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남편은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예전보다 더 살갑게 대하며 애정을 드러냈다. 마치 석고대죄를 하듯이, 수 조원의 급여를 받으며 고용된 종업원처럼 언행을 조심하면서 극진히 대우해 주었다.

　어이가 없었던 애리는 굳이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무슨 이유로 그런 망언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남편처럼 똑같이 응해주면서 한번만 더 그런 말을 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단단히 다짐을 하고 눈감았다.

　분명히 천명구나 허병식과 술자리를 하면 또 저 병이 재발해 있지도 않은 허구로 꼬투리를 잡아 칭얼대겠지만 지금은 괜찮으니 참자. 두고 보자. 그렇게 애리를 마음을 단단히 다지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애리 자신이었다. 남편이 그 희한한 놈에 대해 말을 한 후부터 머리 속에는 귀신에 홀린 듯이 그 희한한 놈이 더욱더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마치 영혼이 점령된 것처럼 그 사람이 하루 종일 가게에 와서, 옆에 머물다가 밤이면 강변으로 데려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존재하지 않지만 뒤에서 항상 호외무사처럼 지켜주는 것 같은 환상이 떠오르기도 해, 가끔씩 주위를 둘러 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애리는 기절초풍을 하고 말았다. 믿기지 않는 장면이 앞으로 오고 있었다.

　남자가 다리를 다쳐 아내의 손을 잡고 퇴원을 하듯이 여자의 손에 잡혀 엉금엉금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는 강변의자에 앉아 눈물 콧물 흘리며 주책을 떨던 주두희이었고 손에 끌려오는 사람은 그녀의 남편 박영걸이었다.

　감방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언제 나왔지? 저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 어떻게 저렇게 다정한 사이가 되었나? 그 대답을 기다리듯 애리는 미동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이 다가올 때까지 얼어붙어 서 있었다.

　“어! 애리야! 운동 나왔어?”

　밝은 목소리에 밝은 미소였다. 믿어지지 않았다. 주두희를 권투용 샌드백으로 이용했던 박영걸이 아내를 귀한 보석처럼 여기고 있었다. 혹시라도 멀리 도망이라도 칠까 두려워, 서로 놓치지 않으려고, 둘이 똑같이 옆구리를 감싸 안고 보란 듯이 오고 있었다. 믿기지 않은 말도 들려 주었다.

　“누구?”

　박영걸은 애리를 아예 알아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박영걸이 주두희와 눈을 마주치며 어눌하지만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주두희에게 물었다. 주두희가 약간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박영걸의 팔을 잡아당겨 팔짱을 끼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내하고 죽마고우! 자기하고 애리 신랑하고도 엄청 친했어. 같이 밥도 먹고.”

　듣기 싫은 말 중에 하나로 자리를 잡고 있어서인지 반사적으로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곧바로 아무렇지 않게, 태연한 척 미소를 지으며 박영걸과 주두희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그때 그 행패의 벌로 기억 상실에 걸렸다는 소문을 벌써 들어서 그랬는지 위로의 표정도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단지 이 정도로 심각한가? 정도였다.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한 모습에 소름도 오싹 돋았다. 그렇게 도도하고 거만했던 박영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버려져 길거리를 전전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간신히 목숨을 건져 치료를 받은 어떤 동물의 눈처럼, 그의 눈이 측은함을 불러 일으킬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앙큼한 년! 여전해!”

　무심하게 가고 있는 애리 뒷모습을 보며 거의 광분의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어눌한 발음으로 박영걸이 물었다.

　“저년!”

　애리 귀에 들어갈 정도로 크게 말했다. 박영걸이 뒤돌아서 애리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을 보면, 애리를 보고 있는지, 지나치는 바람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초점을 잃은 흐리멍덩한 눈이었다. 기억이 되살아나고 발음도 온전해지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하필 그때 기억이 돌아온 뒤의 주두희의 미래가 걱정돼 주두희를 쳐다봤다. 전혀 불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세찬 풍파를 맞듯이 불행을 당한 저들은 예전에는 없던 다정다감한 부부로 변했는데 우리 부부는 왜 이럴까? 문제가 무엇일까? 내가 너무 애민했나? 남편도 감방에 보내버려? 헛웃음을 치면서 집으로 갔다.

　다음 날 아침에 문득 천명구가 떠올랐다. 남편이 무슨 말을 듣고 완치되지 못한 간질병 환자처럼 나를 또 의심을 하는가? 이유를 알고 싶었다. 더 이상 그러려니 했다가는 자신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세월에 맡겼다가 어떤 불상사가 닥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도 들어 천명구를 찾아갔다.

　주차장에 내려서 본 주상복합아파트는 어마어마했다. 지대가 놓은 데서 지은 건물이라 백 층은 돼 보였다. 저 꼭대기에 가면 넓은 도시가 한 눈에 보이지 않을까? 옥상에 가면 볼 수 있을까? 어떻게 가지? 아파트처럼 옥상 문을 잠그지나 않았을까?

　천명구를 만나는 것보다 순식간에 발동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싶은 충동이 소애리의 발걸음을 엘리베이터로 끌고 갔다. 공짜라는 말에 솔깃해서 여기나 다름없는 이 근처에 온 게 원인이 돼 다시 온 소애리여사. 또 충동에 솔깃해 옆길로 새고 있었다.

　일단은 최고 층까지 올라갔지만 사각상자에 갇힌 기분이었다. 조심조심 두근두근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까짓 것 잠겼으면 그냥 내려가지 뭐! 가슴 졸이며 여기까지 왔는데 시도는 왜 봐야지.

　최정상에 올랐다. 문고리만 돌리면 된다. 신혼여행간 첫날밤보다 더 떨렸다. 그때처럼 오줌도 찔끔 나오려고 했다. 더 이상 긴장했다가는 바지에 실례를 할 것만 같아 과감히 문고리를 획 돌렸다. 갑자기 눈이 부셨다. 희망의 빛처럼 보였다. 한쪽 팔을 쳐들어 강렬한 빛을 가리고 얼굴만 쏙 밖으로 내밀었다. 하늘밖에 없었다. 한쪽 발이 문지방을 넘어갔다.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얼른 문을 닫고 일단은 정해둔 목적지인 도시를 향해 달렸다.

　“에계계! 이게 뭐야!”

　하늘이 보이 것과 실망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씨! 아니 이 높은 옥상에 도둑 놈 올 일이 뭐 있다고 담벼락을 쳐 뒀어?”

　이해가 되지 않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현장 점검하는 건물 관리자처럼 뒤짐을 지고 한 바퀴 빙 돌다가 오기가 발동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내 기어이 이 도시를 보고 가야겠다. 일단은 가장 넓은 시가지로 방향을 돌렸다.

　담벼락에 몸을 바짝 붙어 꼭대기를 붙잡으려고 엄지 발가락만 빼고 전신을 공중부양 시켰다. 꼭대기가 잡힐 똥 말 똥. 기력도 많이 떨어질 때도 됐지만 소애리의 충동에 의지력이 힘까지 보태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서 씩씩대는 동안 이마에 땀도 줄줄 흐르고 있을 때였다.

　“고지가 바로 저기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하나 둘! 어 싸!”

　주문까지 소리를 내 읊으며 애리가 사투를 벌일 때 검정 정장에 넥타이까지 맨 건장한 남정네 두 사람이 옥상 문이 열려 있는 걸 보고 한 사람이 한심한 듯이 말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