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조금 벗어날 때 김근수가 정미경의 손을 잡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재들이 좋아하시는 걸 보니까 신혼여행 갔다 온 것 같은 기분 있지? 너는 민망해 하고. 허허!”
정미경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을 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어머님이 따뜻하고 사려가 깊은 분 같은데 굉장히 무서워지는 거 있지. 내가 잘못 본 건 아니지?”
“백 점 만점이다. 원래 그래! 속 마음을 잘 내놓지 않아서 지금도 눈치를 보고 난 뒤에 내 생각을 얘기할 만큼 편한 분은 아냐. 그래도 엄마가 판단을 내린 것 중에 틀린 건 하나도 없었어. 시골에 살아서 촌 아주머니가 되었지만 아까운 인재지. 우리 엄마 대학 나왔다. 놀랍지?”
정미경의 눈도 입고 왕방울처럼 커져버렸다.
“가을 바람이 맛있냐?”
“응? 무슨 말?”
또 한번 휘둥그렇게 떠진 눈으로 물었다. 김근수가 대답은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벌어져 있는 정미경의 입술을 꼬집었다. 제법 세게 꼬집힌 것 같았다. 울상이 돼 김근수의 어깨를 세게 치고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입을 다물지 않아서……. 허허허!”
정미경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아버님도 대학 나오셨겠네?”
김근수가 빙긋이 웃으면 말했다.
“아니! 중졸! 일제시대 때 중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에 가 계셨어. 그렇다고 독립운동 하러 간 건 아니고 돈 벌러 갔어. 그래서 우리 집에 땅이 많아. 여기도 다 우리 논이다.”
김근수가 돌리는 고개를 따라 정미경이 따라갔다. 두 마지기가 아니라 이백 마지기는 돼 보였다. 갓 타작을 해서 그런지 논에서 구수한 짚단 냄새가 바람을 타고 다녔다. 그 중에 몇 줄기의 바람이 정미경의 코로 들어가면서 잠자던 걱정을 깨웠는지 한숨이 나오고 있었다.
“왜? 무서워?”
“당연하지. 솔직히 너하고 결혼할거란 확신은 가지고 있었어. 네가 좋아서 그런 게 아니고 도서관 앞에서 키스도 아닌 뽀뽀를 당했을 때, 그때 이미 내 연애 역사는 시작도 못하고 묻혀 버린 거지 뭐! 한편으로는 잠시 저당 잡힌 기분도 들고. 그런데 지금 또 저당 잡힌 기분이 들어. 저 논에.”
김근수가 입 꼬리를 한쪽으로 올려 비웃으며 말했다.
“논을 보니까 욕심이 나고 농사를 지으려니 엄두가 나지 않고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구나. 그렇지?”
“알면서 왜 묻냐? 그렇다고 네가 모범생까지 바라지도 않지만 평범하지도 않잖아. 천하 제일의 바람둥이가 저 많은 전답을 두고 가만히 농사만 지을까? 분명히 저 땅을 담보로 대출을 해서 팔도를 싸돌아 다니며 주색잡기에 빠질 건데. 하루 아침에 ‘아! 옛날이여’을 읊으며 저 논만 볼 텐데. 내가 왜 그런 비참한 청춘을 보내야 해? 싫다 싫어!”
사시나무 떨듯이 고개를 흔들며 김근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김근수가 헛웃음을 치며 정미경의 목을 감싸 자기 볼에 붙이면서 시름하듯이 나지막이 말했다.
“음! 나는 주색은 즐겼지만 잡기에는, 어떤 잡기던 근처에 가본 일이 없다. 민화투도 안쳤고 앞으로도 안친다. 주(酒)는 네가 막걸리만 잘 사주면 밖에서 마실 일이 없고 색(色)도 마찬가지지. 너처럼 예쁜 사람이 있는데 네가 미쳤냐? 밖에서 찾게. 내가 농사를 지으며 어른들을 보면서 또 싸돌아 다니면서 직접 체험하고 터득한 건, 남자나 여자나 배우자 하기 나름이더라. 태어날 때부터 바람기란 피를 물려 받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겠지만 대부분은 남편 하기 나름이란 걸 내가 몸소 터득을 했다. 그러니 그런 걱정일랑 말게나!”
정미경이 몸서리를 한번 치면서 삐뚜름하게 흘겨 보며 말했다.
“참 내! 아까 그 아저씨들과 똑 같이 말하냐? 우리 아버지가 같기도 하다 야!”
“당연하지! 아재들과 친구처럼 지내다 보니 내가 생각이 좀 깊다.”
“어릴 때부터 같이 다녔어? 술집에도?”
“당연하지.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같이 다녔다. 그래서 내가 세상 보는 식견이 넓지.”
“참! 대단하다. 대단해. 너희 집안에 문제가 굉장히 많은 것 같아. 전부 바람둥이지?”
김근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인정을 했다.
“결혼하고는 금연하듯이 다 끊었다. 금단 현상으로 고생하신 분도 없고.”
“그것도 자랑이라고…….”
한숨을 내쉬면서 타작을 끝낸 논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쌓여있는 볏단에서는 파릇하면서도 구수한 냄새가 몽골몽골 콧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문득 냄새가 이 놈과 비슷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영감이 따로 없었다. 달빛에 물든 노란 뺨이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정미경의 손바닥이 은연중에 김근수에 볼에 가 있었다. 김근수가 정미경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그러나 그 후에 있어야 할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개울과 논 사이의 작은 시골길을 무슨 고속도로나 되는 것처럼 승용차 한대가 빵빵거려 두 사람의 다음 행동을 방해해 버렸다. 김근수의 입도 한몫을 해버렸다.
“저 씹할 새끼 저거 미쳤나?”
김근수가 잽싸게 정미경의 옆구리를 감싸 안고 획 돌렸다. 자칫 잘못하면 부둥켜안고 언덕을 구를 뻔 한 순간이었다. 광속으로 질투하던 차가 두 사람을 보고 타이어 타는 냄새로 가을들녘을 오염시키며 고함을 내질렀다.
“야 이 촌 년 놈들아! 저 짚단 속에 가서 해라. 미친 새끼들!”
“저 개새끼가!”
웬만하면 고함만 지르고 갈 것이지 속도를 낮춰 창문을 열어 눈까지 마주쳤다. 그때 옆에 앉은 여자가 운전자를 다그치고 있었다. 그렇게 차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정미경도 김근수처럼 욕을 하지 못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면서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러나 김근수의 얼굴은 용광로 속에 있는 것처럼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붉은 불빛이 두 사람 앞으로 빠르게 오고 있었다. 흥분해서 차 꽁무니를 보던 김근수로 뒤로 돌아 설 정도로 눈을 부시게 하는 불빛을 실은 오토바이가 바로 앞까지 와서 멈췄다.
“야! 근수야! 그렇잖아도 네가 올 것 같아서 너희 집에 가던 길이다.”
“어! 성화야! 우리는 방금 끝냈다. 너는?”
“나도 방금 마치고 술 생각도 나고 너도 올 것 같아서 내려오던 길이지. 참! 인사해라. 형수 될 분이다.”
오토바이 뒤에서 고개를 내밀던 사람이 내려서 인사를 했다. 그때 김근수와 정미경이 동시에 놀라고 있었다. 낮에 봤던 다리를 절던 아가씨였다. 윤성화도 정미경을 자세히 보면서 놀라고 있었다. 정미경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안면이 있죠?”
김근수가 씁쓸히 웃으면서 정미경을 대신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