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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홍귀
작가 : 연수희
작품등록일 : 2018.12.31

‘홍귀’라고 들어봤는가? 사람의 붉은 피를 거죽처럼 몸에 흠뻑 뒤집어쓰고 다닌다 하여 붙여진 어느 악귀의 이름이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자 붉은 악귀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붉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악귀의 모습을 두고 ‘홍귀(紅鬼, 붉은 악귀)’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게 바로 붉은 악귀, ‘홍귀’다.

500년 만에 다시 세상 밖에 나온 홍귀, 홍귀를 쫓는 여인 연.

복수를 꿈꾸는 여자와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

 
13. 저택 속의 붉은 혼례복
작성일 : 18-12-31 21:05     조회 : 219     추천 : 0     분량 : 7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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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퍽 하고 매서운 소리가 공간을 찢었다. 이윽고 몸체가 쿵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이 한심한 놈!”

 

  분노에 젖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바닥에 쓰러진 아들의 몸을 힘껏 짓눌렀다.

 

  영호는 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로 소리 없이 벌벌 떨었다. 일어나 아버지에게 대적할 꿈 따윈 꾸지도 못했다.

 

  이미 다 늙어 서는 것도 고작인 늙은이인데도 불구하고.

 

  다시 손 태부가 지팡이를 높이 쳐올렸다. 그의 지팡이 끝엔 붉은 피가 묻어있었다. 아들의 피였다.

 

  “아이고, 어르신! 도련님 이러다 죽습니다요!”

 

  영호의 몸종인 복용이 보다 못해 목숨을 걸고 나섰다. 그러자 노인의 미간에 무지막지한 주름이 잡혔다. 히익, 하고 복용은 겁에 질렸다.

 

  “감히 천것이!”

 

  손 태부가 눈짓하자 뒤에 일렬로 나란히 서 있던 손 태부의 부하 중 가장 몸집이 큰 사내가 앞으로 나와 복용의 하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복용은 비명도 못 지르고 저만치 날아가 벽에 쾅 부딪히고는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방구석에 얌전히 있으라 했더니 기어코 밖으로 기어 나와 그 노비 년에게 가? 네놈이 제정신이야!”

 

  손 태부가 아들에게 고함쳤다. 아들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커다란 발에 밟힌 아주 작은 개미처럼 여전히 바닥에 납작 처박혀있을 뿐이었다.

 

  “왜? 이번에도 그년 노비문서 훔쳐다 주려고 했느냐? 또 아비 방을 허락도 없이 뒤지려고 했어?!”

 

  숨이 모자란 지 손 태부에게서 힉힉 새된 호흡소리가 흘러나왔다. 손 태부가 비틀거리자 그의 부하가 얼른 의자를 대령했다. 그리고 눈치 빠르게도 하녀가 차 한 잔을 따라왔다.

 

  손 태부는 잠시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른 뒤에 차를 한 모금 마시었다. 꿀꺽, 삼키는 소리가 너무나 선명해서 소름이 끼쳤다.

 

  “그 노비 년이 보통이 아니기는 아닌가보구나. 생전 계집애에게 관심을 안 주던 너도 그렇고, 그 쌀쌀맞기 짝이 없는 유오군도 그렇고. 그년이 사내를 잘 꿰어 먹는구나.”

 

  아버지의 입에서 ‘연’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바닥에 얌전히 웅크리고 있던 영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가 황급히 고개를 들고 아비를 쳐다보았다.

 

  곧장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뱀이 옷 속에 파고들어 목을 조르는 듯했다.

 

  “품어는 봤느냐?”

 

  아버지의 그 웃음 섞인 질문에 영호는 자신의 머리에서 피가 후드득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사고회로가 정지되었다. 심장이 서늘해지다 못해 꽁꽁 얼어버렸다.

 

  「살려주세요.」

 

  여자의 울음소리.

 

  영호는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아버지에게 빌었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에 고인다.

 

  “자, 잘못했습니다, 아버님!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내게 맞을 동안엔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있던 네가 그년 얘기가 나오니 안색이 새파래져선 곧장 사죄를 하는구나.”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버님….”

 

  “고개를 들어라.”

 

  손 태부가 허리를 낮게 숙여 아들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짝 갖다 대었다.

 

  “왜? 너도 내가 그년을 어떻게 할까 두려우냐?”

 

  영호의 동공이 사정없이 떨렸다. 그것을 본 손 태부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도 숨이 모자라 곧바로 차를 마셔야했지만 늙은이의 얼굴에 즐거움이 그득했다.

 

  “내가 아주 제대로 된 것을 잡았어.”

 

  손 태부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호는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냥 혹시나 해서 웬 연갈색 계집아이를 잡아 내 노비로 삼았는데, 그것이 이리도 유용할 줄이야. 덕분에 유오군이 아주 순한 양처럼 내게 길들여졌지.”

 

  “아, 아버님….”

 

  “지금 참혹하게 일그러진 네 얼굴이 유오군의 그것과 아주 똑같구나.”

 

  손 태부가 팔걸이에 뒤꿈치를 걸치고 손에 턱을 괴었다. 비뚜름하게 기울어진 그 얼굴에서 탐욕과 쾌락이 넘쳐났다. 몸이 늙을 대로 늙었다지만 속은 여전히 손 태부였다.

 

  “그 노비 년이 너보다는 낫구나. 후계도 못 가지는 너보다!”

 

  손 태부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어 제 아들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버러지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는 지팡이를 잡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 또 한 번 아들을 내리칠 생각이었지만 기력이 부족해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네놈 패는 데에 힘을 다 쏟을 수야 없지. 내겐 더 큰 정사가 있으니….”

 

  그러자 영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까득, 손톱이 맞물려 부러지는 소리였다.

 

  “호오, 화가 났느냐, 아들아?”

 

  손 태부가 아들에게 물었다. 장성한 아들은 침묵했다.

 

  “네놈은 날 비난할 자격 없어.”

 

  손 태부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늙고 주름진 그의 눈에서 저열한 광기가 뿜어져 나왔다.

 

  “네가 못하는 일은 내가 대신해주는 거니까. 네놈이 멀쩡하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다.”

 

  “…….”

 

  “후계가 제대로 잉태될 때까지, 너는 이대로 계속 얌전하게 있어야 된다. 그것이 네 존재의 이유야. 그것 말곤 없어.”

 

  알겠느냐? 하고 묻는 아버지의 물음에 영호는 한참을 망설였다. 결국 또다시 모진 매질이 날아와 영호는 예,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내가 주기 전까진 가질 수 없다. 그 연갈색 노비 년도 마찬가지야.”

 

  이윽고 아버지가 부하들을 데리고 방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 아버지는 “별채에 있는 세 번째 신부의 몸을 살뜰히 챙겨라”는 명령을 하인들에게 남겼다.

 

  아버지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영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는 자신을 감싸다 하복부를 맞고 바닥에 쓰러진 복용에게로 절뚝절뚝 걸어갔다.

 

  “복용, 괜찮은가?”

 

  복용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으니 끙, 하고 앓는 소리와 함께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으으…. 도, 도련님. 송구합니다.”

 

  모시는 도련님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복용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복용의 입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영호는 밖에 있는 하인들을 불러 복용을 운신케 했다.

 

  하녀가 쭈뼛쭈뼛 다가와 영호에게 물었다.

 

  “저… 도련님, 도련님 머리 상처는….”

 

  아버지에게 맞은 곳. 피가 눈가를 덮어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영호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대충 알아서 할 것이니 그냥 두어라.”

 

  “아, 예에…. 저어.”

 

  또 할 말이 있는지 하녀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방을 치워도 될까요?”

 

  그 순간 영호가 고개를 아래로 홱 내려 하녀와 눈을 맞췄다. 하녀는 자라목이 되어 영호에게서 세발자국이나 멀리 떨어졌다.

 

  퀭하게 그늘진 영호의 병든 눈에서 엄청난 혐오감이 피어올랐기 때문이었다.

 

  “방은 치우지마라. 그냥 둬.”

 

  “아아, 예에….”

 

  하녀는 부리나케 영호 도련님의 방에서 빠져나와 제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하녀는 도련님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욕을 했다.

 

  “이상하지 않아? 왜 맨날 방을 깔끔하게 치우는 걸 저리 싫어하냐고!”

 

  “내 말이.”

 

  영호의 전각을 함께 치우는 다른 하녀가 옮다구나 맞장구를 쳤다. 영호 때문에 일이 이만저만 피곤한 게 아니다.

 

  “책을 반듯이 정리해놓으면 꼭 하나를 빼서 엉망으로 어지럽히고! 이부자리도 방금 전에 깔끔하게 다 정돈해두었는데 그걸 또 귀신 같이 알아채서는 마치 개가 날뛴 것처럼 침상을 엉망진창 개판으로 만들어놓고!”

 

  “그뿐이겠어? 그 비싼 비단옷도 항상 소매 끝부분이나 하단 쪽을 찢어놓고 구기는 바람에 의대를 담당하는 애들이 항상 손이 부르트도록 바느질을 해야만 하잖아. 전부 티 안 나게 꿰매야 되니까.”

 

  하녀가 입술을 비쭉였다.

 

  “아까도 내가 어지럽힌 방을 치워도 될까요? 라고 물었는데 날 죽일 듯이 노려보더라!”

 

  “으으, 그 눈빛 알아. 소름끼쳐!”

 

  “가끔 보면 큰 도련님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것 같아. 혹시 말이야…. 손 가의 저택 안에 떠돈다는 붉은 악귀가 혹시 도련님은 아닐까?”

 

  “뭐?”

 

  “아니, 그렇잖아. 저렇게 사람 같지 않은 기행이라니. 귀신에 쓰였거나 귀신 그 자체 아니야?”

 

  “듣고 보니….”

 

  모두가 은근히 수긍하는 눈치다.

 

  “귀신들은 더러운 것이잖아. 사특하다고. 어쩌면 그래서 깔끔한 걸 싫어하는 것일 수도….”

 

  그때 웬 늙은 여자의 목소리가 모두를 크게 꾸짖었다.

 

  “이것들이 지금 여기서 무슨 험한 말을 하는 거여!”

 

  “우, 웅이 할멈…!”

 

  하얗게 센 머리에 바싹 마른 할멈이 모두를 무섭게 째려보았다. 웅이 할멈은 손 씨 가문의 저택에서 가장 오랜 일한 천민노비였다.

 

  “허튼 소리 말고 빨리 일들이나 해! 괜히 혓바닥 잘못 놀렸다가 그 방정맞은 혀 썩둑 잘리지나 말고!”

 

  할멈의 호된 꾸지람에 모두가 허겁지겁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할멈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녀의 눈이 어두운 빗줄기에 갇힌 영호의 전각에 닿았다.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사람다운 분께 못하는 소리가 없어, 썩을 것들….”

 

  작게 웅얼거리는 할멈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혔다. 누구도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

 

 

 

  밤이 찾아왔다.

 

  연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어 계속 몸을 뒤척였다. 유오는 일이 바쁜 모양인지 하인을 보내 연의 식사안부를 대신 묻게 했다.

 

  “후….”

 

  잠시 옅었던 빗줄기가 밤이 되자 다시 거세게 쏟아졌다. 바닥을 세차게 두들기는 빗소리와 함께 영호의 제안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는 자신에게 이곳을 떠나라고 말하고 있다.

 

  유오를 버리고.

 

  「넌 홍귀를 만나고 싶어 하잖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맨발로 방안을 서성였다.

 

  손톱을 딱딱 깨물었다. 피 맛이 느껴질 정도로 살점을 뜯는데도 멈출 수가 없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진정할 수가 없어.

 

  떠나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무서워.

 

  유오는? 유오는 내가 없으면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어.

 

  유오는 손 태부를 혐오해. 그럼에도 그 늙은이 밑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건 나 때문이야. 내가 약점으로 잡혀있으니까. 어쩌면 영서 아가씨와의 약혼도 유오는 싫을지도….

 

  ‘그럼 내가 유오의 인생에서 사라져주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자신이 사라졌을 때의 유오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는 충격에 젖은 얼굴로 연을 잃어버린 것을 두려워했었다. 지금도 여유로운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사실 전전긍긍하며 연이 훌쩍 그를 두고 떠날까 초조해하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하다. 마음은 그 이상이다. 모든 게 얽히고설킨 느낌이었다.

 

  “목말라….”

 

  머리를 싸맨 끝에 나온 결과는 그저 갈증뿐이었다. 탁상 위에 놓인 주전자를 흔들었지만 텅 비어있었다.

 

  주전자를 든 채 신발을 신고 방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멈칫했다.

 

  「…어두운 밤엔 방밖으로 나오지 마.」

 

  영호의 경고가 머리를 스쳤다. 사람을 불러 볼까 했지만 천민노비 따위가 감히 사람을 부린다니, 말도 안 돼는 일이다. 이 늦은 시각이면 유오도 호위들과 함께 저택의 경호를 서고 있을 것이다.

 

  부엌간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그냥 빨리 다녀오는 정도이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 결국 주전자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허리끈 안에는 수호부를 넣어 챙겼다.

 

  쌀쌀한 비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가운데 연은 복도를 더듬더듬 따라 걸었다.

 

  웅장한 저택은 왠지 무서웠다. 저택을 거닐다가 몇몇의 호위들과 마주쳤지만 그들 모두 묘하게 긴장되고 창백한 얼굴들을 하고 있어 일순 그들이 귀신인 줄 알았다.

 

  비 오는 날의 어두운 밤, 홍귀에게 제 동료하나가 죽었다는 말을 믿고 저러는 것이리라.

 

  자기도 죽을까봐.

 

  유오는 오늘 어디서 경호를 서고 있을까. 그가 걱정된다.

 

  부엌간에 다다른 연은 목을 대강 축인 뒤, 가져온 주전자에도 물을 담았다. 그리고 다시 주전자를 안고 재빨리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저택이 너무 넓어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여기가 어디지? 올 때만 해도 잘 왔는데.

 

  벽에 붙은 화등잔의 빛을 따라 기억을 되짚어 조심조심 걸었지만 무수히 많은 방들 사이에서 자신의 방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빗소리가 신경을 서걱서걱 베어 속이 아프고 어지러웠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쓸데없이 집만 커서는…. 누가 지나가기라도 한다면 붙잡고 물을 텐데….”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휘둘러보는데, 어둠과 비 사이로 무언가가 느릿하게 걸어가고 있는 것이 시야에 잡혔다.

 

  사람이다 싶어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지만, 이내 모골이 송연해졌다.

 

  “……붉은색.”

 

  멍하니 중얼거렸다.

 

  붉은색이 복도 한가운데를 걷고 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가 이내 온통 붉은색으로 점철되었다. 주전자를 손에서 놓칠 뻔하였다.

 

  이 야심한 시간, 그것도 비가 쏟아지는 날에 저리 새빨간 의복을 입고 저택 안을 돌아다니는 게 과연 정상인가? 이 집안에서 저런 화려한 색을 입을 수 있는 자는 손 태부와 영서 아가씨뿐인데.

 

  너무 놀라 잠깐 멈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얘기하는데, 우리 집안의 저택에서 도는 그 붉은 악귀는 홍귀가 아니야.」

 

  그럼 뭔데? 저것의 정체가.

 

  주전자를 든 채 굳어있던 연은 그 붉은색이 모퉁이를 돌자 뒤늦게 제정신을 차렸다. 왠지 모르게 그것을 따라갔다.

 

  이상하다. 분명히 어린아이의 발걸음처럼 한없이 느릿한 걸음걸이였는데 생각보다 빨라 따라잡기가 힘들다.

 

  저게 대체 무엇일까? 홍귀가 아니면 저택에 나타난 붉은 악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지?

 

  사람일까, 귀신일까?

 

  ‘내가 괜한 호기심으로 위험한 일에 나서는 것은 아닐까? 유오에게 폐를 끼치면 어떡하지?’

 

  그 생각이 문득 강하게 들자 연은 걸음을 딱 멈추었다. 요동치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그래, 참아. 늘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감은 채 그리 주문을 외자 흥분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빨리 방으로 돌아가자. 여긴 손 태부의 집이야.’

 

  주전자를 꼭 안은 연은 몸을 빙글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 순간, 자신이 놓친 붉은색이 바로 코앞에 서 있었다.

 

  “헉…!”

 

  숨을 삼켰다. 전신이 충격에 젖었다. 반사적으로 빠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하마터면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시야를 지배한 붉은색은 새신부가 입을 화려한 혼례복이었고, 붉은 혼례복이 얼굴과 몸통전체를 오롯이 다 뒤덮고 있었다.

 

  뭐지? 어떻게 바로 내 뒤에? 분명 저 모퉁이를 돈 것을 내가 봤는데!

 

  “누, 누구세요?”

 

  떨리는 맘으로 물었다. 도망치라고 소리치는 본능과 저것의 정체를 알아내고자 하는 이성이 내면에서 쾅 맞부딪쳤다.

 

  붉은 혼례복을 입은 그것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눈코입이 보이지 않음에도 그것이 연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보이지 않는 시선이 섬뜩하다.

 

  “누구세요? 사람이죠?”

 

  다시 묻는 질문에 그것이 작게 대답했다. 그 순간 귓속에 찬물이 새어 들어오는 듯했다.

 

  “여기… 나가… 당장.”

 

  “네?”

 

  사람의 말소리라고 치기엔 뭔가 부자연스럽고 괴이하다. 연은 머뭇대다가 두근거리는 맘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탁, 붉은 혼례복을 잡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아…!”

 

  그 다음 순간, 연은 주전자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그 자리서 도망쳤다.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렸다.

 

  어느새 복도를 벗어나 어둠과 빗속에 몸을 떨어뜨리고 말았지만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빠르게 가르는 바람소리가 귀를 때렸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얇은 침의를 전부 적시었다. 스스로가 어디로 뛰는지조차도 몰랐다.

 

  붉은 혼례복 속엔, 사람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붉은 천이 아래로 툭 힘없이 떨어질 뿐이었다.

 

  쿵!

 

  “아!”

 

  빠르게 달리던 연은 딱딱한 무언가와 몸이 부딪히고 그만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헐떡거리며 바닥을 짚었다.

 

  그런데 머리 위에서 어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뭐야.”

 

  퍼덕거리는 연의 몸짓이 뚝 멎었다.

 

  빗소리가 사방에서 울리는 가운데, 어둠속에서 들린 남자의 목소리가 너무나 선명했고 낯설지 않았다.

 

  그 낮고 음산한 목소리.

 

  천천히 시선을 든다.

 

  그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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