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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홍귀
작가 : 연수희
작품등록일 : 2018.12.31

‘홍귀’라고 들어봤는가? 사람의 붉은 피를 거죽처럼 몸에 흠뻑 뒤집어쓰고 다닌다 하여 붙여진 어느 악귀의 이름이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자 붉은 악귀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붉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악귀의 모습을 두고 ‘홍귀(紅鬼, 붉은 악귀)’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게 바로 붉은 악귀, ‘홍귀’다.

500년 만에 다시 세상 밖에 나온 홍귀, 홍귀를 쫓는 여인 연.

복수를 꿈꾸는 여자와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

 
21. 가짜신부
작성일 : 19-01-14 03:27     조회 : 251     추천 : 0     분량 : 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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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리, 손에 피 묻었어요.”

 

  그녀가 그렇게 말할 때까지 그는 자신의 손이 붉은 피로 젖어있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깨닫자마자 즉시 뒷목이 욱신거렸다.

 

  또 자기도 모르는 새 무의식적으로 뒷목을 잡아 뜯은 것이다. 뒷목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붉은 피가 뒷목을 타고 의복 속으로 흘러들어가 그의 몸을 껴안듯이 감쌌다.

 

  뜨겁고 질척거린다.

 

  “제가 말했죠? 눈칫밥 하나는 아주 많이 먹었다고. 제가 저의 소중한 사람에 대해 말할 때마다 나리가 뒷목을 잡아 뜯듯이 만지더라고요. 피가 그렇게 많이 날 만큼.”

 

  그녀는 침착했지만 아주 많이 화가 나 있었다. 그가 허락도 없이 그녀의 마음을 들추어서 그런 것이리라.

 

  막 만났을 뿐인 그녀의 마음을, 그가 이토록 간단히 들추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사람의 마음은 다 똑같으니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뿐이니까.

 

  머리를 단단히 동여맨 머릿수건이 살짝 풀려 그 안에 꽁꽁 숨겨진 그녀의 연갈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와 함께 고운 얼굴이 드러났다.

 

  고단한 노동 때문에 피곤이 껴있었지만 햇빛에 그슬린 그 낯이 무척이나 말끔하고, 입술과 콧방울은 그녀의 자그마한 얼굴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무엇보다 눈.

 

  그를 노려보는 두 눈동자가 그녀의 머리카락과 같이 연한 갈색 빛이었는데, 본디 태어났을 적부터 햇빛을 머금은 것처럼 찬란했다.

 

  그녀의 품에서는 바람이나 산, 강에서 날 법한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향이 났다. 깊이 들이마실수록 마음이 그녀에게 더욱 머물러지고 싶어지는 그런 향이었다. 코를 찌르는 귀족여성들의 인조적인 향수냄새 따위는 비할 바가 못 됐다.

 

  누구든 그녀를 사랑스럽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것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 것은 ‘청안’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청안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지 않고, 대신 피에 흥건히 젖은 자신의 손만을 응시했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 끝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핏방울이 보석처럼 붉게 빛났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뒷목을 그리 세게 뜯어 피를 흘리다니, 어지간히 잊을 수 없는 상대인가 보군요. 참 안됐네요.”

 

  이윽고 쾅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는 마치 심장에 칼이라도 꽂힌 사람처럼 꼼짝을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홀로 서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그는 다시 그의 뒷목을 만졌다. 아까처럼 살점을 찢는 듯한 억센 손아귀가 아니라 조심히 어루만지는 손길이었다.

 

  철퍽, 핏물이 느껴졌다. 그 속에서 너덜너덜하게 깊게 파인 문양이 느껴졌다.

 

  그는 한참을 뒷목에 손을 얹은 채 있었다. 계속해서 찢겨진 상처에서 핏물이 흐르고 있었으나 이 상처는 금세 나아 다시 그의 신경을 건드릴 게 분명했다.

 

  그는 뒷목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피로 점철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피가 그의 얼굴로 옮겨갔다.

 

  손을 치우고 얼굴이 드러났을 때, 피로 물든 그의 얼굴이 검은 삿갓 아래에서 소름끼치도록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울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겠지만, 그 스스로도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

 

 

 

  값비싼 물건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사정없이 피부를 때렸다.

 

  하인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부복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 감히 고개를 들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저 날아오는 물건들을 무력하게 맞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마가 찢겨진 하인도 있지만 눈이 맞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도자기, 향수, 의복, 찻잔, 서책 등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고 부수다가 이내 지친 모양인지 힉힉 늙은 노인의 불규칙한 숨소리가 어둡고 화려한 방안에 울렸다.

 

  노인은 벌겋게 타오르는 두 눈으로 방안에 있는 하인들을 죽일 듯이 쭉 노려보았다.

 

  “…쓰, 쓸모없는 것들! 이 쓸모없는 것들!”

 

  손 태부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쿨럭 토해내는 숨과 함께 뒤로 발라당 넘어지듯이 비틀거렸다. 황급히 몸이 건장한 호위들이 그를 지탱해 의자에 앉혔고, 눈치 빠른 하녀가 따뜻한 차를 대령했다.

 

  하지만 손 태부는 그 차를 마시지 못했다.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은 채 몸을 둥글게 말고 기침을 쏟아냈다.

 

  쿨럭이는 기침 끝에 무언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붉고 뜨거운 뭉텅이가 늙은 노인의 손에 잡혔다.

 

  그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망연히 그 자신의 손을 응시했다.

 

  방안이 싸늘하게 식었다. 모두가 경악했다.

 

  검붉은 피가 손 태부의 손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었다. 주름진 입술 끝에도 고약한 악취를 풍기는 핏물이 침과 함께 맺혀있었다.

 

  “태부어르신!”

 

  하인들이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지만 그는 그들을 모두 뿌리쳤다.

 

  비참함에 젖은 얼굴로 그가 피로 얼룩진 제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꽉 주먹 쥐었다.

 

  늙고 나약해져 검버섯이 그득히 피어오른 그의 주름진 손은 제 주먹을 꽉 쥐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힘없이 바들거렸다.

 

  한때는 유국의 힘과 권력,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자들을 밤마다 쥔 손이었다. 하지만 모두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는 퇴물이다.

 

  하녀가 조심스레 그의 얼굴에서 피를 닦아주고 그의 바싹 마른 입술에 다시 따뜻한 차를 대주었다. 그가 혀를 내밀어 뼈다귀를 핥는 개처럼 차를 홀짝였다.

 

  턱에 찻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노화가 입술의 근육도 사라지게 만든 모양이다. 이도 거의 없었다.

 

  차를 마신 뒤, 손 태부가 쩍 갈라진 목소리로 다시 노성을 질렀다.

 

  “쓸모없는 것들!”

 

  손 태부의 일갈에 호위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여태 홍귀의 그림자조차 밟지도 못해?”

 

  “…송구합니다, 태부어르신. 하지만 고정하십시오. 이제 고작 이틀 지났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한 호위에게 손 태부가 곧장 하녀의 손에서 찻잔을 빼앗아 집어던졌다.

 

  찻잔이 쨍그랑 머리에서 깨지고 뜨거운 차가 얼굴을 적시었다. 익숙한 듯 호위는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않은 채 묵묵히 예를 갖추었다. 호위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유오군, 그놈은 대체 뭘 하는 거야?! 홍귀에게서 살아 돌아온 유일한 인간이라더니 하등 도움이 안 되잖아! 여적 아무것도…!”

 

  손 태부가 다시 쿨럭쿨럭 기침을 토했다. 하녀가 얼른 그의 등을 쓸었다. 다른 하녀들은 다시 얼른 멀쩡한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르고 있었다.

 

  “내 몸은, 내 몸은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데!”

 

  호위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중 한 녀석이 변명하듯이 고했다.

 

  “그것이… 이상하게도 군 마마와 태부어르신께서 같이 있는 날밤엔 붉은 악귀가 절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붉은 악귀는 유오군 마마가 두려운 나머지 나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역시 유오군은 대단한ㅡ”

 

  “붉은 악귀가 유오군을 두려워해?”

 

  손 태부가 그 말을 비웃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일 밤마다 세 번째 신부에게로 향하던 그 요물이 유오군이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뜸한 게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보 같은 소리! 홍귀가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연유는 유오군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

 

  손 태부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왼쪽 손을 옷자락으로 감추었다. 마치 급소를 들킨 사람처럼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손 태부를 모두가 의아하다는 눈길로 쳐다보았으나 이내 시선을 내렸다. 또 찻잔이나 도자기가 얼굴에 날아올까 두려운 탓이었다.

 

  손 태부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침묵을 지키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세상에 다시 나온 홍귀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노린다….”

 

  “예?”

 

  “모두 다 나가라.”

 

  손 태부가 손을 내저었다. 호위, 하인들은 잠시간 서로를 쳐다보며 눈치를 살피다 냉큼 손 태부의 방에서 나갔다.

 

  넓은 방안에 홀로 남겨진 손 태부는 옷자락 속에 감춘 왼손을 다시 뺐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손을 아주 오랫동안 빤히 응시했다.

 

  손 태부의 눈동자가 몽롱해졌다.

 

  손 태부 자신은 붉은 악귀를 직접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세 번째 신부를 저택에 들인 순간부터 붉은 악귀를 보았다는 저택의 인간들이 속출했다.

 

  「홍귀! 홍귀입니다!」

 

  「밤중에 웬 붉은 것이 저택을 거닐고 있었어요!」

 

  「신부의 붉은… 붉은 혼례복을 입고 별채에….」

 

  그 많은 호위와 하녀, 그리고 몸종들! 모두 하나같이 진저리를 치며 붉은 악귀를 목격한 순간을 생생히 증언해 손 태부의 심장을 철렁하게 했다. 그리고 호위 하나가 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밤에 홍귀를 목격하고 심장이 멎어죽지 않았던가!

 

  귀신이 들끓는 집엔 망조가 들렸다. 즉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다.

 

  이 집안에서 가장 죽음에 가까운 존재는 손 태부 자신이었다.

 

  나라의 지존인 임금마저 두려움에 떨게 하는 능구렁이일지라도 손 태부 역시 한낱 인간이었기에 단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죽음이 두려웠다. 눈앞이 공포로 새까맣게 물들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너무나 많은 죄악을 저질렀다. 이복형제를 죽인 것이 그 시작이라고 사람들은 알고 있지만 사실 그의 첫 번째 살생은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평민출신의 글도 읽을 줄 모르던 무지하고 순박한 어미였다.

 

  ‘아니지, 내가 죽인 것이 아니야. 나는 그 여자를 내 어미라고도 여기지 않았고, 그 여자도 나를 새끼로 여기지 않았어. 늘 나를 두려워하고 끔찍하게 여겼다고.’

 

  그런 주제에 쓸데없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었어!

 

  손 태부는 일생동안 영원히 살 것처럼 굴었다. 그는 분명 그 스스로가 영원하다고 믿었다.

 

  권력, 집안, 재물, 여자, 그리고 사람.

 

  재물과 권력에 신물이 날 때면, 다리 없이 태어난 기이한 어린아이나 노비의 아내, 천한 무당 등 생김새나 본질이 특이한 인간들을 끌고 와 수집품처럼 모아놓고 갖고 놀았었다.

 

  그런 극악한 짓을 일삼았는데도 하늘은 손 태부를 벌하지 않았다.

 

  손 태부에게 수치를 당한 천한 무당 하나가 핏발이 선 눈으로 손 태부에게 예언을 하나 내리고 숨을 거두었다. 저주받은 조상의 후손이니 분명 조상의 죄까지 더해 네놈은 악귀에게 잡아먹히는 꼴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그러나 손 태부는 눈 하나 깜짝 안했다.

 

  손 태부는 자신이 하늘이라고 믿었다.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이렇게 늙어버리다니. 이렇게 보잘 것 없어지다니.

 

  아무리 씻어도 몸에서 냄새가 난다. 이가 많이 빠져 어린 하녀가 음식을 씹어 뱉어주지 않으면 삼키지를 못한다. 자신만만하던 외모는 파삭하게 메말라 추해졌다. 검은 머리카락은 윤기를 잃고 성성한 백발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그조차도 사라져 머리 곳곳이 듬성듬성해졌다.

 

  항상 안을 수 있었던 여자들은, 이제는 무력해진 자신을 밤마다 비웃는다.

 

  하늘은 없다고, 설령 있어도 자신만큼은 절대 건드리지 못한다고 코웃음을 치던 그 정복의 사나이는 어디로 가고 이렇게 두려움과 불안에 젖어 사는 늙은이만 남았단 말인가.

 

  홍귀가 저택에 나타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는 불현듯 아득히 젊은 옛날에 들었던 그 천한 무당의 예언이 떠올랐다.

 

  「산 사람을 이리도 모욕한 네놈도 결국 인간일 뿐이야! 악귀에게 산 채로 뜯어먹길 것이다!」

 

  사후는 어떤 곳일까. 현생이 너무나 달콤하고 풍족해 죽음의 세계가 덜컥 두려워졌다.

 

  죽음이 두렵고 증오스럽다.

 

  죽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아!

 

  손 가의 저택 안에 홍귀가 떠돈다는 소문이 돌자 그는 호위를 배로 늘리고 단 한시도 절대 혼자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항상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럴수록 그의 죽음이 더욱 재촉되는 듯했다.

 

  홍귀는 칼이나 활 따위로는 절대 죽일 수 없다. 지독한 역병을 퍼뜨리는 절대불멸의 존재인 것이다. 노화가 오지 않는 영원한 젊음의….

 

  그 순간 예리하고 충격적인 생각이 손 태부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래, 그거다!

 

  영원한 젊음. 절대불멸.

 

  손 태부는 즉각 손 씨 가문의 숨겨진 보물인 ‘그것’을 허겁지겁 찾았다.

 

  벽장 안에 숨겨둔 궤짝을 꺼내 항상 몸에 지니고 있는 열쇠로 뚜껑을 여니, 다 낡은 서책과 자그마한 상자 하나가 그 안에 있었다.

 

  서책은 손 가의 선조의 일기였고, 상자는 홍귀를 500년간 봉인했다고 알려진 ‘구배’의 보물이었다.

 

  손 태부는 작은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이 있는 한 홍귀는 나를 절대 건드리지 못해….’

 

  손 태부는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남자의 손가락에는 너무 작아 그는 보물을 새끼손가락에 끼었다.

 

  손 태부는 그것을 마치 자신의 연인인 양 쓰다듬었다. 그리고 입을 맞추었다.

 

  반짝거리고 영롱한 색을 뿜어내는 구배의 보물.

 

  손 가의 선조께서 구배로부터 훔쳐 손 씨 가문의 가주들이 대대손손 이것의 주인이 되었다. 특별한 돌을 깎아 만든 듯, 그것은 아주 부드러워 손가락을 감싸는 느낌이 아주 좋았다.

 

  그것을 몸에 지닌 덕분인지 붉은 혼례복을 걸친 악귀는 절대 자신이 있는 곳에는 다가오지 않았다. 마치 손 태부를 두려워하고 피하는 것처럼!

 

  구배의 보물이 내 곁에 있는 한, 그 대단한 붉은 악귀도 나를 절대 죽이지 못한다. 나를 두려워해. 역시 나는 영원해. 영원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진정한 영원을 얻기 위해선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홍귀의 피와 살은 영생을 준다. 그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유오군을 불러들였다. 방패만으로는 홍귀를 잡을 수 없다. 창이 필요하다.

 

  홍귀를 잡아 그 피와 살을 얻는 장면을 목격하고 싶어, 밤마다 구배의 보물을 몸에 지닌 채 아주 멀찍이서 보초를 서는 유오군을 훔쳐보았지만 그토록 바라던 홍귀는 절대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보물의 효력이 너무나 강력했던 탓일지도 모른다.

 

  속이 타들어갔다.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동안에도 자신의 몸은 썩어가고 있었다.

 

  잃어버린 황금은 다시 백성들의 곡기를 쥐어짜 얻어낼 수 있지만, 시간은 그 무슨 짓을 한들 되돌릴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손 태부가 입을 열었다. 노인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려졌다.

 

  “유오군의 노비 년이 꽤나 예쁘장한 얼굴이었지?”

 

  그 미소는 손 태부가 첫 살생을 저질렀을 때와 똑같은 미소였다.

 

  “아니지, 유오군의 노비 년이 아니라… 내 노비 년이지.”

 

  손 태부의 품에서 짤랑 열쇠꾸러미가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

 

 

 

  “잠깐 나 좀 보자.”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연은 뒤돌았다.

 

  연의 얼굴은 불 앞에서 오랫동안 쉴 새 없이 음식을 하느라 땀에 뒤덮여있었고 두 뺨 역시 몹시 붉었다.

 

  연을 부른 사람은 저택의 모든 부엌간을 책임지고 있는 웅이 할멈이었다.

 

  연은 얼른 헌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웅이 할멈 앞에 섰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잠깐 나 좀 따라와라.”

 

  “지금요? 아직 일이 남았는데….”

 

  연은 자신이 맡은 일감을 보았다. 점심밥상을 차리고 있던 중이었다.

 

  꼭두새벽에는 손을 호호 불며 두 손이 붉게 터지도록 얼음물 속에서 빨래를 했다. 그 후엔 복도를 쓸고 창을 닦으며 자신이 갈 수 있는 선 안까지 저택을 누볐다.

 

  여기저기 자연스럽게 기웃거리며 뭔가 얻을만한 정보가 있나 해서였다.

 

  아직까지 제대로 얻은 정보는 없었다. 연이 머무르는 곳은 세 번째 신부가 있는 별채에서 너무나 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비가 삼엄했다. 거의 손 태부의 방을 지키는 수준이었다.

 

  웅이 할멈이 쯧 혀를 찼다.

 

  “됐으니까 얼른 따라와라! 남은 일이야 그냥 여기 남은 다른 것들에게 시키면 그만 아니냐?”

 

  그러자 다른 하녀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연은 잠시 웅이 할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하녀들에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하녀들은 부루퉁해진 얼굴로 연의 인사를 무시했다.

 

  대신 행주치마를 벗고 웅이 할멈의 뒤를 따라나서는 연의 등에 대고 “재수 없는 년, 창기랑 뭐가 달라?”라는 욕지걸이를 퉤 뱉어주었다.

 

  부엌간을 나오니 곧장 찬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뜨거운 아궁이 때문에 붉었던 얼굴이 금세 차갑게 식었다. 뼛속까지 한기가 서려 연은 옷을 안으로 힘껏 여며야만 했다.

 

  며칠 내내 끊임없이 내리던 비는 이제 드디어 멈추었으나, 방심하지 말라는 듯 회색하늘이 웅 하고 울고 있었다. 낮인데도 모든 게 흐리고 어두웠다.

 

  웅이 할멈을 따라 저택 안을 걷던 연은, 이윽고 점점 향해가는 방향이 어디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연이 그토록 정보를 얻고자 하던 곳이다.

 

  궁금하지만 바로 묻지 않고 인적이 드물어질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드디어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을 즈음, 조용한 말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손 태부 어르신입니까?”

 

  웅이 할멈이 웃었다.

 

  “썩을 년. 그러니까 네년을 다른 년들이 개똥보다 싫어하는 게다. 긴 설명 필요 없이 높으신 나리들의 맘을 그리 잘 아니, 그분들의 어여쁨을 한 몸에 받잖아. 손 태부 어르신, 유오군마마, 그리고 영호도련님까지.”

 

  “그냥 눈칫밥 많이 먹은 짬밥이에요.”

 

  “흥, 말은 잘해.”

 

  연은 잠시 찬바람 때문에 가팔라진 숨을 골랐다. 목구멍이 따가워 침도 몇 번 삼켜야만 했다. 눈에는 눈물방울이 맺혀 소매로 쓱 닦았다.

 

  “그래, 태부어르신께서 네년을 별채에 데려다 놓으라고 하셨다.”

 

  “별채에서 제가 할 일은 뭐죠? 세 번째 신부님의 수발인가요?”

 

  “뭐, 그런 거지.”

 

  웅이 할멈이 앞을 보고 걸으며 말했다. 늙은 나이에도 걸음걸이가 무척이나 빨랐다.

 

  “사실 이제부터 너는 가짜 신부가 되어야해.”

 

  연은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웅이 할멈도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연을 바라보았다. 할멈의 시선에 연을 향한 동정이 있었으나 그에 못지않게 단호함도 깃들어있었다.

 

  “홍귀가 세 번째 신부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은 너도 들어서 알고 있지? 귓구멍이 뚫려있다면야 모를 수가 없는 일이지.”

 

  “…….”

 

  “손 가의 씨는 아주 귀해. 영호도련님은 저리 허약하신데다 사내로서의 의무를… 다 못하고 계시고 태부어르신은 노쇠하셨으니, 사실 홍귀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이 저택의 대가 끊기는 일이야.”

 

  “아가씨가 있으시잖아요.”

 

  “멍청하긴! 계집애가 어떻게 가문을 이어? 다른 집안에 시집가면 그 시집간 가문의 씨를 주구장창 낳아대기만 할 텐데! 너는 곧잘 똘똘하게 굴다가도 꼭 그렇게 비탈길로 빠지는 말만 골라서 할 때가 있어. 으이구!”

 

  연은 대꾸 없이 웅이 할멈을 응시했다.

 

  “남자들 다 죽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세 번째 신부가 새로 아들을 낳아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손 씨의 직계는 끝인 거야. 손 씨 가문의 추잡한 방계출신들이 아주 침을 흘리며 이 집안의 문턱을 넘으려들 거라고.”

 

  “할멈은 이 집안의 혈연도 아니면서 왜 그리 손 씨 집안의 일에 목을 매세요?”

 

  “손 태부 태부어르신의 명령이니까.”

 

  마치 할멈은 하늘의 명령을 받잡기라도 하는 듯했다.

 

  “높으신 분들 심기가 어지러워지면 가장 먼저 죽어나가는 게 바로 우리들이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면 하라는 대로 입 꾹 다물고 해야 해. 그래야 천하게 태어난 이 목숨줄 하나만은 꿋꿋하게 지켜 나중에 저승에 제대로 가져가지.”

 

  할멈이 씩 미소 지었다. 당당하면서도 비굴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내가 이렇게 산 덕분에 이 저택 부엌간을 도맡는 것 아니겠냐.”

 

  할멈은 다시 별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연도 따라 걸었다.

 

  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여쭈었다.

 

  “그래서, 가짜신부라뇨?”

 

  “간단해. 밤마다 네가 세 번째 신부인 척! 하고 있으면 돼. 홍귀는 아름다운 여자를 골라서 잡아먹는다니까.”

 

  웅이 할멈은 킁 하고 코를 크게 들이마셨다. 찬바람이 웅이 할멈의 얼굴도 때렸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신부님은 부적을 덕지덕지 붙인 옷을 입고서 다른 곳에 숨어계실 거다.”

 

  “이 일을 군 마마께서도 아시는 일인가요?”

 

  “그럴 리가. 널 끔찍이 여기는 그 성정에 가만있으시겠어? 네가 세 번째 신부의 대타인 걸 안 순간 태부어르신께 바락바락 덤빌 게 뻔한데! 하여간 평소엔 순한 양처럼 얌전하시더니 너와 관련된 일이면 마치 다른 사람처럼 홱 무섭게 돌변한다니까….”

 

  연도 유오의 성정을 잘 알았다. 연이 이런 일을 맡았다는 것을 알면, 절대 유오는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유오는 누구보다 연이 안전하길 바라는 사람이다.

 

  “태부어르신이 그간 유오군마마를 많이 봐주신 건 너도 잘 알지? 왕족인데다 장차 사위가 되실 분이니까.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유오군마마라도 절대 태부어르신의 자비를 못 받을 게다.”

 

  마지막 말에 연은 수상쩍음을 느꼈다. 심장 한가운데에 스산한 기운 한줄기가 흘렀다.

 

  “…이번 일만큼? 그게 무슨 뜻이에요?”

 

  웅이 할멈이 다시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할멈은 고개를 돌려 연을 노려보다시피 보았다.

 

  “넌 몰라도 돼.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우리들이야. 이유 따위 알아선 안 돼. 그래야ㅡ”

 

  웅이 할멈은 연을 등지고 목적을 향해 걸었다.

 

  “그래야 명줄 오래 잡는 거야. 생각 없이 사는 게.”

 

 

 

 ***

 

 

 

  “예서 기다려.”

 

  웅이 할멈은 그렇게 말하고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별채가 저택에서 가장 소박한 크기의 거처라더니, 평민들의 집을 네 채 합친 것보다 더 크고 화려했다. 손 태부다웠다.

 

  “진짜 더럽게 크고 넓네….”

 

  연은 추운 겨울바람 속에서 별채를 지키고 서 있는 호위들을 힐끗 보았다. 그들은 모조리 낯이 새파랗게 질린 채로 어딘지 모를 아주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귀신에게 생기라도 빼앗긴 듯했다.

 

  하긴 멀쩡한 게 더 이상한 일이다. 붉은 악귀가 노리는 이곳을 매일 밤마다 지키고 있는데.

 

  ‘붉은 악귀….’

 

  연의 눈동자가 첨예하게 변했다.

 

  이틀 전에 내가 보았던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붉은 혼례복을 입고 천천히 저택 안을 걷던 그것.

 

  「여기… 나가… 당장.」

 

  마치 나를 도망치게 하려는 것 같았어.

 

  대체 무엇으로부터?

 

  「나 얼마 못 살 거야.」

 

  귀신에게 저주라도 받은 듯 검게 썩은 영호의 피부가 떠올랐다.

 

  「…내가 갑자기 왜 구배의 이야기를 꺼냈느냐면, 우리 집안의 죄는 아주 먼 옛날 어느 선조님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야. 손 가의 선조님이 500년 전 구배의 보물을 훔쳤대.」

 

  구배의 보물은 대체 뭘까. 혹시 홍귀의 약점이라도 되는 걸까?

 

  그 생각이 들자 입안에 침이 고이고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손 태부의 방에 쳐들어가 그 보물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갖고 싶었다.

 

  하지만 철통같은 호위들이 짝 깔린 손 태부의 방안을 내가 무슨 수로 들어가지? 들켰다간 나는 둘째 치고 유오마저 위험해진다.

 

  “대체 이 저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대체 뭐가 숨겨져 있는 거지?”

 

  “안녕.”

 

  느닷없는 인사에 상념이 뚝 끊어졌다. 연은 황급히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그림자가 연의 몸을 덮고 있었다.

 

  그가 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검은 삿갓을 쓰고 있었다.

 

  “나 만나러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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