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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라이트노벨
우리는 저마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부제: 난세살이)
작가 : 박은혜
작품등록일 : 2018.12.31

‘시집살이.’ 며느리들의 가슴을 철정 내려앉게 하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 며느리만 힘들까? 자신도 겪어온 며느리 시절을 잘 아는 시어머니가 왜 며느리를 괴롭힐까? 어쩌면 그 시어머니는 나름대로 잘 해보려는 게 아닐까? 언젠가 시어머니가 될 며느리는 자신의 며느리를 어떤 태도로 대할까? 어쩌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하던 그 시어머니와 똑같은 모습이 되어 있진 않을까?

“네가 뭘 안다고 끼어들어?!” 사건 당사자들이 그 일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경험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하지만 때로는 경험했기 때문에 모를 수도 있다. 한 걸음 물러나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해관계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면, 그것을 날 위한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 자신만을 위해 싸우니 해결도 있을 수 없다.

만연해 있는 고부갈등을 제3자의 시각에서 본다면, 끝없이 맞물려 있는 이 복잡한 문제의 원인이 어느 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단 시어머니와 며느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는 저마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 나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분도, 그도, 그녀도, 그 아이도 다 잘못 만났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잘 모른다. 당사자인 만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같고 상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 같다.

‘힘들어봤자 나보다 더 힘들까.’
‘내 주제에 지금 누굴 위로하고 있나.’

누군가를 위로하는 게 사치가 된 세상. 하지만 위로할 수 있어야 위로받을 수 있다. 그 사람이 시대를 잘못 타고났음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도 나처럼 난세(亂世)살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한다면, 조금은 불쌍히 여기며 감싸 안을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어쩌면 상대를 시대의 피해자로 바라볼 수만 있어도 조금은 달라 보일 것이다. 그 사람도 나처럼 힘겹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 자체만으로도 꽤 대단한 사람,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런 소소한 소망 하나를 던져주는 것이 이 책에 나올 인물들의 역할이다.

이 소설은 올해 서른셋이 된 주인공(나)이 세 살 즈음에 가지고 있었던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하지만 지울 수 없는 강력했던 몇 가지 기억을 토대로 전개된다. 그리고 올해, 세 살 즈음이 된 사람들과의 이야기들을 동시에 섞어가며 그들을 지배한 각각의 시대를 조금씩이나마 마주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올해 ‘세 살 즈음’이 된 등장인물들의 스펙은 저마다 찬란하게 서글프다.

- 일흔 세 살 즈음에
올해 일흔 세 살이 된 고모는 1946년에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비상한 머리를 써보지도 못한 채 국졸로 학업을 마쳐야 했다. 194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독일광부로 파견나간 아버지를 잃어야 했고 늦게나마 실현하려던 꿈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포기해야 했으며 194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애틋한 마음 한번 품어볼 기회 없이 원치 않는 결혼을 치러버려야 했다. 그리고 여생을 딸과 손녀를 위해 헌납해야 했다.

- 예순 세 살 즈음에
올해 예순 세 살이 된 아빠는 195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주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어야 했고,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을 거치며 우울한 대학시절을 맛보아야 했으며, 그토록 가혹했던 70년대의 군대를 경험해야 했다. 195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직장도, 집도 쉽게 구했지만 평생을 가족을 위한 ATM기계로 살아야 했고 퇴직 시기에는 첨단문명과 벗할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 쉰 세 살 즈음에
올해 쉰 세 살이 된 엄마는 196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끝까지 대학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지만 대학을 포기해야 했으며 남편이 번 돈으로 편히 산다는 시선 속에 무시를 덤으로 받으며 살아왔다. 거기에 196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맞벌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시대에 노년기를 맞아야 했고 결국 황혼육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 마흔 세 살 즈음에
올해 마흔 세 살이 된 외삼촌은 197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군대를 다녀오자마자 IMF라는 난국에 부딪혔다. 197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렵게 워크맨 사업을 시작했지만 MP3의 등장으로 사업을 시원하게 말아 드셨고,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여 얼른 MP3사업으로 전향했지만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하면서 또 다시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 서른세 살 즈음에
올해 서른세 살이 된 나는 198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군대에 다녀오자마자 미국발 경제위기와 마주했다. 취업난은 극도로 심각해진 상태였고 뭐라도 좋으니 해 보자며 원치 않는 직장에 들어갔다. 198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미친 듯이 벌어도 내 집 마련의 꿈은 현실이 될 수 없는 이상일 뿐이다. 친구들은 “그 나이 되도록 자리도 못 잡냐?”는 핀잔에 이미 녹초가 되어 있다.

- 스물세 살 즈음에
올해 스물세 살이 된 조카(고모의 손녀) 유진이는 199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IMF와 함께 유아기 시절을 보냈다. 199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다는 할머니(나의 고모) 말을 믿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더 이상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은 어려운 시대임을 알고 꿈을 하나 둘 접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포기하는 건데 욕심이 많아 결혼을 안 하고 있다는 핀잔까지 덤으로 들으며 살아간다.

- 열세 살 즈음에
올해 열세 살이 된 사촌동생(외삼촌의 아들) 영우는 2006년에 태어난 우등생이다. 하지만 임대아파트 스펙 덕에 친구조차 마음대로 사귈 수가 없다. 200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곧 다가올 이십대를 4차산업혁명 시대와 함께 맞이하게 되었고, 그동안 죽어라 공부한 외국어도 다 쓸데없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다. 꿈도 함부로 꿀 수 없는 그에게 어른들은 꿈이 없다며 혀를 찬다.

- 세 살 즈음에
올해 세 살이 된 나의 아들 우림이는 201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텅텅 빈 어린이집에서 7시 반까지 부모를 기다려야 한다. 201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진귀한 문명세계를 누리며 자라고 있지만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더없이 막막하게 다가올 뿐이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인생의 5대 난관인 ‘학업’, ‘결혼’, ‘군대’, ‘직업’, ‘육아’에 따라 뒤섞어볼 것이다. 누구라고 더 쉬울 것 없었던 각자의 난세살이를 잠시나마 여유롭게 구경해 보자. 이것저것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을지 모른다. 어쩌면 위로를 던질 여유까지 생길지 모른다.

 
누군가에겐 결혼도 그저 사치일 뿐이다 (2)
작성일 : 18-12-31 02:12     조회 : 143     추천 : 0     분량 : 6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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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군가에겐 결혼도 그저 사치일 뿐이다 (2)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

 “솔직히 더 힘들어지기 전에 마음을 정리하고 싶긴 해. 진짜 난 우리 할머니가 더 중요하거든. 할머니가 나한테 한 거 생각해 봐.”

 

 누군가는 유진이를 보면서 요즘 저런 젊은이가 어디 있냐고 반색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크게 칭찬할 만한 것도 아닌 게, 고모가 그동안 수고한 것을 보면 유진이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딸 내외를 잃은 이후 IMF 때부터 스스로 경제생활을 하며 유진이를 힘들게 키워온 과정, 그리고 지금까지 유진이를 공부시킨 과정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며 칠 후, 유진이는 다시 우리를 소환했다. 이번에는 다른 이야기였다.

 

 “생각해 보니까, 나도 그렇고 쌤도 그렇고 공부 다 마치고 자리 잡히면, 쌤 부모님도 잘 챙길 수 있고 우리 할머니도 잘 챙길 수 있고……. 그런 거 아닐까? 꼭 교수가 안 된다고 해도 돈 잘 벌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 알뜰하잖아. 둘이 열심히 잘 살면 문제없을 것 같은데. 할머니를 못 모시더라도, 바로 옆집에 모셔놓고 챙겨드리면 되니까.”

 

 정말 결혼 약속을 다 해놓은 상황마냥 구체적으로 계획을 열거했다. 논문 쓰듯 미래를 설계하는 그 진지함에 웃음이 나올 뻔 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다시 응원모드로 바꿔주었다.

 

 “그래. 그렇게 좋다면 충분히 그 사람과 잘 해나갈 수 있을 거야. 둘 다 능력 있는 사람이잖아. 지금 형편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치? 진짜 이런 분은 더 없을 것 같단 말이야.”

 

 아내는 순간 세상의 반은 남자니 굳이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겨우 참아내었다.

 

 그 이후로도 유진이는 틈틈이 우리 집에 찾아와 고민을 늘어놓았다. 하루는 이랬다, 하루는 저랬다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우리도 언젠가부터는 진지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어차피 또 바뀔 테니까.

 

 그러던 어느 날, 조금 더 행복해진 얼굴로 유진이가 찾아왔다. 그 사람과의 앞날에 대한 고민은 둘째 치고, 관계 자체가 진전된 듯 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유진이에 대한 그 사람의 마음이 조금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고나 할까? 사실 유진이는 결혼 이후의 난관에 대해 고민을 했지만, 무엇보다 그 쌤이 자신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염려로도 꽤 속앓이를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보다 분명해지는 듯 하자, 어느 새 집안 형편에 대한 고민은 잠시 접어두었다.

 

 “그 쌤이 얼마 전에 나한테 짧은 아티클 하나 번역해 달라고 했거든. 이것 가지고 스터디하자고 그러는데, 그럼 며칠간은 계속 같이 있어야 되거든. 어제도 처음으로 몇 시간 같이 그 아티클로 스터디했어. 진짜 좋긴 하더라. 잘 통하고.”

 “그럼 최대한 잘 해 보겠다는 거네?”

 “응. 그냥 마음 가는 데로 하고 싶어. 돈이야 뭐, 열심히 하면 다 잘 벌 수 있지 않을까? 난 어떻게 해서든 할머니 잘 챙겨드릴 수 있을 것 같아.”

 

 그날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유진이는 찾아오지 않았다. 우리도 그 이후로 워낙 바빠서 근황을 물어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잘 되가는 듯 했다. 굳이 우리에게 조언을 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한 달 정도가 지나 유진이를 다시 만났다. 그 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도 없었다. 궁금했지만 물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서른셋에게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두 달 정도가 더 지나 유진이는 아내더러 옷을 빌려달라고 했다. 아내는 몇 달 전 학술제 의상 대여건도 마음에 걸려 조금 더 신경써주고 싶었다.

 

 “세미나? 학술제? 무슨 용도야?”

 “응, 숙모. 결혼식!”

 “아. 그래? 그럼 투피스 정장이 낫겠다. 겨울이니 겉에 코트 걸치면 될 것 같고.”

 “아냐. 아냐. 혹시 원피스 없어?”

 

 웬만하면 원피스를 안 빌리던 유진이가 아니던가. 아내는 순간, 그 쌤에게 보다 여성스럽게 보이고 싶어서 그런가 했다. 요즘 왜 그 쌤 이야기를 안 하는지 묻고도 싶었지만 일단 그 쌤을 염두에 두고 옷을 고르는 것 같아 모른 척 하고 최대한 여성스러운 A라인 원피스를 찾았다.

 

 “이거 어때?”

 “좋아. 이렇게 조금 치마가 퍼져있는 게 좋아. 고마워. 숙모. 매번 고마워.”

 “무슨 소리. 나중에 다 물려줄 거니까 기대해. 그런데 웬일로 원피스를 입으려고 그래? 그렇지 않아도 너 원피스 입은 거 보는 게 내 소원이었잖아. 아, 원피스 입을 땐 안경 꼭 벗어라.”

 “에이. 그렇게 신경 안 써도 돼. 뷔페 많이 먹으려고 원피스 입는 거야. 특히 이런 A라인 원피스. 투피스 입으면 배 쪼이잖아.”

 

 그때까지만 해도 유진이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 이뻐보이려고 원피스를 입는다고 하면 민망하니, 돌려서 그런 말을 하늘 줄로 알았다.

 

 이틀 후, 간만에 아내, 우림이와 고모댁에 갔다. 유진이는 예식장에 가고 없었다. 거실 탁자에 청첩장이 있었다. 유진이가 오늘 간 결혼식 청첩장인 듯 했다. 고모는 그 청첩장을 힐끗 보더니 한 말씀하셨다.

 

 “에휴. 우리 유진이는 언제 시집가나? 좋은 사람한테 잘 보내야 하는데. 공부만 하다가 결혼도 못 하는 거 아니야? 저 사람들은 공부하면서도 잘도 가던데.”

 “고모. 오늘 유진이네 대학원 사람이 결혼하나보지?”

 “응. 뭐, 같은 전공에 있는 조교끼리 한다던데? 같이 일해서 친하대.”

 

 갑자기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참고로 유진이네 전공 연구 조교 중에 남자는 그 쌤밖에 없다. 최쌤이라 불리는 그 쌤. 그러고 보니 청첩장 신랑측이 ‘최’가였다.

 그날 저녁, 모른 척을 할지, 그냥 대놓고 물어볼지 고민하다가 내가 총대를 메기로 했다.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 확실하게 마음 정리를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빌린 원피스를 돌려주러 온 유진이를 데리고 얼른 밖으로 나갔다. 괜찮냐고만 물었을 뿐인데, 자기가 알아서 그동안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역시나 숙모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라는 당부도 덧붙였는데, 이건 정말 말하지 말란 뜻이었다. 전처럼 자랑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었으니.

 

 그 쌤이 번역을 부탁하고 며칠간 스터디를 한 이후로 유진이는 우리에게 상담을 청하지 않았었는데, 바로 그 시점부터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유진이가 부탁받은 아티클 번역을 해 주고 스터디도 며칠 하면서 더 없이 친해졌을 때 즈음, 담당 교수님이 유진이를 불렀다.

 

 “유진아. 이거 소정이 국제학술세미나 나갈 때 쓸 논문 주제인데. 이 아티클들 참조해서 선행연구들 정리해 와. 그래도 이번에는 소정이가 번역도 다 해놨으니까 금방 될 거야.”

 

 소정이는 참고로 담당 교수의 딸이며, 몇 달 전 유진이가 쓴 학술 대회 논문 연구자 명단에 무임승차한 사람이다. 유진이 대신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미국에서 국제학술세미나의 한 파트로 대학원생들의 연구 발표가 진행되는데 소정쌤이 나가게 된 것이다. 물론 대학원생들 발표 파트는 전체 세미나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닌데다가 거의 형식적으로 마련된 순서이긴 하지만, 대학원생 입장에서는 꽤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 기회를 어떻게 소정쌤이 잡았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페이퍼 대필은 흔하게 있어왔던 일이라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유진이는 냉큼 자료를 받고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아티클 번역본들을 보고는 잠시 넋이 나간 채로 있었다. 세 개의 아티클 중 하나는 자신이 최쌤 부탁으로 대신 번역해 준 그 아티클이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논문을 쓰려면 꽤 어려운 최신 아티클을 두 편 참조해서 분석해야 하는데, 교수의 딸인 소정쌤이 그 두 편을 최쌤에게 부탁했고, 그 두 편 중 나머지 한 편은 최쌤이 직접 번역하고 나머지 한 편은 유진이에게 부탁한 것이다.

 번역도 번역이지만 내용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이해하는 시간도 많이 필요하다. 그렇게 어렵게 유진이와 스터디까지 하며 분석 정리한 내용을 소정쌤에게 넘긴 모양이었다.

 그래도 참았다. 어차피 연구 조교로서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교수님의 딸이니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했고 시간이 촉박하니 자신에게 맡겼던 것이라 믿었다. 어찌되었든 그 덕에 며칠 스터디도 같이 하며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 자신에겐 잘 된 거라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얼마 후 유진이는 소정쌤이 발표할 논문을 마무리했다. 담당 교수와 소정쌤 그리고 최쌤은 국제학술세미나를 위해 출국했다. 조교들은 돈만 있으면 자유롭게 참석할 수 있었지만 유진이는 돈이 없어서 못 갔다. 담당교수와 소정 쌤은 돈이 있어서 갈 수 있었고, 최쌤은 돈이 없었지만 담당교수가 돈을 대신 내 주어서 갈 수 있었다.

 

 유진이는 며칠간 함께한 시간 덕에 마음이 더 깊어진 상태였다. 국제학술세미나로 세 사람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앞으로의 관계를 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 사람이 입국하고 난지 한 달 후에 유진이는 그 두 사람, 최쌤과 소정쌤의 이름이 적힌 청첩장을 받았다. 사귄다는 말도 없이 청첩장이라니, 혹시나 두 사람이 예전부터 사귀었던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것도 아니라 했다.

 연구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미 소정쌤은 예전부터 최쌤을 마음에 두고 있었고 담당교수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최쌤의 실력이 탁월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담당교수는 반대할 이유도 없었고 그의 집안 형편이 안 좋아 오히려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국제학술세미나 얼마 전부터 소정쌤은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갔고 번역 작업을 그 구실로 삼았다. 자신은 잘 모르니 도와달라며 접근한 것이다. 최쌤 역시 소정쌤의 마음을 눈치 채고 그 기회를 받아들였다. 문제는 그 사이에 유진이에게서도 도움을 조금, 아니 많이 받았다. 시간이 모자라 유진이로부터 받은 도움을 그녀에게 다시 건네준 것이다. 그리고 소정쌤 덕에 공짜로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최쌤은 그곳에서 결혼 여부를 확정지었다. 최쌤 입장에서는 그 기회를 거부할 필요가 없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후 유진이와의 썸 기류도 더 이상 없었다.

 

 유진이는 결혼식날 식권을 두 장이나 받았다. 사진을 찍기 전에도 먹고 찍고 난 후에도 먹었다. 작정하고 원피스를 입고 간만큼 배가 부르도록 먹었다. 허리에 조이는 부분이 없는 원피스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심지어 고모에게 주려고 고모가 좋아하는 달달구리 과자들을 몰래, 잔뜩 챙겨왔다. 어쩐지, 원피스에 큰 백팩을 메고 들어올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다. 나름의 복수를 하려고 갔던 모양이다. 고작 그 정도라는 게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정말로 둘이서 좋아했는데 최쌤이 돈 때문에 배신한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그 쌤은 유진이에게 마음이 없는데 유진이가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유진이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 하다가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소정쌤에게 그냥 가버린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소정쌤이 좋아져서 간 것인지. 이유가 뭔지는 진짜 그 누구도 모른다. 어쩌면 최쌤 자신도 모를지 모른다. 그래도 썸 기류가 있다가 없어진 것을 보면 뭔가 있었던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유진이만 홀로 남았다. 어쩌면 유진이가 가정 형편 등으로 고민을 하던 사이, 그 사람도 역시 같은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그 이후 유진이의 페이스북은 잠잠해졌다. 그녀가 가장 억울했던 것은 설레던 그 기간 동안 엄청난 시간을 낭비했다는 사실이다. 자기 때문에 고생한 할머니를 두고 그렇게 시간을 허비했다는 게 원통할 따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제 공부만 하겠다고 했다. 언제 그 마음이 바뀔지 모르지만, 당장은 정말로 공부만 할 것 같다.

 

 “내가 주제도 모르고, 왜 그랬는지 몰라. 그냥 공부만 할 걸.”

 “무슨 소리야. 너도 사랑해 보고 나중에 결혼도 하고 그래야지. 더 좋은 사람 만나겠지. 최쌤 같은 사람은 안 만난 게 다행이야.”

 “아니야. 난 결혼 안 해. 결혼은 소정쌤 같은 분만 하는 거야. 아침에 필라테스 하고 오후에 네일아트 받을 수 있는 사람, 과제랑 논문은 남들이 다 써줘도 될 정도로 돈도 시간도 남는 사람, 그런 사람이 결혼하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아닌 거야.”

 

 얼마 전, 아내는 유진이를 강제로 끌고 옷을 사주러 갔다. 옷 가게에서 만난 오지랖 넓은 아주머니 두 분이 유진이에게 말을 걸었다.

 

 “학생? 아님 직장인?”

 “네. 지금 대학원생이에요.”

 “그래? 애인 있고? 결혼해야지. 결혼.”

 “네. 아직 생각이 없어서요.”

 

 사실 그런 질문에는 일일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피하거나 웃으면서 지나가면 되는데, 그걸 또 받아주는 유진이다. 유진이의 대답에 오지랖 넓은 아주머니들은 연설을 시작하셨다.

 

 “에휴. 큰일이야, 큰일. 요즘 애들은 자기 하고 싶은 거 하느라 결혼을 안 한다고 그래. 빨리 결혼하고 애도 많이 낳아야 나라가 발전하는데.”

 “그러니까. 요즘 애들 자기 밖에 몰라. 공부가 그렇게 좋아? 돈 벌어서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이봐요. 아가씨. 너무 자기만 생각하고 살면 안 돼. 결혼해서 가정도 꾸리고 그렇게 살아야지.”

 

 유진이가 어떻게 대답해야 될지 몰라 당황하던 사이, 아내는 그 아주머님들을 실컷 째려봐 주고는 얼른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내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고 했다. 결혼을 안 하는 게 아니라 형편이 안 되어 못 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밖에 나온 아내는 교수 뒤치다꺼리 하느라 자기 공부할 시간도 없는 아이를 억지로 끌고 온 게 실수였다며 유진이에게 연신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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