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근은 어떠한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의심만 할 뿐이었지 아내가 주두희와 어울려 다니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불륜이나 경망스러운 짓을 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었고, 있다 손치더라도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마음의 준비가 아닌 용기가 나지 않은 상태였다.
절대 그런 추한 일은 아내에게 일어나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지만, 골프를 치는 중년이던 아니던 일부의 여자들은 부장의 마누라처럼 불륜을 저지르는 일이 사실이 되어 술집 안주거리로 올려졌고, 방금 전에 주두희가 하는 짓도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버린다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런 짓은 남자들이 여자 접대부가 있는 술집에 가서 2차로 여자들과 잠자리를 하고 난 뒤에, 술에 취해서, 분위기에 휩쓸려서 갔다는 말이나,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아내에게 들키지 않았지만 그런 짓을 한적이 많았기 때문에 한번 의심한 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은 탓도 있었다.
당연히 좋은 시선이 애리에게 갈 수가 없었다. 경멸하는 듯한 눈과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한숨을 고스란히 받은 애리의 기분도 좋을 리는 없었다.
‘이 한숨은 또 뭐야?’
이런 식의 무시가 섞인 냉대하는 이유를 오늘은 반드시 알아야겠다. 마음을 굳세게 먹고 주먹에 힘도 불끈 쥐었다. 남편이 남자던 여자던 자신과 동등한 성(性)을 가졌다면 이런 식으로 주먹에 힘은 주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그냥! 검지 손가락만 남편 눈 앞에 갖다 두고, ‘야 임마! 너 요즘 나한테 왜 이래? 불만이 뭐야? 사내 자식이 조잔하게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불만 있으면 말을 해. 자식아!’ 이렇게 말하며 ‘이리 와봐.’하면서 손가락만 까닥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비겁하게, 눈을 슬쩍 흘겨 보며 스쳐갔다. 그 순간! 그 눈빛 하나로 상해버린 자존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발악할 지경으로 데려갈 의도가 분명했다. 그러나 잠시 눈알을 부라린 사이 남편은 방바닥에 콕 꼬꾸라져 코를 골고 있었다. 술 취해 나자빠진 놈과 무슨 대화를 할 수 있으리.
이빨만 바드득 가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내일은 반드시 물어보기로 했지만 어느덧 한 달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 가버렸다. 남편과의 어색하고 소연한 관계가 시작된 시점이 그때 스크린 골프를 친 날 이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불길한 기류가 엄습해오는 중이란 느낌을 받았지만 두희에게 무엇이던 물어보는 건 내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이상하게도 두희가 찾아오는 건 둘째치고 전화도 오지 않았다. 분명이 무슨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전화를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주두희가 주선해 그 별 희한한 놈을 만나는 날부터가 이런 불신이 시작된 건 확실했다. 그러면 두희가 남편을 우연찮게 만났다가 주둥이를 잘못 놀린 게 아닌가? 충분히 그럴 위인이기 때문에 애리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름은 그날 밝히지 않아서 당연히 모르지만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외 나무 다리에서 만나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인데 간혹 그 사람이 마음을 복잡하게 한 건 사실이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자존심이 엄청 상했지만 그래도 문득문득 떠올릴 땐 봄 바람이 콧등을 스치는 듯 설레기도 했다. 어떤 땐 눈을 감고 얼굴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는 건 확실했다. 그런데 그는 텅 빈 머리 속 어딘가를 떠돌기도 하고 때론 꽉 찰 정도로 정신을 점령한 상태로 남아 있기도 했다. 마치 뜨겁게 사랑하다가 떠나버린 사람 같기도 했다.
어떤 때는 전화를 하면 금방이라도 달려 올 것 같은, 언제나 근처에 있는, 다정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얼굴은 어렴풋이 떠오르지만 그 얼굴이 그 사람의 실제 얼굴인지 아니면 좋아했던 연예인의 얼굴을 덧붙여 상상해 낸 얼굴인지 그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때는 화가 났다. 마치 남편이 주두희나 주두희 남편처럼 바람이 나서 다른 년과 희희낙락거리고 있지 않나? 그런 엉뚱한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언제가 주두희가 하소연한 말도 떠올랐다. 사귀던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가고 나니 남편이 바람을 날 때보다 자존심이 더 많이 상했다고 했다. 애리는 지금 그보다 훨씬 심한 더러운 기분 속에서 빠진 상태였다. 그 놈은 간택할 기회도, 간택 받을 기회도, 주지 않은 놈이었다. 그렇다고 그날 남자를 사귀기 위해 간 자리도 아니었다. 단지 골프만 치러 간 자리였는데, 이상하게 이런 생각으로 빠져 들어버린 것도 어이가 없었다. 그 놈이 혹시나 주두희나 두희 남편처럼 다른 여자를 만나 싸돌아 다니지는 않을까? 혹시라도 길에서 마주치면 어쩌나? 이런 어처구니 없는 걱정도 하고 있었다.
이런 더러운 기분을 가지게 해 준 놈이었지만 생각할수록 설레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런 설레는 기분만 빼고 나머지 기분은 남편에게 받고 있는 기분과 똑 같았다. 남편이 무슨 이유로 나를 멀리 하려고 하는지 강력하게 따지며 물어보지 못하는 이유도 이런 설레는 기분 때문이었다. 마음속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 같은 찌꺼기처럼 그 사람에게 무슨 미련이 남아 있나?
혼자 외도할 상대로 설정하고 외도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혹시 나도 주두희처럼 외도하는 걸 바랬나?
자조하는 순간에 헛웃음이 툭 하고 나왔다.
그런 허튼 생각에 빠져 들자 남편이 늘 옆에 있는데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늘하게 쳐다보던 시선에서 화가 나서 가슴이 뜨겁게 이글거렸지만, 지금은 그런 시선도 사라져버려 오히려 그립기도 했다. 길을 걸을 때 혹시나 부딪힐 까 싶어 피해 주는 사람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살아 있는 사람이 맞는가?
진열된 이 옷 저 옷을 입어 보면서 이리저리 살펴보기도 했다. 옷과 몸은 잘 어울렸지만 정작 자신이 마네킹 같다는 느낌만 들었지, 살아서 숨쉬고 움직이는 인간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에는 종종 놀러 오는 아낙들이 걱정스럽게 물어보기도 했다. 무슨 이유로 우울한지 묻기도 하고 갱년기가 벌써 왔냐며 동병상련을 느끼는 것처럼 이런 저런 말로 정신과 의사가 되기도 했지만 애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입 싼 아낙들에게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자신뿐만 아니라 남편도 바람이 난 사람으로 오보가 퍼트려지는 건 순식간이기 때문이었다. 애리가 할 수 있는 건 빙긋이 웃으며 침묵하는 일밖에 없었고 그런 날이 길어지면서 아낙들도 서서히 사라지면서 그들의 빈자리엔 여러 가지 소문들이 바람을 타고 들어와 앉았다. 그 소문 중 우스운 건 남편이 바람이 난 것과 애리가 돈을 좀 벌어 거만해졌다는 오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