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을 절룩거리면서 인사를 하고 지나칠 때 동병상련의 마음을 불쑥 들게 한 여자였다. 그때 그 마음은 잠시뿐이었다. 앞에 있는 이 여자를 안쓰럽게 보자마자 김근수가 정미경의 가슴에 불을 지펴버렸다. 학교에서 예쁜 여자만 보면 팔짱이 끼고 가는 중에도 ‘스톱!’하며 그 여자가 사라질 때까지 뒤통수를 보던 그 짓을 이 여자에게도 했다. 탄식까지 하면서 정미경에게는 자조심 조차도 없는 여자로 간주해버리고 염장을 파헤치는 말도 해버렸다.
정미경이 바로 옆에 껌 딱지처럼 붙어있는데도 예쁜 여자만 지나치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껄떡 쇠의 기질을 집 앞에서도 발휘하게 해준 이 여자! 당신과 나의 차이가 뭔데? 천만다행이 임자가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 말대로 안면이 그냥도 아닌 너무 많다. 뚫어지게 윤성화를 보던 정미경의 눈이 마음을 알려 주는지 어느새 움츠려진 눈으로 변해 있었다.
윤성화도 마찬가지였다. 악몽과 죄책감이 음습해온 윤성화가 오토바이 손잡이를 놓칠 뻔 할 정도로 비틀거렸다. 시선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새 정미경의 얼굴에서 당혹스러움과 분노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일을 두고 아무런 권력도 권한도 없는 군 복무의 대체로 전투 경찰로 복무했던 윤성화에게 책임을 지우게 할 수도 원망도 할 수 없다는 걸 네 사람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어찌 보면 윤성화도 피해자이다. 그는 보는 고통을 강요당해야만 했다. 그 당시 여학생뿐만 아니라 남학생들도 어떤 식의 고문을 당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정미경이 아닌 김근수를 택했고 그 뒤로는 김근수의 아내로 점지해둔 이수현을 택했다. 그런데 지금 김근수 옆에는 이수현이 아닌 교정에 기절해 쓰러져 있던 정미경이 나타났다. 당황해 하는 윤성화를 보고 같이 온 여자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입술이 꿈틀할 때 정미경이 먼저 말했다.
“그 뭐! 한때의 나쁜 추억이라고 생각해요. 되돌려 그때로 간다고 해도 저는 그때처럼 그 자리에 있을 거고 그쪽도 그 자리에 있을 거고 이 놈은 어떤 여학생을 울러 맬 거고, 달라질 건 없잖아요. 지금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정미경이 복잡한 교차로에서 교통 정리하듯이 시원하게 정리해 준 줄 알았지만 김근수만을 향한 질문이란 걸 각인시켜 주듯이 김근수를 노려보고 말했다. 김근수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민망한 얼굴로 변명거리를 머리 속에서 끄집어 내려고 발버둥칠 때 윤성화의 표정도 작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윤성화의 시선이 등 뒤로 향해 돌아섰다. 거긴 방금 김근수의 입에서 ‘저 새끼가!’란 욕을 나오게 한 이수현의 본가가 있었다. 지하철에서 만난 이수현은 그 당시를 좋은 추억이라고 했다.
그때 그 일은 누군 대학 시절 한번쯤 겪는 좋은 추억의 일부이고 누군 뼈아픈 잔혹사였다. 좋은 추억이 되지 못한 자가 가슴에 담고 가야 할 육체적 정신적 고통 속에는 수치심도 동반하고 있다. 김근수는 그런 수모를 당하여 수치심을 얻은 사람들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이 아니지만 윤성화는 달랐다.
손을 꼭 잡고 있는 두 사람을 보던 김근수도 정미경의 손을 잡았지만 정미경은 그들의 눈을 보면서 어떤 마음으로 잡은 손인지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분위기를 어둡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정미경이 살짝이 김근수의 손을 밀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은근슬쩍 넘기려고? 그건 안되지!”
김근수가 다시 손을 낚아채듯이 붙잡아 가슴에 쑤셔 넣듯이 붙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당신! 지금부터가 소중해! 오케이?”
‘이런 눈치 없는 놈! 그래도 그 말은 듣게 좋네’
머쓱하게 두 사람과 눈을 마주칠 때 그들은 밝게 웃으며 동시에 말하고 윤성화와 결혼 사람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지금이 중요하지! 참! 백송희에요. 근수씨 이름은 귀가 닳도록 많이 들어서 처음 뵙지만 어떤 사람인지 그림이 훤히 그려지네요. 반가워요!”
백송희는 윤성화와 김근수보다 두 살이 많았다. 성격이 정미경만큼이나 당차서 두 남자가 굳이 나서서 인사를 시켜 줄 불편을 덜어주었다. 학교는 김근수와 정미경이 다니는 대학의 인근 대학을 다녔고 올해 졸업을 하고 직장을 다닌다고 했다. 고문 받은 경찰서도 정미경이 고문 받은 경찰서와 같았다. 윤성화와 인연이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고 했다.
“여기서 밤새우겠다. 성화야! 원래 네 목적지 가서 한잔하자.”
윤성화는 오토바이를 질질 끌고 백송희는 초승달 옆으로 보이는 별이 신기한지 하늘만 보고 걸었다. 그때 앞이 갑자기 밝아졌다. 김근수 집안의 젊은 아재였다.
“어! 성화도 왔네. 세월 참 빠르다. 벌써 짝들을 다 지어왔구나. 참 보기 좋다. 이 아제가 오늘 한잔 사줘야겠는데.......”
윤성화와 김근수의 표정과 달리 백송희와 정미경의 인상이 순식간에 찌그려졌다. 벌써 아재가 눈치치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 봄날도 한 순간이다. 내가 노망이 든 모양이다. 나중에 보자.”
김근수 아버지를 사랑방에서 쫓아내고 김근수 어머니가 빚어낸 막걸리를 입에 대던 정미경과 백송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그 다음부터는 김근수와 윤성화가 사발을 채워줄 필요가 없었다. 식혜를 저렇게 마셔도 느끼해서 못 마실 텐데 어쩜 저렇게 잘 마실까? 놀란 눈을 마주치면서 신호가 오가고 있었다. 정미경과 백송희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무렵에 사랑방은 이미 국회의사당으로 변해 있었다. 김근수가 윤성화에게 눈짓을 했다.
그렇게 슬그머니 방귀 새듯이 사랑방을 나가버렸다. 다음 날 아침 김근수 어머니가 코를 잡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아이고 술 냄새! 무슨 애들이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
백송희는 남의 집 며느리가 될 사람이지만 정미경은 아니었다. 늦잠을 잘 때마다 불호령이 떨어지는 아버지의 목소리로 들려 어리광 부리듯이 돌아 누울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비 시어머니의 예비 며느리.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합 받을 직전이라는 위기감을 느낀 정미경이 허둥대며 일어났다. 백송희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근수는?”
‘어? 어디지? 근수 자취방인가? 아닌데!’
정미경이 비몽사몽 상태로 두리번거렸다. 아버지가 아니고 엄마였다. 그러나 얼굴이 아니었다. 방도 낯설었다. 옆에서 자고 있는 사람도 처음 보는 여자였다. 코도 억세게 골고 있었다. 팔다리도 거미 손처럼 지그재그로 벗어있었다. 베게는 아예 보이지도 않고 생판 처음 보는 여자의 얼굴이 쳐 박힌 이불에는 뿌연 오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이! 징그려! 코를 막으려고 간 손바닥에 뭔가 흥건히 젖은 느낌이 와서 쓱 훔쳐 쳐다봤다. 여자의 이불 위나 똑 같은 뿌연 오줌이 턱 아래에서 흥건히 나왔다. 이게 뭐야? 어이 창피해. 나도 보면 어쩌지. 고개가 밖으로 돌려졌다.
“얼른 씻어라!”
“아! 예!”
얼떨결에 나온 대답이었지만 정미경은 아직 정신이 덜 깬 상태였다. 방문에 닫히면서 시원한 바람도 몰려왔다가 사라졌다. 그때서야 정미경은 동작이 날렵한 토끼처럼 빨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