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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홍귀
작가 : 연수희
작품등록일 : 2018.12.31

‘홍귀’라고 들어봤는가? 사람의 붉은 피를 거죽처럼 몸에 흠뻑 뒤집어쓰고 다닌다 하여 붙여진 어느 악귀의 이름이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자 붉은 악귀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붉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악귀의 모습을 두고 ‘홍귀(紅鬼, 붉은 악귀)’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게 바로 붉은 악귀, ‘홍귀’다.

500년 만에 다시 세상 밖에 나온 홍귀, 홍귀를 쫓는 여인 연.

복수를 꿈꾸는 여자와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

 
2. 그가 진심으로 웃을 때
작성일 : 18-12-31 20:44     조회 : 256     추천 : 0     분량 : 7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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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짐을 지고 소리 없이 걷는 그의 고요한 등.

 

  “오래 기다리느라 고생했어. 힘들었지?”

 

  북적거리는 대로를 벗어나 한적한 길목에 들어서자마자 유오가 다정하게 물었다.

 

  그에게서 세 발자국 정도 뒤로 떨어져 걷던 연은 머리를 아래로 조아리며 “괜찮습니다, 마마.”라고 공손히 답하였다.

 

  그가 걸음을 우뚝 멈추고 눈살을 구부렸다.

 

  연과 눈을 맞추려는 듯 얼른 뒷짐을 풀고 허리를 숙여 고개를 갸웃해보지만 그럴수록 연은 더욱 깊숙이 머리를 조아리며 그에게 거리를 두었다.

 

  그가 달래듯이 말했다.

 

  “여긴 아무도 없잖아. 평소대로 편하게 해, 연아.”

 

  주위를 둘러보니 그의 말대로 인적이 없는 길이었다. 그와 자신이 사는 집은 도성의 부촌에서 가장 구석에 박힌 작고 소박한 곳이었다.

 

  왕족인 그가 살기엔 형편없이 빈약한 곳일지도 모르나 두 사람이 살기엔 딱 안성맞춤이다.

 

  물론 손 태부의 사람들이 집 주위를 지키며 감시하고 있지만.

 

  사람이 없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한 뒤에야 연은 고개를 들 수가 있었다. 어깨도 느슨하게 풀렸다. 손 씨 가문의 저택에 있느라 계속 딱딱하게 경직되어있던 등허리다.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다정한 눈이 연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고생했어.”

 

  커다란 손이 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끌어당겨 세 발자국 정도 떨어져있던 그와의 거리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그의 손이 토닥토닥 연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연은 안심한 듯 숨을 천천히 길게 내쉬었다. 이제야 숨통이 조금 트인다.

 

  “정말이지 그 집구석은 언제 가도 기분이 나빠. 쓸데없이 크기나 하고. 거기서 몇 번이나 길을 잃었는지 몰라. 그건 집이 아니야.”

 

  꼭 거대한 괴물이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는 듯한 저택이다.

 

  “커도 너무 커. 뒷간 가다가 도중에 바지에 흘리겠다, 흘리겠어.”

 

  유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목울대에서 듣기 좋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나라에서 궁궐 다음으로 가장 크고 화려한 저택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다른 여자들은 그 저택의 아가씨로 살고 싶어 하는데 연이 넌 안 그래?”

 

  “싫어.”

 

  고민하는 기색 없이 곧장 답했다.

 

  “자고로 집은 마음이 편해야지. 거긴 너무 불편해. 그리고 왠지 공기도 음침하고 기분 나빠. 꼭 귀신이라도 있는 양….”

 

  연은 멈칫했다. 손 씨 가문 저택의 노비들이 떠들어낸 말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들었어? 이 저택 안에 홍귀가 있대.」

 

  홍귀가 늦은 밤마다 피처럼 붉은 혼례복을 몸에 두르고서 세 번째 신부에게 다가간다는 그 괴담.

 

  “연아?”

 

  별안간 연이 길 한복판에 우뚝 서 있자 유오가 걱정스런 얼굴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갑자기 왜 그래?”

 

  “어? 아냐, 아무것도.”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지만 유오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머릿수건의 끝자락을 살짝 들춰 연의 얼굴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닌데? 순간 네 얼굴이 창백해졌어. 왜, 나 기다리는 동안 또 손 가의 노비들이 너한테 일을 많이 시켰어?”

 

  “아니야, 그런 거.”

 

  “아니긴. 아까 보니까 너 혼자 부엌간 구석에 웅크려 일을 하고 있던데. 나오기 전에도 그 집 노비들과도 사이가 무척이나 안 좋아보였고. 터부시라도 당한 거 아니야?”

 

  그의 다정한 얼굴에 일순 싸늘하고 찬 기운이 스쳤다.

 

  연은 움찔했다.

 

  유오는 좀처럼 화를 내는 법이 없다.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도 흥분하지 않고 상황을 부드럽게 넘기는 처세가 능숙했다. 좋게 말하면 인내심이 강하고 자비로움이 많은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배알이 없다고 할 만큼 자기 자신을 전혀 챙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욕을 당하면 당할수록 웃음으로 화답한다. 무례한 자가 면전에서 욕을 해도 빙긋 웃어넘긴다. 그것을 알고 일부러 다가와 왕족인 유오를 능멸해 우월감을 느끼고자 하는 비뚤어진 인간들이 무수히 많았다.

 

  유오가 그런 순간에조차 웃을 때마다 연은 속이 터졌다.

 

  저 바보, 화를 내란 말이야!

 

  맘 같아선 유오를 무시한 것들을 제 손으로 모조리 멍석말이를 해 흠씬 두들겨 패고 강가에 휙 던져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간 바로 귀족을 능멸한 죄로 연의 목이 뎅강 잘릴 터다. 그럼 유오는 또 자신을 구하겠답시고 비굴하게 웃어야겠지.

 

  그가 웃고 싶은 순간에만 웃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렇게 화낼 줄 모르는 다정한 사람이 한번 진심으로 화나면 무섭다는 걸, 연은 1년 전에 깨달았다.

 

  그때의 유오는 낯선 남자의 얼굴을 하고서 진심으로 분노했다. 유오를 무섭다고 느끼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때는, 손 가의 장남인 영호가 연을 보쌈하려고 했을 때였다.

 

  “터부시 같은 거 없어. 괴롭힘 받은 적도 없고.”

 

  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정말이야? 진짜 별일 없는 거야?”

 

  유오가 진중한 눈빛으로 재차 물었다.

 

  그 순간 연은 그에게 묻고 싶었다.

 

  유오, 네 약혼자가 사는 저택에 홍귀가 나타난다는 흉측한 소문이 돌고 있어.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을 네가 모르고 있을 리 없어.

 

  넌 어떻게 생각해? 그 소문이… 거짓일까, 진짜일까?

 

  “응, 없습니다, 마마.”

 

  하지만 마음에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장난스럽게 경어를 써 답했다.

 

  유오가 안도하는 얼굴로 소리 없이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누가 괴롭히면 뒷일 걱정 말고 무조건 명치를 때려버려. 아니면 정강이나 사타구니도 괜찮고. 눈알을 손가락으로 찌르는 것도 좋아. 그래, 그거다. 그렇게 해.”

 

  유오가 검지와 중지로 상대의 눈을 찌르는 자세를 보여주며 따라하라고 했다.

 

  “됐어. 가뜩이나 유오군마마의 노비 년은 성질 사나운 계집애라고 소문 다 났는데 이러다 내 혼삿길 막히면 네가 책임질 거야?”

 

  별 뜻 없이 한 말인데 유오가 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잿빛머리칼이 바람에 살랑 흔들렸다.

 

  그가 빙긋 웃었다.

 

  “응, 책임질 거야.”

 

  그가 그렇게 말하고서 다시 뒷짐을 지고 걷기 시작했다. 연은 어이가 없어 픽 하고 웃었다.

 

  다시 집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다정한 오누이처럼 함께 나란히 걸었다.

 

  그때 뺨에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톡 닿았다. 무시무시한 섬뜩함이 연의 등허리를 훅 스쳤다.

 

  “아.”

 

  연이 소리를 내자 유오가 물었다.

 

  “왜 그래?”

 

  “뺨에… 비가.”

 

  “비?”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끼어있다.

 

  “이런, 비가 오려는 모양이네.”

 

  유오는 황급히 연의 머리 위로 팔을 뻗어 넓은 옷자락으로 빗방울을 막아주었다.

 

  연은 비를 싫어하다 못해 끔찍이 여긴다.

 

  “얼른 집에 가자.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방에서 쉬고 있어.”

 

  “하지만 저녁식사 준비를….”

 

  “됐어. 오늘은 내가 할 차례야. 방에만 있어. 이불 덮고도 있어. 빗소리 안 들리게.”

 

  응, 하고 연은 작게 답했다. 유오의 자늑자늑한 걸음이 다급해졌다.

 

  그의 넉넉한 옷깃이 연을 감쌌고, 둘은 집을 향해 뛰었다.

 

 

 

 ***

 

 

 

  “검은 삿갓을 쓴 나리, 비도 오는데 여기서 잠시 쉬다가세요.”

 

  살랑거리는 여자의 달콤한 목소리에 검은 삿갓을 쓴 남자의 고개가 비스듬해졌다.

 

  그는 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하늘보다도 더 어두운 색의 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그 옷은 무척이나 초라하고 지저분했다. 아주 오래돼 너덜거리까지 하니 남자가 그다지 부유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더욱이 그는 이렇게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마냥 맞고 서 있었다. 왠지 오갈 데도 없어보였다. 뿌리가 없는 남자 같았다.

 

  그런 남자를 향해 달콤한 목소리를 속삭이며 이리 오라 손짓한 유녀를 향해 다른 유녀들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저리 가난한 남자를 꾀어내다니. 대체 무얼 대가로 받으려고?

 

  “얘, 그만 둬. 하룻밤 삯도 못 낼 만큼 궁해 보여.”

 

  보다 못한 동료가 검은 삿갓의 남자를 유혹한 유녀를 말렸다. 하지만 듣지 않았다.

 

  “어차피 날씨가 너무 춥고 비도 와서 손님이 하나도 없잖아.”

 

  화려한 주사청루의 빛이 어두운 밤과 사나운 빗줄기에 갇혀 흐릿하게 바래졌다.

 

  “기분도 저조한데 이부자리라도 따뜻하게 덮여야지.”

 

  검은 삿갓의 남자를 훑어보는 유녀의 눈빛이 무척이나 번뜩거렸다.

 

  “자고로 손이 큰 남자는 그 아래도 듬직하다고.”

 

  “뭐어? 그만둬. 괜히 몸만 힘들어.”

 

  그때 “내버려 둬”하고 옆에서 누군가가 말렸다. 저 애는 돈주머니가 싸늘한 건 참아도 침상이 싸늘한 건 못 참는 애야, 라는 말이 귀에 꽂혔다.

 

  “자아, 비가 와 몸도 춥고 마음도 쓸쓸하니 이곳에서 잠시 비를 피하시지요, 삿갓나리. 제가 나리의 마음을 뜨뜻하게 데워드리겠나이다. 대신 나리는 이년의 침상을 데워주시어요.”

 

  유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나비의 날개처럼 팔랑인다. 이리 와요. 이리 와요.

 

  검은 삿갓이 드리운 그림자에 이목구비가 가려진 남자는 그 하얀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들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유녀가 싱긋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자아, 그래요. 이리로.”

 

  남자의 커다란 등에 잘 가꾸어진 여자의 하얀 팔이 거미줄처럼 엉겼다.

 

  유녀는 남자의 널찍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서 깊은 숨을 후우 내쉬었다. 유녀의 달뜬 숨결이 남자의 가슴을 간질인다.

 

  그녀는 그의 귀에 대고 꿀처럼 달고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귓속말을 속삭였다.

 

  “잘 오셨어요.”

 

  그러나 남자는 무감하게 반응했다. 말없이 그저 유녀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묘하게 남자의 품에서 어떤 생기와 온기도 느낄 수 없어 유녀는 일순 섬뜩했지만 그건 쌀쌀한 겨울날씨 속에서 그가 비를 맞고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이 나라에 홍귀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아 모두가 두려워하고 있던 참이랍니다. 그런 판국에 비가 오는 어두운 길을 혼자 걷는다는 건 무섭고 위험한 일이에요.”

 

  유녀의 유혹에도 별 반응을 안 보이던 남자가 ‘홍귀’얘기에 관심을 나타내는 듯했다. 삿갓의 그림자에 묻힌 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다른 유녀가 소스라친 얼굴로 그녀를 말렸다.

 

  “얘! 홍귀얘기 하지 마. 불길하게!”

 

  “뭐 어때? 홍귀가 설마 이런 비루한 곳에 오겠어? 어차피 손 씨 가문 저택에 있다는데.”

 

  “…손 씨?”

 

  남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고막을 쇠꼬챙이로 긁는 듯한 소름끼치는 저음에 유녀가 고개를 퍼뜩 들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마침 쾅 하고 천둥번개가 쳤다.

 

  찰나의 빛에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얼굴이 유녀의 눈 속에 오롯이 담겼다.

 

  “꺄악!”

 

  유녀들이 눈을 꼭 감고 비명을 질러댔다. 삿갓남자의 품속에 있는 유녀만이 홀린 듯이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 이 남자.

 

  “그거 흥미로운 얘기군.”

 

  겨울비보다 차가운 음성이 유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홍귀가 손 씨에게 있다고?”

 

  그가 턱에 묶인 끈을 스륵 하고 당기자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삿갓이 벗겨졌다. 유녀들이 모두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가난해 보이는 남자라고 욕하던 유녀들은 이제 거기에 없었다.

 

 

 

 ***

 

 

 

  쾅 하고 치는 천둥번개 소리에 깜짝 놀라 어깨가 위로 펄쩍 뛰었다.

 

  연은 걱정이 그득한 얼굴로 어두운 하늘을 한번 바라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바닥에 내렸다. 비가 오는 하늘 따위 쳐다보기도 싫다.

 

  톡톡 한두 방울씩 내리던 얇은 빗줄기는 금세 몸을 사납게 때리는 굵은 장대비로 돌변했고 결국 집에 도착할 즈음에 유오와 연, 두 사람 모두 폭우 속에서 홀딱 젖어버리고 말았다.

 

  젖은 몸에 뼛속까지 추위가 스며들어 전신이 오들오들 떨린다. 후우 길게 내쉬는 숨에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연아, 목욕물 덮여 놓을 테니까 일단은 방에 들어가서 젖은 옷부터 얼른 벗어. 고뿔에 걸릴라!”

 

  유오가 젖은 머리를 대충 손으로 털며 말했다. 그리고 얼른 연의 등을 방안으로 떠밀었다.

 

  하지만 연이 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말도 안 돼는 소리! 노비가 주인의 목욕물을 준비하는 거야. 내가 목욕물을 준비할 테니까 유오 네가 방에 들어가!”

 

  연이 양손을 걷어붙이고 목욕물을 데우려하자 유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잠시 부지런히 움직이는 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옷이 흠뻑 젖어 살갗에 찰싹 달라붙어있다. 이대로 두다간 분명 내일 열이라도 오를 것이다.

 

  “좋아.”

 

  그가 정색하는 얼굴을 치우고 빙그레 웃었다.

 

  “어디 우리 집 귀여운 노비의 지극정성 좀 받아보자.”

 

  “뭐?”

 

  그가 훌러덩 웃옷을 벗어재꼈다. 튼튼한 남자의 상체가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흉터가 그득한 몸.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번엔 그가 바지끈을 휙 잡아당겼다.

 

  소스라치게 놀란 연이 황급히 달려가 그의 허리춤을 잡았다.

 

  “악! 뭐하는 거야, 지금? 미쳤어?!”

 

  “뭐하긴, 네가 내 목욕을 도와준다기에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었지. 참고로 늘 등 한가운데에 손이 잘 안 닿아 그간 고생했었는데 이제야 시원해질 수 있겠군.”

 

  그가 환하게 웃는다.

 

  “고마워, 연아.”

 

  연의 이마에 핏대가 돋아났다.

 

  “내가 언제 네 목욕을 도와준대? 목욕물 덮여준다고 했지! 옷 벗을 거면 방에 들어가서 벗어! 왜 여기서 훌러덩 벗는 거야? 어어어, 끈 풀지 마, 끈 풀지 마!”

 

  그가 다시 끈을 잡아당기려 하자 연이 질색을 하며 만류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손 크기에서부터 크게 차이가 났다. 유오가 장난스럽게 움직이는데도 연은 그 힘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숨이 부친다.

 

  “그럼 네가 먼저 방에 들어가서 젖은 옷 갈아입어.”

 

  유오가 행동을 우뚝 멈추고 말했다.

 

  “뭐?”

 

  “난 지금 여기서 당장 젖은 옷을 몽땅 벗을 거야. 그리고 옷을 바로 저 바구니에 담을 거야. 왔다 갔다 하기 귀찮으니까.”

 

  “뭐 말도 안 돼는… 아아, 잠깐만!”

 

  결국 유오가 양쪽 끈을 다 풀자 연은 화들짝 놀라 그의 허리춤에서 두 손을 떼고 홱 등을 돌렸다.

 

  “변태 아니야, 진짜?!”

 

  연이 등 뒤를 향해 버럭 소리치자 그가 웃었다.

 

  “나 지금 다 벗었어. 너 얼른 방에 들어가는 게 좋을 걸?”

 

  “대체 유국의 여자들은 네가 뭐가 좋다고!”

 

  “셋 셀 때까지 방에 안 들어가면 네 뒤에서 춤출 거야.”

 

  힉, 하고 연이 질색했다.

 

  “하나….”

 

  그가 연의 등 뒤에 바짝 다가가 귀에 대고 ‘하나’라고 나직하게 읊자, 연은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우당탕 방안에 달려 들어갔다.

 

  쾅 하고 문이 닫히자 유오는 웃는 얼굴로 연이 들어간 방을 쳐다보았다.

 

  그는 제대로 바지를 입고 있었다.

 

  “하여간 사람 상처 받게 저런 반응일 건 또 뭐람.”

 

  그는 미리 길어놓은 물을 솥에 여러 번 붓고 아궁이 안에 땔감을 넣었다. 이마에 땀이 맺혔지만 빗물과 섞여 구분되지 않았다. 수많은 물방울이 그의 이마와 관자, 그리고 목대를 타고 탄탄한 가슴 위로 흘러내렸다.

 

  탁탁 부싯돌을 서로 부딪쳐 불을 지피려는 순간, 그의 머리 위로 수건이 하나 툭 얹어졌다.

 

  “어?”

 

  누군가가 유오의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벅벅 사납게 문질렀다. 얼굴과 목도 닦아주었다.

 

  거칠지만 애정이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그는 두 눈을 꾹 감고 있다가 수건이 치워지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트여 위를 올려다보았다.

 

  찌푸린 얼굴의 연이 바로 코앞에 서 있었다.

 

  어느새 그녀는 옷을 빠르게 갈아입었다. 그리고 머리를 꾹 동여매고 있던 머릿수건도 벗었다.

 

  등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연갈색 머리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비에 젖어 살짝 구불거렸다.

 

  그리고 머리카락과 똑같은 연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비를 맞아 안색이 창백해진 연갈색 여자가 유오에게 말했다.

 

  “하여튼 변태가 주인이라서 너무 피곤해. 같이 목욕물 준비해. 대신 목욕은 너 먼저 해. 어찌됐든 네가 주인이니까요, 마마.”

 

  유오는 멍하니 그녀를 보다가 허허 하고 힘없이 웃었다. 오냐, 하고 웃으며 여유롭게 답했지만 마음이 떨리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왜 이러는 걸까 싶어 문득 밖을 보니 여전히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과연. 비 때문이다.

 

  연은 비를 싫어한다.

 

  그녀는 비 오는 날만 되면 안색이 굳고 얼굴과 손발이 차게 식으며 밤에는 악몽과 불면에 시달린다. 비 오는 날에 부모를 잃어서 그렇다.

 

  비가 오는 날이면 연은 불행해지고, 연이 불행해지면 그도 슬퍼지니 아마 그 탓에 마음이 싱숭생숭한 것이리라.

 

  그는 그렇게 제 마음에 결론을 내리고 연과 함께 물을 따뜻하게 데웠다.

 

  물론 또다시 그의 짓궂은 장난에 따라 연이 먼저 목욕을 하게 되었다.

 

  씩씩대며 인상을 쓰는 그녀의 얼굴에 그는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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