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과 혼인신고만 하지 않았지 이들은 이미 부부였다. 드라마나 소설에 나오는 결혼 직전에 양가 부모의 반대로 울고불고하는 그런 스릴도 이들에게는 없었다. 오히려 양가에서는 금의환향하듯이 반겨 주었다. 단지 하나의 흠이라면 정미경 모친이 가진 안쓰러운 마음이었다.
정미경에게 신체적인 결함만 없었다면 김근수 같은 놈은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을 거란, 딸에 대한 자긍심이 늘 자리잡고 있었지만 이 점도 4학년 여름 방학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을 무렵에 사라져버렸다.
김근수와 정미경은 말 그대로 쌍 코피를 흘리는 중이었다. 김근수는 지방 대학 중에서도 순위가 떨어지는 학교 이름을 제외하고는 어디던 서류 전형과 시험도 합격할 수준에 있었다. 그러나 정미경은 달랐다. 목표는 졸업만 하자였다.
이유는 아무리 학점이 좋고 영어뿐만 아니라 외국어를 그 나라 사람처럼 능통하게 해도 시국사범을 받아 줄 회사가 없다는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미경이 하는 공부는 영어와 유럽권 언어뿐이었다. 가끔 졸리면 일본어와 중국어 정도였다.
그런데 신기한 건 졸면서 한 일본어와 중국어를 더 능통하게 하는 것처럼 김근수의 귀에만 들리고 있었다. 그건 아마 김근수가 일본어와 중국어를 주워 담기 식으로 들어서 이해를 해서가 아닐까? 두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국내 서너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건설회사에 다니는 정미경의 오빠가 휴가를 맞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여동생을 데리고 왔다. 그날 밤에 정미경의 어머니가 그 동안 고민했던 문제에 대해 깔끔하게 해결한 것처럼 단도직입적으로 오빠에게 말했다.
“자네 새벽에 내하고 어디 좀 가게나.”
“어디 가시려고요?”
뜬금없이 하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너희들만 휴가냐? 나도 여행 좀 가고 싶어서 그렀다.”
그때 여동생이 끼어들었다.
“그래 오빠! 나도 같이 가. 방학인데 집에만 있기도 그렇잖아. 언니는 졸업반이라 취업 준비하느라고 안 올 거고 내 혼자 아빠하고 농약치고 풀만 뽑을 순 없잖아. 나도 같이 가자. 응!”
다음날 새벽에 정미경 어머니가 쪽지를 주며 말했다.
“아무 말 말고 그 주소로 가자.”
어머니 손에 있던 주소는 김근수가 학교에서 사라지고 군대가 갔을 때 오로지 복수만 품에 안고 정미경이 줄기차게 찾아 다니던 중에 알아낸 주소였고 정미경이 주소만 들고 혼자간 동네이기도 했다. 김근수의 집은 정미경의 집에서 승용차로 두 시간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정미경의 오빠는 결혼하기 전에 어머니가 아내 집에도 똑같이 사전답사를 했기 때문에 가는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집인지 궁금증만 더 일어나 페달을 더 세게 밟게 되었다. 주소에 적힌 집 앞에 도착한 세 사람은 눈을 의심하면서 마주보고만 있었다. 뒷좌석에 있던 여동생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엄마! 여기가 어디야? 어이! 소 똥 냄새. 뭐야? 소 살려고 여기까지 왔어?”
투덜대더니 바로 누워버렸다. 그러는 둥 마는 둥 오빠와 같이 차에서 내린 어머니가 집을 두리번거리며 보다가 맥없이 지나치는 아가씨를 보고 다가가 물었다.
“아가씨! 여기가 혹시 김근수 총각 집이에요?”
“예! 그런데…….”
잠시 머뭇거리던 아가씨가 어색한 표정을 짓고 목례하듯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가고 있었다. 그때 차에 누워있던 여동생이 급하게 차에서 나와 지나가는 있는 아가씨의 뒷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물었다.
“왜? 아는 사람이야?”
“응! 잘 알지. 우리학교에 전설적인 선배야. 저 사람 집이 여기였나? 별 신기한 일이 다 있네.”
어머니와 동생이 지나치던 아가씨와 집을 보면서 심각하게 수다와 토론을 벌이는 동안 오빠는 직업 근성을 발휘됐는지 전답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김근수 집 규모도 보고 있었다. 그때 김근수의 젊은 아재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멈춰 서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우리 동네 이사 오려고요? 어! 가만! 아가씨는 안면이 굉장히 많은데…….”
정미경의 오빠가 빠르게 눈치를 채고 관심을 돌리는 말을 했다.
“이사 오려고 한 게 아니고 지나치다가 집이 워낙 넓어서 구경하려고요. 논도 훤히 보이고 전경도 좋고 해서요.”
“아 예! 저 아가씨 이 집에 시집 보내면 되겠네요. 그럼 저 집도 저 앞에 논도 전부 아가씨 꺼 되는데. 허허허! 그런데 아쉽다. 우리 조카가 아가씨와 닮기는 했지만 훨씬 예쁜 배필을 정해둬서.”
여동생이 이를 바드득 갈면서 노려보자 김근수 아재가 눈을 한번 찡긋하고 가버렸다.
“아이 씨! 뭐 저런 아저씨가 다 있어. 기분 나쁘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미경 어머니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밖에 없었다. 집에 도착할 무렵에 오빠를 보고 물었다.
“근수가 외동이라고 했지?”
정미경의 오빠가 빙긋이 웃으며 어머니와 여동생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허허! 어머님이 저한테 외동이라고 했습니다. 허허! 그런데 미경이가 저 많은 논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생각을 하니까 시집 보내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네요. 우리 막내이라면 고생 좀 하게 보낼 건데.”
자는 줄 알았던 여동생이 벌떡 일어나 앙칼지게 투덜거렸다.
“아! 정말! 오빠 나도 농사 많이 지었어. 왜 자꾸 언니만 했다고 해? 정말 억울해!”
다시 벌렁 누워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계속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그때 오빠가 말했다.
“어머님! 미경이는 걱정할 필요 하나도 없겠습니다.”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많은 논을 눈으로 직접 확인 한 게 마음에 걸렸는지 걱정스럽게 말했다.
“저 많은 논에 애가 들어 가야 된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프네.”
엷은 콧바람을 내던 정미경의 오빠가 말했다.
“어머님!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좌우로 작은 도로들을 보니까 10년 안에 제가 여기 도로 공사하러 올 것 같습니다. 그 친구 집 앞에 논도 보니까 대지가 높아서 논에 물 댄다고 고생 꽤나 했겠지만 저런 땅이 금싸라기입니다. 제 생각에 그 친구 조상들이 전부 계산하고 땅을 매입해둔 것 같습니다. 분명히 대 단지 건물이 들어섭니다. 제가 확신합니다.”
그때 정미경의 여동생이 벌떡 일어나 물었다.
“엄마! 동생 없데?”
“그러게 말이다.”
어머니대신 오빠가 한숨을 푹 내쉬며 웃으며 말했다. 호기심이 많은 여동생 입에서 피씩 소리가 나오고 또 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