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허! 그 참! 인연이 되려니 이런 인연도 있구나.”
어머니 눈이 젖소 눈보다 더 크게 떠지면서 물었다.
“면장 아이들이었어요? 어떻게 알았어요?”
“맞아. 오랫동안 면장을 했어. 우리 소도 저 집에서 샀다고 얘기했잖아. 안지가 벌써 삼십 년이 훨씬 넘은 것 같다. 내가 전국으로 돈 벌러 다닐 때 저 집에서도 일을 한 적이 있었지. 옆에 있는 방하고 창고도 내가 지었어. 밖에서 보면 왼쪽에는 방이 여섯 개가 있어. 그 중간에 마구간이 있고 오른 쪽에는 창고고 담 바로 앞에 방이 세 개인 건물이 있지. 내가 거의 다 지었다고 봐야 해. 만약에 미경이가 저 집에 시집가면 그 방이 아마 미경이 방이 될 거야. 내가 굉장히 정성 들여 지은 방이 거던. 허허!”
어머니가 미간을 좁혀 노려보며 말했다.
“만약이긴. 당장 시집 보내야지. 그런데 확실해요? 그 놈 어디를 봐도 면장 아들 같지가 않잖아요. 산적이나 소도둑놈처럼 생겼는데 전혀 상상이 안 되네.”
“허허! 아버지를 쏙 빼 닮았어. 지금 생각해보니까 똑 같아. 성격도 그렇고.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네. 그건 닮으면 안될 건데…….”
어머니 얼굴에서 걱정스런 인상이 아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계집질 많이 하고 싸돌아 다녀 단 말이지. 허허! 그 아비의 그 자식이네. 피는 못 속여.”
아버지 인상이 한 순간에 일그러지며,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노려보며 추궁하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 놈도 그래?”
세상의 모든 번뇌에서 지금 막 해탈한 듯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누가 들을까 봐 두렵다는 듯이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들릴 듯 말 듯 낮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