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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홍귀
작가 : 연수희
작품등록일 : 2018.12.31

‘홍귀’라고 들어봤는가? 사람의 붉은 피를 거죽처럼 몸에 흠뻑 뒤집어쓰고 다닌다 하여 붙여진 어느 악귀의 이름이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자 붉은 악귀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붉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악귀의 모습을 두고 ‘홍귀(紅鬼, 붉은 악귀)’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게 바로 붉은 악귀, ‘홍귀’다.

500년 만에 다시 세상 밖에 나온 홍귀, 홍귀를 쫓는 여인 연.

복수를 꿈꾸는 여자와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

 
9. 손 태부의 소원
작성일 : 18-12-31 21:00     조회 : 238     추천 : 0     분량 : 1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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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귀의 피와 살은 영생을 준다죠.”

 

  이 영감, 미쳤군.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지만 유오의 내면에 혐오감이 술렁였다.

 

  영서는 경악했다.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기는 했지만 심장이 공포에 질렸다. 손발이 발발 떨린다.

 

  유오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손 태부가 말했다.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거 압니다. 하지만 저 역시 사람입니다.”

 

  손 태부가 눈을 내리깔았다.

 

  “영원할 것 같던 제 젊음은 이제 아예 바닥이 났고 갈수록 몸은 무거워지기만 합니다. 이대로 잠들면 영영 눈을 뜨지 못할 것만 같은 어두운 밤이 끝없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손 태부가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늙은 노인의 손에 주름과 검버섯이 더덕더덕 붙어있었다. 절대 권력인 그도 결국엔 사람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 누구도 ‘노화’와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다.

 

  아비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 영서는 당혹스러웠다.

 

  세월에 갇힌 노인네가 중얼중얼 말을 이어갔다.

 

  “우리 집안은 대단합니다. 아주 대단하지요. 손 씨 가문이 나고, 내가 곧 손 씨 가문입니다. 6부에 해당되는 모든 부서에 우리 가문의 사람이 아닌 이가 없으며, 왕실에도 우리 집안의 여자를 보낸 적이 허다합니다. 왕족에도 우리 가문의 피가 흐른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유오군에게도 영서를 약혼자로 심어두었다. 영호의 혼례가 끝나고 나면 지체 없이 곧바로 유오와 영서의 혼례를 치룰 것이다.

 

  그는 잠시 바로 옆에 앉아있는 영서를 보았다. 곧바로 영서와 눈이 마주쳤지만 영서는 허둥지둥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런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다시 손 태부를 보았다.

 

  영서와의 약혼은 연줄하나 없는, 심지어 생모와 외가가 멸문지화를 당한 그가 이 유국의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맺은 하나의 거래에 지나지 않았다. 또 그는 책임지고픈 귀한 사람이 있었다.

 

  연.

 

  …영서에겐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집안도 제가 죽으면 분명 기울고 말 것입니다.”

 

  손 태부가 얼굴을 감싸고 있던 양손을 풀었다. 그러자 죽음을 두려워하던 나약한 노인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권력자의 음험한 얼굴이 나타났다.

 

  영서가 숨을 삼키고 몸을 뒤로 젖혔다. 그러다 그만 의자에서 넘어질 뻔했다. 유오가 얼른 그녀의 어깨를 잡아 의자에 안전하게 앉혀주었다.

 

  영서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의 손이 몸에 닿았다. 아까처럼 고맙습니다, 라는 속삭임도 나오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제가 죽으면 분명 이 집안은 위태로울 겁니다! 사방이 적이고 첩자이며 함정뿐입니다!”

 

  노인이 소리쳤다.

 

  “태부,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진정하십시오.”

 

  진정하라는 유오의 말에 손 태부가 얼굴을 구겼다.

 

  “아니, 다 적입니다. 이 세상을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방도는 오직 하나, 아무도 믿지 않는 겁니다.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자가 실은 내 원수일수도 있듯이!”

 

  당신이 그렇게 아무도 믿지 못하고 주변을 불신하는 까닭은 당신이 그런 인생만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오는 굳이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말해주어도 깨닫지 못할 인간이다.

 

  “나를 이을 후계자가 굳건했으면 그나마 덜 불안하려만, 영호 그 녀석은….”

 

  영호를 입에 담자 손 태부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놈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못 견디게 싫은 모양이었다.

 

  약하기 짝이 없는 놈. 후계도 못 낳고!

 

  닭장의 닭들도 알을 낳을 줄은 아는데, 그놈은 그런 것조차 못하는 것이다.

 

  아니, 안 하는 것인가?

 

  아들놈은 웬 연갈색 노비 년에게 넋이 푹 빠져있다.

 

  “죽는 게 두렵습니다.”

 

  손 태부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유오의 미소가 차갑게 식었다. 버러지 같은 늙은이.

 

  “이대로 죽으면 영호와 영서만이 남게 되고, 그럼 집안의 세력이 불안정해집니다. 집안의 힘이 미약해지면 분명 언젠가 내 무덤이 파헤쳐져 모욕을 당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나는, 나는… 이대로는 죽을 수 없습니다. 조금 더 살고 싶습니다.”

 

  아니, 사실은 영원히. 그것이 손 태부의 숨겨진 본심이었다.

 

  “허면 그것은 의원과 논할 문제입니다.”

 

  홍귀가 아니라 말이지. 유오가 음성이 바닥에 깔렸다.

 

  손 태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의원들도 소용없습니다.”

 

  “태부, 그럼 그것은 이제 하늘의 뜻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유오가 손 태부를 달래듯이 말했다.

 

  “잘 알지요. 하지만 그거 압니까? 하늘은 그저 바라만 보는 존재입니다.”

 

  손 태부가 비릿한 미소를 달고서 허연 수염을 쓱쓱 문질렀다.

 

  “마마, 저 역시도 마마처럼 첩의 자식입니다.”

 

  그 순간 애써 평정을 유지하던 유오의 얼굴에 쩍 금이 갔다.

 

  “아아, 이런 얘길 꺼내 심기가 어지러우신 모양입니다?”

 

  뱀처럼 혓바닥을 팔딱이며 웃는 늙은이의 추잡한 얼굴.

 

  “그러실 만도 하지요. 마마의 생모이신 영빈께선 후궁이었지만 엄연히 귀족가문의 규수였고 제 어미는 그저 물이나 긷는 평민계집이었으니까요. 비교가 나쁘실 만도 합니다.”

 

  “…아닙니다.”

 

  영서는 탁상 아래 있는 그의 주먹이 세게 움켜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굵은 혈관이 그의 손등에 도드라졌다.

 

  “첩의 자식에 불과했던 제가 어찌 손 가의 수장이 되셨는지 마마께선 아십니까?”

 

  알고 싶지 않다.

 

  “모르실 겁니다. 마마처럼 고귀한 분들은요.”

 

  고귀한 분들은요. 꼭 조롱하는 것처럼 들렸다.

 

  손 태부의 처연한 웃음소리 끝에 권력과 생을 향한 탐욕이 깃들어있었다.

 

  “첩의 자식새끼에 불과했던 저는 손 가의 수장이 되기 위해 본처의 자식인 이복형제들을 은밀히 죽였습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는 절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죠.”

 

  손 태부가 흐뭇하다는 듯이 웃는다.

 

  “다들 어찌나 순하고 멍청한지! 이래서 곱게 자라기만 한 귀한 신분의 아이들은 너무나 연약합니다. 한번 쥐면 쉽게 바스러질 가을낙엽처럼.”

 

  사냥에 나갔다가 사냥개에게 목이 뜯겨죽게 하고, 늘 마시던 차에 매일 미소한 양의 마약을 넣어 미쳐죽게 하고, 자주 만나는 기생의 입술에 죽음으로 향하는 요사스런 말을 심어두었다. 만일을 위해 일을 같이 도모한 그 기생을 말끔히 치웠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너무나 간단했다. 그리 무겁지도 아프지도 않은 일.

 

  “제가 그렇게 부정을 저지를 동안 하늘은 무얼 했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보기만 했습니다. 보기만.”

 

  왜 보기만 했는가?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고 나아가 정사에서도 온갖 술수로 정적들을 치웠을 때에도 하늘은 묵묵히 저만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이란 그런 존재인 겁니다. 그저 바라만 보는!”

 

  손 태부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거기엔 유오의 어머니도 포함되었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집안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모두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범람한 강에 개미집이 사라지듯이, 그렇게….

 

  그도 그때 그 범람에 휩쓸려 왕자신분을 박탈당하고 유배를 가게 되었었다.

 

  어머니의 잘린 목이, 그가 본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충격으로 그의 머리칼이 잿빛으로 셌다. 그의 나이가 9세 때의 일이다.

 

  “유오군 마마, 저는 하늘을 믿지 않습니다. 처음 형제를 죽인 날, 나를 벌하지 않는 하늘을 보고 그렇게 정했습니다. 그런 것은 제혜국의 선관들 따위나 믿는 것이죠. 무언가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나약한 인간들 말입니다.”

 

  손 태부가 씨익 웃는다.

 

  “나는 여느 때처럼 늘 그랬듯이 내 삶을 내가 정하고 그 앞길을 뚜렷하게 만들 겁니다.”

 

  그때 마침 비가 내리는 창밖의 하늘에서 쾅 하고 천둥번개가 쳤다.

 

  영서는 몸을 움츠렸지만 두 사내는 미동도 안 했다.

 

  섬광이 손 태부의 진짜 얼굴을 비추었다. 유오는 깨달았다.

 

  이 늙은이, 자신을 하늘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런데 나는 늙어가고 있고, 더 이상 내 앞길을 정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젊은 시절 못지않게 강렬하고 애절한데, 아니 그 이상인데 몸뚱이가 따라주질 않는 겁니다.”

 

  손 태부는 제 몸뚱이를 역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두 팔과 두 다리, 몸통과 머리. 모든 것이 그를 옥죄는 쇠사슬일 뿐이었다.

 

  훌훌 던져버리고 새것을 갖고 싶다.

 

  “홍귀를 죽이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 피를 조금이라도 얻고 싶습니다.”

 

  “불가능합니다, 태부.”

 

  유오는 단호하게 말했다. 거절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홍귀는 그 누구도 절대 잡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조심하십시오. 저택에 홍귀가 있을지도 모른다면서요. 간악하게 몰래 이 대화를 듣고 있을지도ㅡ.”

 

  “왜 홍귀가 마마를 죽이지 않았던 겁니까?”

 

  손 태부가 유오의 말허리를 싹둑 잘랐다. 손 태부의 얼굴이 땀으로 뒤덮였다. 먹을 것을 앞에 두고 헐떡거리며 조바심을 내는 돼지의 면상 같았다.

 

  “마마께선 과거 유배지에서 홍귀에게 습격을 받은 적이 있으십니다. 그때 마마의 나이는 고작 12세였습니다.”

 

  어머니가 죽은 후, 유오는 9세 때 거친 땅으로 유배를 떠나 12세 때까지 초가삼간에 갇혀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슨 연유인지 홍귀가 그 외딴 유배지를 덮쳤고 유오군의 유배지를 지키던 군졸들을 모조리 죽여 없앴다.

 

  자그마한 초가집은 붉은 피로 완전히 뒤덮였다. 끔찍했다.

 

  그리고 어린 유오군은 사라졌다.

 

  유오군의 시신을 단 한 점도 찾을 수가 없어 홍귀가 어린 왕자를 뼈째로 잡아먹었다고 모두가 수군댔다. 홍귀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심이 증폭했다.

 

  허나 시간이 흘러, 15세가 된 그가 홀연히 나타났다.

 

  그가 유오군君임을 증명하는 왕패(王牌, 왕자군에게 내리는 패)를 들고서!

 

  모두가 경악했다. 홍귀에게 죽은 줄 알았는데!

 

  굳이 왕패가 없어도 그가 유오군인 것은 충분히 알 수가 있었다.

 

  생김새 그대로 자랐다. 잿빛으로 센 머리카락도 여전했다.

 

  그리고 그때 돌아온 그는 어린 계집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연갈색 천민 계집애였다.

 

  “대체 홍귀에게 어떻게 살아남으신 거죠? 홍귀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태부.”

 

  “15세가 될 때까지 홍귀에게 붙들려있던 겁니까? 홍귀가 대관절 왜 마마를 살린 겁니까?”

 

  “태부.”

 

  “혹 같이 지낼 동안 홍귀의 약점이라도 알아냈습니까?”

 

  손 태부는 홍귀에 대한 질문을 마구 쏟아냈다. 눈빛에 탐욕과 광기가 서려있다. 손 태부는 정말 죽기 싫어하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마마의 그 연갈색 노비 년 말입니다.”

 

  그 순간 유오의 몸이 경직되었다. 영서는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그녀는 부끄러운 맘을 잊고 그를 유심히 살폈다.

 

  “그 노비 년도 홍귀에게 붙들려 있던 것은ㅡ.”

 

  “모릅니다!”

 

  그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영서의 양어깨가 위로 펄쩍 뛰었다. 그만 차를 엎고 말았다.

 

  다정한 그에게서 이렇게 벽력같은 노성이 튀어나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제 오라비가 유오군의 노비 년을 훔치려고 했을 때였다.

 

  엎질러진 찻물이 탁상 위로 퍼진다.

 

  “모릅니다! 모릅니다!”

 

  그가 절박하게 외쳤다.

 

  “홍귀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성질인지, 그리고 약점 따위도 하나도 모릅니다!”

 

  그의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영서가 안절부절 그를 바라보았다. 한없이 다정하고 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 부서질 것처럼 연악해보였다.

 

  “태부, 진심을 담아 충고해드립니다.”

 

  유오가 호흡을 정리하고서 말했다.

 

  “홍귀를 노리지 마세요. 역으로 당할 겁니다.”

 

  어마어마한 정적이 방안에 내려앉았다. 엎질러진 찻물을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찻물은 탁상을 넘어 바닥에까지 뚝뚝 떨어졌다.

 

  그것이 손 태부의 발등을 적셨다.

 

  손 태부는 그늘진 얼굴로 유오를 바라보았다. 심사가 뒤틀린 얼굴. 유오의 충고를 전혀 듣지 않고 있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침묵 끝에 손 태부가 입을 열었다.

 

  “구배를 아십니까?”

 

  뜬금없는 말. 유오는 눈을 깜빡였다.

 

  “…압니다.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홍귀를 500년간 가둔 먼 과거의 여자.

 

  “실은 500년 전, 손 씨 가문의 선조 중에 구배의 보물을 훔친 분이 계십니다.”

 

  “예?”

 

  손 태부가 바들바들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쇠한 몸으로 홀로 일어나는 것을 많이 버거워하자 영서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아비를 부축했다.

 

  손 태부는 영서의 부축을 받아 벽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벽을 두들겼다.

 

  그러자 벽 한쪽이 안으로 툭 빠지고 그 속에 작은 공간이 생겨났다. 유오가 놀란 눈으로 그 안을 보았다.

 

  궤짝 하나가 그 속에 숨겨져 있다.

 

  손 태부가 그것을 소중히 품에 껴안고 자리에 돌아왔다. 영서도 다시 유오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 궤짝 안에 선조님의 일기와 구배에게서 훔친 보물이 들어있습니다.”

 

  유오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종이가 세월에 먹혀 눅눅해지고 썩어버리고 또 갈라졌기 때문에 글이 많이 사라져 모든 내용을 다 읽을 수는 없지만, 제 눈길을 끄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손 태부가 웃음소리를 흘렸다. 꼭 뱀이 목덜미를 스치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손 태부가 품에서 찰랑 열쇠꾸러미를 꺼냈다.

 

  궤짝의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리니 철컥 하고 뚜껑이 열렸다. 그 속에서 서책과 또 다른 작은 상자가 밖으로 나왔다. 작은 상자는 한손에 들어올 만큼 작았다.

 

  손 태부가 작은 상자를 손에 꼭 쥔 채로 서책을 조심히 펼쳤다.

 

  무려 500년이나 된 서책! 유오의 두 눈이 그 서책에 박혔다.

 

  당장이라도 한줌의 모래로 변할 듯, 책장 하나하나가 전부 힘이 없고 낡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바스락하는 아슬아슬한 소리가 났다.

 

  “이 부분입니다.”

 

  손 태부가 손가락으로 어느 장을 가리키며 내용을 읽었다.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제 아무리 구배가 신력이 대단한 선관이라지만, 그래봤자 한낱 계집일 뿐이다. 힘은 보통 여인과 다름이 없고, 활은 다룰 줄 아나 무예가 출중한 것 또한 아니다. 그녀만큼 대단한 무당들을 나는 숱하게 보아왔다. 더욱이 구배, 그녀는….’ 흠, 안타깝게도 그 다음 문장의 글이 보이지 않습니다.”

 

  손 태부의 말대로 그 다음 문장이 있는 부분은 흐릿하게 바래져 내용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이 부분은 보입니다.”

 

  손 태부가 히죽 웃더니 그 문장을 읽었다.

 

  “자, 보십시오. ‘그럼 왜 홍귀가 구배를 함부로 해치지 못했던 걸까? 우연히 나는 그녀가 품속에 늘 지니고 있는 이것을 보았다.’”

 

  이것?

 

  “‘반짝거리고 영롱한 색을 뿜어내는…. 구배는 홍귀를 상대할 때, 이것을 늘 몸에 착용했다.’”

 

  손 태부는 더 이상 글을 읽지 않았다. 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서책 자체가 얼룩덜룩 지저분해 많은 내용이 시간 속에 묻혀버렸다. 어떤 내용인지 해석하기가 힘들다.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아침, 여전히 빗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유오는 잠깐 넋이 나간 얼굴로 서책을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손 태부를 쳐다보았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구배가 홍귀를 상대할 때마다 몸에 늘 착용했다는 이것.

 

  “바로 이겁니다.”

 

  손 태부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 속에 있는 것이 바로 구배의 보물입니다.”

 

  유오는 그 상자를 뚫어질듯이 바라보았다. 저 작은 상자 속에?

 

  “소금이나 붉은 팥 같은 것은 귀신들이 싫어하기에 몸에 지니고 있으면 안전하다지요. 그런 것처럼 홍귀가 두려워하는 것이 ‘이것’이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손 태부의 늙은 손이 작은 상자를 어루만졌다. 그것이 제 심장이라도 되는 양.

 

  “아주 특별한 돌을 깎아 만든 것 같았습니다. 선조님의 기록처럼 영롱한 빛이 나며, 굉장히 부드럽고 가볍고, 또…”

 

  손 태부가 도중에 입을 얼른 다물었다. 하마터면 상자 속의 ‘이것’이 무엇인지 말할 뻔했다.

 

  “아무튼 그리하여 지혜로운 우리 선조님이 이것을 구배에게서 훔쳐온 것이죠. 어쩌면 구배가 홍귀를 땅속에 가두고 바로 목숨이 끊긴 것도 우리 선조님에게 제 보물을 멍청하게 빼앗겨서 일수도 있겠군요.”

 

  선조의 잘못을 자랑스레 말하는 손 태부의 행태가 유오는 역겨웠다.

 

  500년 전 여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모두 갖고 태어난 존재라고 유오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확실히 ‘이것’은 효과가 있는 물건인 듯합니다.”

 

  “효과요?”

 

  “영호의 세 번째 신부를 이 저택에 들인 순간부터 붉은 악귀가 별채로 향하는 것을 호위들과 노비들이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있는 곳엔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저를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 태부가 구배의 보물이 든 상자를 힘껏 움켜쥔 채 눈을 번득였다.

 

  “홍귀는 절대 저를 덮치지 못할 겁니다. ‘이것’이 있는 한!”

 

  저 상자 안에 있는 ‘이것’이 과연 무엇일까? 유오는 궁금했다.

 

  “허니 알려주십시오, 마마. 어떻게 홍귀에게서 살아남으셨습니까? 단순히 홍귀가 저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홍귀를 잡아 그 피를 조금이라도 취할 방도가 필요합니다.”

 

  “태부, 안 됩니다. 그리고 모릅니다.”

 

  유오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안 된다. 불가능하다.

 

  그 말은 손 태부에게 ‘순리를 받아들이고 죽어라’라고 선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손 태부의 얼굴이 큰 실망과 분노로 출렁였다.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유오의 목을 조를 태세였다.

 

  영서는 바들거리며 유오의 안위를 걱정했다. 아버님이 무서웠고, 그가 다치는 것도 무서웠다.

 

  여전히 어둠 속에서 빗소리가 울렸다. 방안은 촛불이 만든 음영으로 일렁였다.

 

  손 태부의 얼굴에 무지막지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꼭 악귀라도 들린 형상 같았다.

 

  “…정말 단순히 운이 좋아 홍귀에게서 살아남은 겁니까?”

 

  “예, 저는 소문만큼 대단한 인간이 아닙니다.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죠.”

 

  “허면 여태껏 마마의 곁을 지켰던, 마마의 그 연갈색 노비 년도 홍귀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겠습니다?”

 

  손 태부가 그의 취약점을 건드렸다. 예상대로 유오의 얼굴에 엄청난 살기가 띠었다.

 

  영서는 그의 이런 얼굴에 적잖이 놀랐다. 그가 아버님과 같은 무서운 얼굴을 하다니.

 

  “그 아이는 건드리지 마십시오. 상관없습니다.”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게 조건이지 않았습니까.”

 

  영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조건?

 

  아버지와 약혼자. 두 사람 간에 자기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

 

  손 태부가 말했다.

 

  “마마, 저는 이제 너무 늙었습니다. 하루하루가 힘들고 버겁고, 또 무섭습니다. 아침이 오면 무기력하게 변해버린 내 노쇠한 모습을 다른 이에게 들킬까 전전긍긍합니다. 아들 녀석도, 딸아이도, 그리고 집안도, 이 나라 정사도 저는 책임질 게 너무 많습니다.”

 

  “아버님….”

 

  영서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아비를 쳐다보았다. 손 태부도 영서를 보았다.

 

  “그러니 영서야, 잘 들어라. 만일 내 신변에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네가 중심이 되어 집안을 지켜야한다. 특히나 구배의 보물을! 원래는 네 오라비가 그 역할을 해야 하지만….”

 

  “아버님, 그런 말씀마세요. 아버님은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근래에 들어 몸이 편찮으신 이유는 날씨가 무척이나 추워졌기 때문이에요. 지나가는 고뿔 같은 거요.”

 

  “그래, 그러면 좋겠구나.”

 

  “계속되는 정쟁과 얼마 남지 않은 오라버니의 세 번째 혼례, 그리고 또 홍귀로 인해 저택이 발칵 뒤집혀 심기도 많이 어지러우신 겁니다. 조금만 힘내세요, 아버님.”

 

  영서가 아비에게 머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손 태부가 웃으며 그 인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쉽군. 마마께서 정말 홍귀에 대해 아는 게 하나 없으시다니.”

 

  손 태부가 힐끗 매서운 눈초리로 유오를 보며 말했다. 여전히 유오가 뭔가 하나쯤은 알고 있으리라 여기는 의심의 눈빛이었다.

 

  유오는 그 눈빛을 무시하고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흠, 정말 송구하시다면 영호의 혼례가 모두 끝날 때까지 이 저택에 머물러주심이 어떻습니까?”

 

  그 제안에 유오의 얼굴이 구겨졌고, 영서의 눈은 동그래졌다.

 

  “홍귀를 막을 방패는 있습니다만,”

 

  손 태부가 소중히 쥐고 있는 작은 상자를 힐끗 보며 말했다. 그리고 유오를 본다.

 

  “찌를 창도 필요하지요.”

 

  유오가 난색을 표했다.

 

  “급히 기별을 넣어 제혜국의 선관이라도 부르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도적이라면 몰라도 저는 사특한 것들을 상대할 줄은 모릅니다. 굿이나 제를 올리는 것은 무당의 일입니다.”

 

  “제혜국은 바다 건너 먼 대륙입니다. 그들에게 기별이 가는 시간도, 그리고 그들이 기별을 받고 이곳에 오는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립니다. 그들이 올 즘엔 이미 영호의 혼례가 끝나있겠죠. 세 번째 신부가 이미 홍귀 손에 죽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게다가 제혜국의 선관들도 분명 홍귀를 탐내고 있을 겁니다. 원래는 500년 동안 자기들 수중에 있던 요물 아닙니까?”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전 홍귀의 약점이 무엇인지 전혀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그저 마마의 무예와 배포만 있으면 됩니다. 제 호위들과 함께 불침번을 서주시지요.”

 

  일국의 왕족에게 제 호위들과 경호를 서라는 명령은 유오에겐 큰 모욕이었다. 아비에게 순종적인 영서도 그 명령만큼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유오가 그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모욕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것 따위, 이미 당할 대로 당했다. 이제와 또 겪는다한들 그다지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다. 그저….

 

  “송구하오나 제 노비계집을 집에 혼자 둘 순 없습니다. 여자 혼자 집에 있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합니다.”

 

  유오가 조용한 눈길로 경고하듯이 손 태부를 보며 말했다. 과거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1년 전, 손 태부의 명으로 서쪽 변방의 사정을 살피러 갔던 유오는 손 태부의 하나뿐인 아들인 영호가 잠시 자신이 집을 비운 틈을 타 늦은 밤, 연을 보쌈하려고 했던 사실을 여적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다행히 연이 손 태부의 아들을 떡이 되도록 패 미수로 그쳤다. 뒷수습이 힘들긴 했지만 유오는 연을 칭찬했었다. 잘했어, 아주 잘한 거야.

 

  “그런 거라면 걱정 마십시오. 그 노비 년도 저희 저택에서 머무르면 될 일 아닙니까.”

 

  “예?”

 

  “네?”

 

  유오와 영서, 둘 다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저택은 넓습니다. 방도 많지요. 그 천한 노비 년에게도 방 하나 정도 내어줄 만큼, 저는 아주 넉넉한 사람입니다.”

 

  연이가 네 아들놈과 같은 지붕아래 있는 게 불안하고 싫어서 여기 있기 싫다는 거잖아.

 

  애써 미소를 짓고 있는 유오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 어금니를 힘껏 물었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진다.

 

  분명 알고서도 일부로 모른 체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손 태부는.

 

  대체 무슨 꿍꿍이지?

 

  대답을 않는 유오를 향해 손 태부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거래,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꾸며진 웃음으로 손 태부의 제안을 완강히 거부하던 사내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대신 벼랑 끝에 내몰린 절박한 얼굴의 사내만이 남게 되었다.

 

  유오가 한번 쥐면 쉽게 바스러질 가을낙엽처럼 아무 저항도 못하자 영서가 또 한 번 걱정과 의문이 깃든 얼굴로 약혼자와 아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거래라니? 그리고 아까 전에 말했던 조건은 또 무엇일까?

 

  손 태부가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혼례가 무사히 끝날 때까지 이 저택에서 머무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 연갈색 노비 년과 함께.”

 

  어두운 밤마다 붉은 악귀가 나타난다는 이 저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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