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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홍귀
작가 : 연수희
작품등록일 : 2018.12.31

‘홍귀’라고 들어봤는가? 사람의 붉은 피를 거죽처럼 몸에 흠뻑 뒤집어쓰고 다닌다 하여 붙여진 어느 악귀의 이름이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자 붉은 악귀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붉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악귀의 모습을 두고 ‘홍귀(紅鬼, 붉은 악귀)’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게 바로 붉은 악귀, ‘홍귀’다.

500년 만에 다시 세상 밖에 나온 홍귀, 홍귀를 쫓는 여인 연.

복수를 꿈꾸는 여자와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

 
20. 소중하다는 것
작성일 : 18-12-31 21:11     조회 : 248     추천 : 0     분량 : 9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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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어떻게 생겼더라.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너무 답답해서 내 심장을 뜯어내고 싶을 정도야. 그를 떠올리고 싶어.

 

  아주 선명하게.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오르는 봄의 계절엔 꽃이 만발한 풍경 속에서 그의 모습이 어떨까 생각하고,

 

  뼈가 녹을 정도의 폭염이 이는 여름에는 저 혼자 멀쩡히 선선하게 서 있을 것만 같은 그의 모습을 생각하고,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가을의 계절엔 수확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농부들 사이로 가을의 탄생을 무심하게 응시하고 있을 그의 모습을 생각해.

 

  살이 에일 정도로 추운 겨울, 꽁꽁 언 물에 손을 넣고 빨래를 주무르다가 왠지 얼음물에 그가 비쳐 보일 것만 같아서 얼굴을 길게 쭉 빼었지. 그러다가 그만 강에 풍덩 빠져 고뿔에 심하게 걸리고 말았어.

 

  죽을 정도의 고열을 앓으면서도 당신 생각을 멈추지 않았어. 멈출 수가 없었던 거야.

 

  그의 생각을 멈추고 이제 그만 잊고 싶은데, 그게 안 돼.

 

  자꾸 그가 어떨까 생각해.

 

  살아가는 나의 시간 속에서 그가 불쑥불쑥 나타나 내 시간을 멈추게 해.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가 되어버려.

 

  선명한 것은 오로지 그의 목소리뿐인데, 목소리만으로 그를 찾을 수는 없잖아.

 

  그가 나를 망가뜨렸어. 내 인생을 붉은 피 웅덩이 속에 처박고 유유히 멀리 떠나갔어.

 

  나는 사랑하는 부모와 내 어린 시절을 잃고 죄책감에 허덕이며 뜨는 해를 원망해.

 

  그날 이후로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가는 세상에 질려버렸어. 그리고 난 항상 두려움에 질려있어. 이유 모를 공포가 자꾸 내 목을 졸라. 무언가에 쫓기듯 항상 불안해.

 

  슬프게도 부모님의 얼굴마저 떠오르지 않아. 떠오른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는 얼굴을 하고 계실 거야. 너 때문에 우리가 죽었다고….

 

  하루하루가 그에게 지배당하는 것만 같아. 그는 내 곁에 없는데도.

 

  화가 나.

 

  평범하게 살고 싶어. 나도 제대로 편히 숨을 쉬어보고 싶어. 다른 사람들처럼 웃고 떠들며 살고 싶어.

 

  적어도 그의 소식만은 안 들리기를 원하는데, 자꾸만 그의 소식이 들리잖아.

 

  「이 저택에 홍귀가 있대.」

 

  부탁이니까 이제 그만 나를 괴롭혀. 내 머릿속에서 나가란 말이야. 나를 그만 헤집어놔. 당신 때문에 비가 오는 날마다 미치는 것도 싫어.

 

  아무래도 아직도 내가… 그를 증오하는 모양이야.

 

  미워서 견딜 수가 없어. 용서가 안 돼.

 

  대체 왜 그랬지? 왜 내게 그랬어? 내가 무얼 잘못했기에?

 

  나는 그저 나를 보고 보일락 말락 스치듯 미소 짓는 당신에게…….

 

  그를 다시 만나고 싶어.

 

  만나서 그가 날 망가뜨린 것처럼 나도 그를 망가뜨리고 싶어.

 

  그가 내 소중한 사람들을 죽였듯이, 나도 그의 소중한 것을 찾아내 산산이 조각낼 거야. 본래의 형태로 돌아갈 수 없게끔.

 

  당신은 어디에 있어, 홍귀?

 

 

 

 ***

 

 

 

  밝은 곳에서 본 남자의 모습은 무척이나 이질감이 넘쳐나 도무지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검은 삿갓에 가려진 그의 얼굴이, 그가 고개를 살짝살짝 비틀 때마다 드러났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연은 아득한 심연 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오싹했다.

 

  무심코 그와 거리를 두자 그가 팔짱을 낀 채 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차디찬 목소리가 검은 삿갓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리 겁먹지 않아도 돼. 단지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뿐이니까.”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 박힌 두 개의 까만 눈동자가 섬뜩하리만치 빛났다. 그는 겁내지 말라고 얘기했지만, 저 모습을 보고 겁내지 않을 인간이 대체 어디 있겠는가?

 

  그늘진 얼굴에서 온기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다짜고짜 칼날 같은 걸, 네 목에 날리지는 않아.”

 

  연은 입안을 꾹 물었다. 폭우가 내리치는 밤에 연이 그에게 칼날을 날린 것을 기억해두고 한 말임에 틀림없었다.

 

  「자, 떨어뜨린 네 것.」

 

  그가 직접 손에 쥐어준 서늘한 날의 감촉이 너무나 생생했다. 날을 본 유오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은 것도 선명했다.

 

  “…송구했습니다.”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꺼내느라 목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아팠다.

 

  “제가 사람을 착각했습니다.”

 

  그는 가만히 연의 말을 듣고 있었다. 당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볼 엄두가 나지 않아 연은 애꿎은 그의 발끝만 쳐다보았다. 허, 왠지 발가락도 차가울 것만 같은 남자다.

 

  “제가 찾는 누군가와 목소리가… 너무 똑같아서….”

 

  이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눈앞에 있는 이 검은 삿갓의 남자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신은 감히 사람의 흉내를 내기도 하며, 요사스러운 기운이 강할수록 산 자와 구분이 안 가기 때문이다.

 

  ‘…그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검은 삿갓의 남자는 오늘도 손 가의 청록색 호위복을 버젓이 입고 있었다. 만일 이 남자가 진짜 연이 찾고 있는 그 악귀라면 굳이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목소리?”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귀에 꽂혀 연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삿갓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어진 그의 이목구비가 얼핏 보였다. 조금 더 확실하게 보고 싶은데 그게 안 되었다. 문득 저 거추장스러운 삿갓을 벗겨내고 그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보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연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주먹을 꾹 세게 쥐었다.

 

  “보통은 얼굴을 보고 헷갈리지 않나? 그런데 목소리?”

 

  그는 자신을 죽일 뻔한 일에 대해선 시큰둥했으면서 연의 이야기엔 작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의 그런 반응에 연은 또 한 번 그에게서 기묘함을 느꼈다.

 

  “목소리만 듣고 곧장 죽이려고 달려들다니, 어지간히 잊을 수 없는 상대인가보군. 참 안 됐어.”

 

  그렇게 말하지만 왠지 그의 입이 웃고 있었다. 차가워 보이는 사람이 웃으니 섬뜩하다.

 

  “무슨 일로 절 찾으셨죠?”

 

  연은 본론을 물었다. 그의 웃는 얼굴이 보기 싫어 다시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피했다.

 

  “간밤의 일 때문이시라면 금전으로는 제가 사죄가 어려우나 대신 청소나 음식, 그리고 그 밖의 시키시는 일라면….”

 

  “너와 거래를 할까 해서 찾았어.”

 

  “예?”

 

  예상 밖의 말에 연이 다시 그를 보았다.

 

  노비 따위가 감히 눈을 맞추는 건 무척이나 결례인 일이나 남자는 전혀 화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가 턱을 들어 힘겹게 눈을 맞추자 살짝 허리를 낮춰주었다.

 

  태도로 보아 의식하지 않은 배려인 듯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했다.

 

  “거래…요?”

 

  “그래.”

 

  “무슨 거래요?”

 

  “이 저택 안에서 너를 해치려는 사람이 있어.”

 

  연은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너를 해치기 위해 흉계를 꾸미고 있더군. 그래서 말인데 네가 내 부탁을 들어주면 나도ㅡ”

 

  “영서 아가씨말인가요?”

 

  연이 대뜸 말하자 이번에는 그가 반대로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알고 있어?”

 

  “당연하죠. 물론 이 저택에 저를 달가워하는 사람은 없지만, 특히나 저를 불편하게 여기시는 분이 아가씨이시거든요.”

 

  하물며 이미 1년 전에 흉계를 꾸며 제 오라비인 영호가 연의 손에 먼지 나도록 흠씬 맞게 한 전적이 있다. 그 일로 연은 곤장 10대를 맞고 15일 동안 구금되어 있었다.

 

  유오가 없었다면 목이 댕강 잘리고 그 시신은 산짐승들의 밥이 되었을 터다.

 

  “그리고 저는 이 저택에 10년 넘게 드나들었습니다. 비록 노비라서 다닐 수 있는 곳이 제한되어 있지만, 눈칫밥을 많이 먹어서 저택의 어느 분이 저를 못마땅하게 여기시는지 정도는 꿰고 있습니다.”

 

  “흠.”

 

  “그런데 왜 나리께서 아가씨가 절 해칠 거라는 걸 알고 계시는 거죠? 이 저택의 호위로 오신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잖아요.”

 

  연의 눈에 의심이 가뜩 껴있었다.

 

  남자는 말없이 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왜냐면 나한테 너를 해쳐달라고 직접 명령했으니까.”

 

  연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이건 그녀마저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니, 직접은 아니군. 하인을 시켜 나를 불러냈으니.”

 

  “왜 아가씨가 나리한테?”

 

  “너와 내가 서로 정분이 났다고 해서.”

 

  “……예?”

 

  그 순간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있던 연의 얼굴이 멍청하게 얼이 나가버렸다. 그런데 이 남자는 마치 남의 일인 양 무감하게 얼토당토 않는 얘기들을 줄줄이 읊어대고 있었다.

 

  “어디 보자. 그래, 비가 오는 어두운 밤에 홀딱 젖은 침의차림의 네가 내 품에 폭 안겨서는 사랑을 간절하게 속삭이고, 나도 그런 너를 힘껏 껴안아 치덕치덕 정을 나누었다고….”

 

  “잠깐, 잠깐, 잠깐만요!”

 

  연의 피부에 오소소 닭살이 돋아났다.

 

  “누가, 누가 그런 개…아니, 헛소리를 퍼뜨린 거죠? 애당초 나리와 저는 연분은커녕 아예 초면이잖아요!”

 

  “낸들 아나. 이 저택은 기침만 해도 사람을 죽였다고 소문이 나는 곳인가 보지.”

 

  그의 말이 정확했다. 이곳은 그런 곳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소문이….”

 

  핫, 하고 연은 숨을 뱉었다. 짐작 가는 사람이 떠올랐다.

 

  “그 수염 난 호위가 헛소문을 퍼뜨렸구나….”

 

  연은 아득 이를 갈았다. 그는 말없이 연을 바라보다가 작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이미 갚아주었어.”

 

  “예?”

 

  “아냐, 아무것도. 그보다 그 흉계로부터 너를 보호해줄게. 복수도 해줄 수 있어.”

 

  그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연이 그냥 간단히 고개만 끄덕여도 당장에 영서 아가씨의 목을 으스러뜨릴 것만 같았다.

 

  혈관이 곤두선 그의 커다란 손이 연의 시야에 들어왔다.

 

  “대신 내 요구를 반드시 들어준다는 조건 하에. 어때, 나랑 거래할 마음이 들어?”

 

  연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무례인 것은 알지만 거래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어째서?”

 

  “상대가 아가씨인 걸 알았으니 어떻게 나올지는 대충 감이 잡힙니다. 그리고 저는 나리의 도움이 필요 없고, 솔직히 이제 막 만났을 뿐인 나리와 그 어떤 거래도 할 수가 없습니다. 송구하지만 다른 사람을 알아보십시오.”

 

  그가 비스듬하게 목을 기울여 연을 내려다보았다. 표정에 변화는 없었지만 못마땅해 하는 것 같았다.

 

  “만일 내가 그 아가씨의 명령을 거절한다면 아마 저택의 다른 사내에게 널 해할 것을 명령할 거야. 그럼 이렇게 상냥한 경고는 듣지도 못하고 누군지도 모를 상대에게 꼼짝 없이 당할 수가 있어.”

 

  그러나 연은 완고했다.

 

  “제 주인은 유오군마마이십니다. 그분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 됩니다.”

 

  “바보 같은 소리.”

 

  그의 표정이 무지막지하게 일그러졌다. 연은 본능적으로 그에게서 물러났다.

 

  깊은 한숨과 함께 그가 그의 뒷목을 잡아 뜯듯이 쓸었다.

 

  “나는 지금 네 의중을 묻고 있는 거잖아. 여기서 다른 사람 얘기가 왜 나와? 너는 네 생각도 말할 줄 몰라?”

 

  연은 움찔했다. 이 남자 제정신인가? 나는 노비잖아.

 

  “…나리, 대체 저에게 어떤 부탁을 하시려고 그런 거래를 제안하십니까?”

 

  “네가 내 거래에 응해준다고 하면 말할 거야.”

 

  “저는 천한 노비 년이니 그냥 저택의 다른 호위 사내들처럼 제게 강압적으로 굴면 그만 아닙니까?”

 

  “나는 깔끔하게 떨어지는 관계를 선호해. 누구에게도 빚을 지기도 싫고, 호의를 느끼는 것도 싫어. 네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나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할 거야. 그 어떤 감정의 찌꺼기도 안 남게.”

 

  뭐야, 이 남자…. 예전에 누구에게 크게 데인 적이라도 있는 걸까?

 

  “어떤 부탁인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거래를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어떤 부탁인지 알면 들어줄 거야?”

 

  “그건 아닌데요.”

 

  “뭐야, 이래나 저래나 안 듣는 건 똑같잖아.”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하필 저죠? 다른 이에게 하자고 하시면 되잖아요.”

 

  “왠지 너는 쉽게 안 죽을 것 같아서.”

 

  “…예에?”

 

  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고?

 

  “다짜고짜 칼을 날리지 않나, 각 잡힌 자세와 번뜩이는 눈도 여타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보였어. 무엇보다 나를 보자마자 겁에 질린 채로 공격을 날리는 사람은 드물거든. 배짱이 있어. 네 주인이라는 녀석은 처음에 나를 보고 굳어서는 멍청하게 아무것도 못하고 서 있기만 했거든.”

 

  “뭔….”

 

  “게다가 너는 성격도 왠지 고분고분하지 않은 게 성질머리를 건드리면 곧장 손이 나갈 것 같고.”

 

  지금 이 남자가 나 성격 더러워 보인다고 비꼬아 말하고 있는 건가?

 

  칭찬인지 욕인지 구분이 안 가는 그의 말속에 담긴 의미는 간단했다. 거래를 하자는 것이다.

 

  “쉽게 죽지 않고, 딱 떨어질 관계의 인간이 필요해.”

 

  그의 표정이 더욱더 차가워져만 갔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할 거야, 말 거야. 나와 거래를 한다면 지켜줄게.”

 

  그가 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힘주어 잡은 것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어깨 한쪽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에 닿자 뼈와 근의 기능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꼼짝할 수가 없다.

 

  삿갓 속 그의 눈동자가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지켜준다고? 지켜주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야. 도리어 고통이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상이다.

 

  “…역시 거절하겠습니다. 싫어요.”

 

  “…….”

 

  “놔주세요.”

 

  그가 두말없이 연의 어깨에서 손을 치웠다. 그리고 연의 마음이라도 읽은 것인지 그녀에게서 세 발자국 떨어져 거리를 두었다.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그럼….”

 

  “정말 나와 거래를 하지 않을 거야?”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어떤 일인지도 모르는 일에 끼어들 순 없어요. 그리고 저는 주인이 있다고 했잖아요.”

 

  “내가 너의 주인이면 내 말을 들을 거야?”

 

  그 순간 연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아니요, 절대.”

 

  그녀가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유오군마마가 제 주인이라 따르는 게 아닙니다.”

 

  “그럼?”

 

  “제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연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기분 탓일까. 그러자 그의 눈동자가 일순 떨렸던 것 같다. 동시에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꾹 억누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어 역시나 착각인 게 틀림없었다.

 

  “나리께서 그 어떤 말씀을 하신들, 제 결정은 확고합니다. 따르지 않겠습니다.”

 

  “왜 소중한데?”

 

  그가 황당한 질문을 했다.

 

  “예?”

 

  “왜 소중하냐고.”

 

  “갑자기 무슨….”

 

  “소중하다는 게 대체 뭔데?”

 

  갑자기 남자가 말꼬리를 잡기 시작했다. 놀리는 건가 싶어 그를 살펴보았지만 표정이 한없이 진지해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 남자, 진심으로 묻고 있잖아.

 

  “그게… 저랑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고.”

 

  “단순히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서? 그런 거라면 내가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너와 함께 해줄 수 있는데.”

 

  “가장 어려운 시기에 저를 버리지 않고 거두어줬고….”

 

  “내가 지금 흉계 속에 놓인 너를 구해주려고 하잖아. 나와 거래를 한다면 그 대가로 널 그리 대해주지.”

 

  “가족 같은 사람이고….”

 

  “같은 사람이지, 가족이 아니야. 하물며 진짜 가족이라고 해도 얼마든지 배신과 미움은 오갈 수 있어.”

 

  연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도저히 표정관리가 안 된다.

 

  “대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지금 절 놀리시나요? 아니, 그전에 왜 제가 나리와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거죠?”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래. 사람의 관계란 아무리 탄탄해도 결국 자기 이익에 손해가 가면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아슬아슬한 것이야. 아니, 아예 처음부터 관계라는 건 이익에서부터 시작되는 거라고. 그런 나약하고 불안한 관계를, 그 어떤 확실한 대가도 없이 단지 감정 하나만으로 버티겠다니…. 너무 어리석지 않아?”

 

  “제가 방금 소중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소중하다는 마음도 네 이익에 해가 간다면 금방 사그라질 거야.”

 

  그 말을 들은 순간, 연의 마음이 잠시 체한 것처럼 아릿했다. 그 찰나의 감정을 그가 눈치 챘다. 그가 또 그 자신의 뒷목을 세게 잡아 뜯으며 말을 이어갔다.

 

  “거봐, 내 말이 맞지.”

 

  그가 웃었다.

 

  “…시끄러워요.”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네 주인이 네게 잘해주는 것도 그만한 목적과 이익이 있기 때문이야.”

 

  「유오군은,」

 

  “기실 모든 관계의 근본은 이익이지. 목적이 있어.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 다정함으로 널 천천히 죽게 해. 왜냐면 그는 아주 이기적인 인간이거든.」

 

  “아닌 척하며 나를 대가없이 순수하게 위한다는 그 거짓이 너무 가증스럽고 역겹지 않아?”

 

  쾅!

 

  커다란 소리가 남자의 옆을 빠르게 스쳐 벽에 부딪혔다. 연이 발을 날려 벽을 세게 찬 것이다.

 

  얼마나 힘차게 발을 날렸는지 꼼꼼하게 묶은 그녀의 머릿수건이 살짝 느슨해져 그 속에 감춰진 연갈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아래로 스륵 흘러내릴 정도였다.

 

  삿갓의 남자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무감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연은 한쪽 발을 벽에 꽂은 그 채로 입을 열었다. 그가 그녀에게 갇힌 그 상태로 말이다.

 

  “당신, 꼬였군요.”

 

  그녀가 고개를 든다. 얼굴이 분노와 수치로 빨갛게 익어있었다. 당장이라도 삿갓의 남자를 바닥에 때려눕히고 싶은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과거에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하고 상처를 크게 입은 것 같은데.”

 

  그러자 남자의 얼굴이 살기 넘치도록 서늘해졌다. 연은 그에게 기죽지 않았다. 연도 그만큼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타인의 소중한 사람까지 당신을 배신한 그 사람처럼 여기면 안 되지. 뭘 안다고 함부로 떠들어?”

 

  “잘 알지, 아주.”

 

  “아니, 몰라. 모르니까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거야. 소중한 게 뭐냐고? 그런 간단한 것조차 모르다니.”

 

  연은 발을 내렸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허리를 곧추세우고 어깨를 폈다.

 

  천한 노비가 취해서는 안 될 자세지만, 연은 했다.

 

  “소중하다는 것은, 설사 내가 다칠지라도 계속 그 사람을 보듬어주고 싶은 거야.”

 

  그가 즉답했다.

 

  “멍청해.”

 

  “맞아, 멍청하죠. 근데 뭐 그게 나빠요? 그냥 내가 좋아서 잘해준다는데.”

 

  연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

 

  “당신 같이 무례한 사람에게 나는 그 어떤 것도 해주지 않을 거예요. 다른 사람을 찾아봐요. 나도 내 몸 하나쯤은 알아서 건사할 테니.”

 

  터벅터벅 힘차게 걸어간 그녀는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그대로 문을 열려던 찰나, 그녀가 고개를 꺾어 어깨너머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리, 손에 피 묻었어요.”

 

  그녀의 말에 그가 그의 손을 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그의 손에 피가 흠뻑 묻어있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그는 모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제가 말했죠? 눈칫밥 하나는 아주 많이 먹었다고. 제가 저의 소중한 사람에 대해 말할 때마다 나리가 뒷목을 잡아 뜯듯이 만지더라구요. 피가 그렇게 많이 날 만큼.”

 

  그녀의 연갈색 눈동자가 그를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입은 웃고 있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뒷목을 그리 세게 뜯어 피를 흘리다니, 어지간히 잊을 수 없는 상대인가 보군요. 참 안됐네요.”

 

  그가 그녀에게 내뱉은 말을 똑같이 되갚아주고 나서야 그녀는 문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연은 도망치듯이 걸었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재수 없는 자식.”

 

  연이 은밀히 느끼고 있던 관계의 허망함을, 그가 단 한 오라기의 내숭도 없이, 아주 거칠게 드러냈다. 열 받게도 그의 말에 크게 공감하고 말았다.

 

  「그 소중하다는 마음도 네 이익에 해가 간다면 금방 사그라질 거야.」

 

  유오가 소중하지만 자기 자신만큼은 아니었던 것이다.

 

  연은 그런 자신이 가증스럽고 역겨웠다. 유오가 날 위해 어떻게 살았는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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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불안과 긴장 2019 / 2 / 12 226 0 12407   
22 21. 가짜신부 2019 / 1 / 14 251 0 10817   
21 20. 소중하다는 것 2018 / 12 / 31 249 0 9264   
20 19. 그림 속 여자의 얼굴 2018 / 12 / 31 237 0 15181   
19 18. 각자의 계획 2018 / 12 / 31 226 0 7553   
18 17. 흥미 2018 / 12 / 31 235 0 9120   
17 16. 영서의 연서 2018 / 12 / 31 228 0 11181   
16 15. 검은 삿갓의 남자 2018 / 12 / 31 242 0 8891   
15 14. 유오의 근심 2018 / 12 / 31 239 0 10767   
14 13. 저택 속의 붉은 혼례복 2018 / 12 / 31 220 0 7479   
13 12. 도련님의 고백(2) 2018 / 12 / 31 241 0 12269   
12 11. 도련님의 고백(1) 2018 / 12 / 31 247 0 13596   
11 10. 숨겨진 본심 2018 / 12 / 31 250 0 11789   
10 9. 손 태부의 소원 2018 / 12 / 31 238 0 11149   
9 8. 유약한 도련님 2018 / 12 / 31 250 0 5968   
8 7. 영서아가씨(2) 2018 / 12 / 31 235 0 4989   
7 6. 영서아가씨(1) 2018 / 12 / 31 243 0 4957   
6 5. 빗속의 손님 2018 / 12 / 31 230 0 7150   
5 4. 그림자놀이(2) 2018 / 12 / 31 243 0 4261   
4 3. 그림자놀이(1) 2018 / 12 / 31 238 0 5406   
3 2. 그가 진심으로 웃을 때 2018 / 12 / 31 256 0 7807   
2 1. 저택의 소문 2018 / 12 / 31 249 0 15776   
1 서장 2018 / 12 / 31 405 0 1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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