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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라이트노벨
우리는 저마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부제: 난세살이)
작가 : 박은혜
작품등록일 : 2018.12.31

‘시집살이.’ 며느리들의 가슴을 철정 내려앉게 하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 며느리만 힘들까? 자신도 겪어온 며느리 시절을 잘 아는 시어머니가 왜 며느리를 괴롭힐까? 어쩌면 그 시어머니는 나름대로 잘 해보려는 게 아닐까? 언젠가 시어머니가 될 며느리는 자신의 며느리를 어떤 태도로 대할까? 어쩌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하던 그 시어머니와 똑같은 모습이 되어 있진 않을까?

“네가 뭘 안다고 끼어들어?!” 사건 당사자들이 그 일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경험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하지만 때로는 경험했기 때문에 모를 수도 있다. 한 걸음 물러나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해관계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면, 그것을 날 위한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 자신만을 위해 싸우니 해결도 있을 수 없다.

만연해 있는 고부갈등을 제3자의 시각에서 본다면, 끝없이 맞물려 있는 이 복잡한 문제의 원인이 어느 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단 시어머니와 며느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는 저마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 나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분도, 그도, 그녀도, 그 아이도 다 잘못 만났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잘 모른다. 당사자인 만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같고 상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 같다.

‘힘들어봤자 나보다 더 힘들까.’
‘내 주제에 지금 누굴 위로하고 있나.’

누군가를 위로하는 게 사치가 된 세상. 하지만 위로할 수 있어야 위로받을 수 있다. 그 사람이 시대를 잘못 타고났음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도 나처럼 난세(亂世)살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한다면, 조금은 불쌍히 여기며 감싸 안을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어쩌면 상대를 시대의 피해자로 바라볼 수만 있어도 조금은 달라 보일 것이다. 그 사람도 나처럼 힘겹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 자체만으로도 꽤 대단한 사람,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런 소소한 소망 하나를 던져주는 것이 이 책에 나올 인물들의 역할이다.

이 소설은 올해 서른셋이 된 주인공(나)이 세 살 즈음에 가지고 있었던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하지만 지울 수 없는 강력했던 몇 가지 기억을 토대로 전개된다. 그리고 올해, 세 살 즈음이 된 사람들과의 이야기들을 동시에 섞어가며 그들을 지배한 각각의 시대를 조금씩이나마 마주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올해 ‘세 살 즈음’이 된 등장인물들의 스펙은 저마다 찬란하게 서글프다.

- 일흔 세 살 즈음에
올해 일흔 세 살이 된 고모는 1946년에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비상한 머리를 써보지도 못한 채 국졸로 학업을 마쳐야 했다. 194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독일광부로 파견나간 아버지를 잃어야 했고 늦게나마 실현하려던 꿈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포기해야 했으며 194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애틋한 마음 한번 품어볼 기회 없이 원치 않는 결혼을 치러버려야 했다. 그리고 여생을 딸과 손녀를 위해 헌납해야 했다.

- 예순 세 살 즈음에
올해 예순 세 살이 된 아빠는 195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주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어야 했고,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을 거치며 우울한 대학시절을 맛보아야 했으며, 그토록 가혹했던 70년대의 군대를 경험해야 했다. 195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직장도, 집도 쉽게 구했지만 평생을 가족을 위한 ATM기계로 살아야 했고 퇴직 시기에는 첨단문명과 벗할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 쉰 세 살 즈음에
올해 쉰 세 살이 된 엄마는 196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끝까지 대학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지만 대학을 포기해야 했으며 남편이 번 돈으로 편히 산다는 시선 속에 무시를 덤으로 받으며 살아왔다. 거기에 196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맞벌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시대에 노년기를 맞아야 했고 결국 황혼육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 마흔 세 살 즈음에
올해 마흔 세 살이 된 외삼촌은 197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군대를 다녀오자마자 IMF라는 난국에 부딪혔다. 197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렵게 워크맨 사업을 시작했지만 MP3의 등장으로 사업을 시원하게 말아 드셨고,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여 얼른 MP3사업으로 전향했지만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하면서 또 다시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 서른세 살 즈음에
올해 서른세 살이 된 나는 198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군대에 다녀오자마자 미국발 경제위기와 마주했다. 취업난은 극도로 심각해진 상태였고 뭐라도 좋으니 해 보자며 원치 않는 직장에 들어갔다. 198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미친 듯이 벌어도 내 집 마련의 꿈은 현실이 될 수 없는 이상일 뿐이다. 친구들은 “그 나이 되도록 자리도 못 잡냐?”는 핀잔에 이미 녹초가 되어 있다.

- 스물세 살 즈음에
올해 스물세 살이 된 조카(고모의 손녀) 유진이는 199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IMF와 함께 유아기 시절을 보냈다. 199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다는 할머니(나의 고모) 말을 믿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더 이상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은 어려운 시대임을 알고 꿈을 하나 둘 접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포기하는 건데 욕심이 많아 결혼을 안 하고 있다는 핀잔까지 덤으로 들으며 살아간다.

- 열세 살 즈음에
올해 열세 살이 된 사촌동생(외삼촌의 아들) 영우는 2006년에 태어난 우등생이다. 하지만 임대아파트 스펙 덕에 친구조차 마음대로 사귈 수가 없다. 200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곧 다가올 이십대를 4차산업혁명 시대와 함께 맞이하게 되었고, 그동안 죽어라 공부한 외국어도 다 쓸데없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다. 꿈도 함부로 꿀 수 없는 그에게 어른들은 꿈이 없다며 혀를 찬다.

- 세 살 즈음에
올해 세 살이 된 나의 아들 우림이는 201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텅텅 빈 어린이집에서 7시 반까지 부모를 기다려야 한다. 201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진귀한 문명세계를 누리며 자라고 있지만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더없이 막막하게 다가올 뿐이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인생의 5대 난관인 ‘학업’, ‘결혼’, ‘군대’, ‘직업’, ‘육아’에 따라 뒤섞어볼 것이다. 누구라고 더 쉬울 것 없었던 각자의 난세살이를 잠시나마 여유롭게 구경해 보자. 이것저것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을지 모른다. 어쩌면 위로를 던질 여유까지 생길지 모른다.

 
엄마는 애초부터 홀로서기를 못하게끔 설계되었다 (2)
작성일 : 18-12-31 02:10     조회 : 153     추천 : 0     분량 : 6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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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는 애초부터 홀로서기를 못하게끔 설계되었다 (2)

 

 문득 세 살 즈음의 기억이 하나 더 떠올랐다. 세 살 즈음, 엄마는 딱 한 번 나를 버리고 떠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가출인 줄 몰랐다. 그저 매일 보던 엄마가 처음으로 눈앞에서 사라지자 한 시간 정도 목 놓아 울었다는 기억만 난다. 만약 엄마가 장에 갔거나, 놀러갔거나, 머리를 볶으러 간 거라면, 당장 눈앞에 안 보여도 그렇게까지 울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세 살이나 먹은 내가 그런 것 가지고 울리가 없다. 내가 대성통곡한 것은 집안에 감도는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세 살 박이의 촉은 정확했다. 훗날 당사자인 엄마와 일가친척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니 가출이 분명했다.

 

 엄마를 잃은 슬픔은 오래 가지 않았다. 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엄마는 다시 돌아왔다. 다소 허무한 감도 있었다. 잠시나마 엄마 찾아 삼만리의 주인공이 되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동정을 받는 것은 물론, 엄마를 잃었으니 내가 원하는 것들을 채워주라며 시위도 할 수 있었는데, 그럴 기회는 금세 물 건너갔다. 엄마가 떠난 직후, 우는 나를 달래려 뭐라도 다 해줄 것처럼 내 눈치를 보던 아빠는 엄마가 돌아오자마자 베풀던 호의를 싹 거두셨다.

 기억을 최대한 조합해 보면, 엄마는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돌아오셨다. 물론 시간 개념이 없었던 때라 그렇게 유추했는데, 훗날 당사자인 엄마와 일가친척들의 증언을 들어봐도 엄마가 복귀한 것은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물론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꽤 긴 시간 떠나 있었다. 하지만 가출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다.

 

 어찌되었든 가출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보통 엄마가 자식을 버리고 떠난 전적이 있으면 자녀에게 깊은 상처가 남는다고 하는데, 사실 나는 아무렇지 않다. 그냥 재밌는 한 사건 정도로만 기억할 뿐이었다.

 문제는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아빠와 나에게는 그 일이 상처로 남지 않았는데, 가해자인 엄마는 여전히 상처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보통 어린 새끼를 버리고 가출했다면 그 일을 숨기거나 미안해하는 것이 보통인데, 엄마는 숨기기는커녕 내가 성장한 후에도 그 사건을 종종 언급하셨다. 마치 못 다한 말이 있는 것처럼…….

 

 삼십 년이 지나 내 아들이 세 살 즈음이 된 올해. 간만에 아빠, 엄마, 나, 아내, 이렇게 넷이서 뉴스를 시청하게 되었다.

 중요하지 않은 기사로 편성되는 뉴스 뒷부분에서, 치솟는 이혼율에 대한 뉴스가 나왔다. 뉴스인데,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뉴스(News)라고 할 수 있을까? 치솟는 집값과 자살률, 하락하는 결혼과 출산율 등은 내보낼 게 딱히 없을 때마다 순차적으로 써먹는 게 아닌가 싶었다. 굳이 안 봐도 되는 뉴스를 보고 있어야 하나 싶어 채널을 돌리려 할 때, 엄마가 말씀하셨다.

 

 “이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대구나.”

 

 이런 뉴스가 나오면 어른들 입에서 나와야 할 말은 정해져 있다.

 

 “말세다.”

 “요즘 젊은이들 문제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말이 아니구나.”

 

 어떤 말이든 이 세 가지 범주에 속하기 마련이다. 애초에 그런 반응을 유도하려고 내보내는 뉴스니, 일종의 조건반사인 셈이다.

 그런데 엄마의 그 말씀은 뭔가 맥락을 벗어나는 듯 했다. 이혼도 막하는 타락한 세상이라는 뉘앙스가 아니었다. 문맥상으로는 맞는데, 엄마 특유의 어조를 고려하면, 비아냥거림이나 비판이 아니라 동경하는 말투였다. 이어서 엄마는 더 황당한 말씀을 아내에게 꺼내셨다.

 

 “너는 이혼하고 싶으면 당당히 해도 돼.”

 

 뭔 이런 엄마가 다 있나 싶었다. 며느리더러 아들을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 떠나라니. 그게 어디 엄마가 할 소린가?

 

 내가 황당해했다면 아내는 당황스러워 했다. 황당과 당황의 차이는 꽤 미묘하다. 차이를 잘 모르는 사람이 많고 그 차이에 대해 고민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더 많겠지만 나는 그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억울한 감이 있으면 ‘황당’한 것이고, 속마음을 들킨 것 같으면 ‘당황’한 것이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안 했는데 거짓말했다고 하면 황당한 것이고, 진짜 거짓말을 했는데 거짓말한 거 아니냐고 하면 당황하는 것이다.

 아내가 당황하는 것을 보니, 이혼을 생각해 보긴 했나보다. 스스로 결혼의 희생양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당장이라도 정말 이혼해도 되냐고, 이혼을 허락해 주실 거냐고 물을 기세였다. 황당한 엄마의 말에 당황하던 아내는 이내 되도 안 되는 농담으로 분위기 반전을 노렸다.

 

 “어머님은 꼭 이혼하고 싶으셨다는 말씀 같네요? 호호.”

 

 원래 베짱이 좋은 것은 알았지만 직설적으로 저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분위기를 상쇄하려는 유머겠지만, 오히려 엄마의 답변에 분위기는 더 무거워졌다.

 

 “나는 돈이 없어서 못했어.”

 

 사실 이혼을 생각하지 않은 기혼자는 없다. 여성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가정의 가치나, 자녀 때문에 참고 사는 게 대부분이다. 위대한 헌신 아닌가. 이 결단과 의리야말로 사랑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지만 우리 엄마도 다른 한국의 위대한 어머니들과 같을 거라고 믿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나 때문에 이혼을 안 한 거라고.

 그런데 허무하게도 참고 산 이유가 돈 때문이라 했다. 나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나갈 수 없었다. 엄마는 내가 서운해할까봐 얼른 주석을 달아주셨다.

 

 “너무 서운해 하진 마. 만약 돈이 있었으면 너 데리고 나갔을 거니까. 못 데리고 나갔어도 틈틈이 만날 수도 있는 거고……. 돈 있으면 밖에서라도 좋은 데 놀러가고 맛있는 것도 사줄 수 있잖아. 그러니 오해는 하지 마.”

 

 토론대회 출신답게, 아내는 살짝 반론을 제기했다.

 

 “보고 안 보고를 떠나서, 부모가 이혼했다는 사실 자체로 아이들이 상처받아요. 그래서 그냥 참고 사는 거 아녜요? 보고 안 보고를 떠나서 말이에요.”

 “에미야, 잘 봐봐. 매번 싸우면서 둘이 같이 키우는 거……. 무조건 좋은 걸까? 상처받은 엄마가 아이에게 스트레스 풀고, 그렇지 않아도 오만 상처 다 받아 늘 울상 지으면서 키우는 거, 말하지 않아도 다 느껴지잖아. 아이들이 모를까? 불안 속에서 크는 거야. 그게 제대로 키우는 거니? 오히려 더 독이 될 걸? 자녀를 생각해서라도 헤어져야지. 안 그래?”

 “뭐, 그렇긴 하네요.”

 

 무서운 말 같지만 생각해 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자녀 때문에 이혼 못 한다고 하지만, 만약 돈만 있으면 이혼해도 자녀는 만날 수 있다. 특히 아나 좋은 모습으로 두 사람이 아이들을 키우는 것보다는 혼자서라도 늘 밝은 모습으로(데리고 키우든, 아니면 틈틈이 만나든) 대하는 게 훨씬 나은 것일 수도 있다. 정서라는 걸 무시할 수 없으니까.

 

 그럼에도 이혼 이야기를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하는 모자의 모습이 평범한 것은 아니다. 아들 앞에서 며느리에게 이혼해도 된다는 엄마나, 그 이야기를 늘 들어왔다는 듯 받아주고 받아치는 아들이나, 모두 특이했다.

 이런 대화가 자연스러운 이유는 엄마의 가출 사건과 긴밀하게 연결될지 모른다. 아직 엄마가 가출한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 알고 싶지 않고 알 필요도 없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충분히 예상되기 때문이다.

 

 세 살 즈음에는 몰랐지만, 열세 살 즈음 되었을 때는 엄마의 가출이 정당했음을 알 수 있었다. 스물세 살 때는 아는 정도가 아니라 이해하고 공감했다.

 엄마는 자가당착에 빠져계신 시어머니,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 밑에서 꽤 고생하셨다. 할머니의 논리구조는 이렇다.

 

 “남편이 고생해서 벌어다 주는 돈으로 참 편하게 사는 구나.”

 “어머니, 그럼 제가 돈을 벌까요?”

 “아니, 우리 손주나 잘 키울 것이지 무슨 돈을 번다고 그래? 너 지금 제 정신이니?”

 

 이런 적도 있다.

 

 “우리 아들은 대학 나왔잖냐. 너는 우리 아들처럼 공부도 많이 안 했는데 우리 손주 어떻게 키우려고 그러니? 응?”

 “어머니, 그럼 제가 이제라도 대학에 들어갈까요? 애도 곧 국민학교 올라가니까 전처럼 매번 놀아주지도 않을 테니 시간도 좀 있고…….”

 “얘가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니? 여자가 살림이나 할 것이지, 배워서 어따 쓰려고 그래? 그럴 시간에 우리 아들이나 좀 더 신경 써라.”

 

 매번 이런 식이다. 자기 확신에 가득 찬 할머니는 자기모순을 알지 못했다. 할머니는 모순 속에 살아왔다. 할머니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할머니의 어머니도, 할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도 그랬다. 할머니가 낳은 고모도 저렇게 차별하는데 며느리는 오죽할까. 고모와 아빠를 대하는 논리가 이미 모순이었기에, 엄마를 대하는 태도는 놀랍지도 않았다.

 그때마다 나는 할머니보다 외할머니가 더 원망스러웠다. 어쩌면 이 상황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외할머니일 수도 있으니까. 엄마가 대학에 들어가고 그걸로 직업이라도 제대로 가지고 있었으면 저렇게 하실 수 있었을까? (물론 그랬다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겠지. 스무 살에 바로 결혼하시지 않았을 테고, 아빠를 만날 일도 없었을 테니까.)

 

 두 할머니에 대한 원망 때문에 나는 고모를 할머니로 대체했나 보다. 상식이 통하는, 그러면서도 할머니처럼 따뜻한 분, 그런 이상적인 할머니상을 찾다가 고모를 낙점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수련회에서 가족, 친척이야기하면서 눈물 쏙 빼는 타임이 주어질 때면 난 늘 특이한 아이였다. 남들은 아빠, 엄마 이야기하면서 눈물 짜내고, 경우에 따라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하면서 눈물 짜내는데, 나는 고모 이야기를 꺼냈으니 말이다.

 

 엄마의 이혼 포기 사유도 정확히 들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엄마에게 막 대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돈’이라는 한 글자에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경제권이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활용하셨다. 아무리 못되고 호되게 굴어 상처를 준들, 나갈 래야 나갈 수가 없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셨다. 어쩌면 할머니도 젊었을 때 그러셨을지 모른다. 그만큼 잘 알고 있었고 누구보다 당당했다. 마치 직장에서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 법한 단순 노동 직원에게 오만갑질을 다 하는 것처럼.

 엄마가 그날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집에 돌아온 것도 결국은 돈 때문이었다. 경제력을 올무로 그렇게 엄마는 우리 집에 잡혀 있었다.

 엄마만이 아니다. 다들 그랬다. 내 친구 엄마도, 내 전 여자친구 엄마도, 내 윗집 엄마도, 내 아랫집 엄마도 다들 그랬다.

 

 그러고 보면 주변 돌싱녀들을 보면 대부분 경제권을 가지고 있다. 자기 일이 있으니 이혼할 수도 있다. 애들에게 미안해 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경제권이 있어 저마다 애들을 다 데리고 나왔으니까. 아빠의 부재에 대해서는 안타까워 하지만, 그런 사람을 아빠로 두느니 혼자 키우는 게 아이한테 더 좋다고 단언한다. 매번 싸우는 꼴 보이는 것보다 이게 아이 정서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여성들과 달리, 우리의 엄마들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떠날 수 없었다. 경제권이 없으니 그럴 수 없었다. 능력은 있는데 경제권을 가질 기회가 애초부터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먹고는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엄마는 고모부의 바람으로 일찍이 홀로 된 고모를 그토록 부러워했다고 하셨다. 똑똑한 머리에 하고 싶던 공부도 못하고 스무 살에 팔려온 신세는 똑같은데, 고모는 고모부의 바람 덕분에 자연스럽게 해방되었지만 엄마는 그럴 수 없었다. 특히, 고모는 일찍이 홀로 되어 닥치는 일은 다 해낼 근성이라도 얻었으나, 평생 육아와 집안일만 하신 엄마는 그럴 자신이 없다. 그건 분명 엄마에게 근성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근성을 발휘하려고 할 때마다 아예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 버렸으니 이제는 뭔가 해볼 의지조차 사라졌다. 스스로 없앤 게 아니라 박탈당했다. 고3 때까지 날리던 그 실력은 이미 재생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사라져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엄마는 가끔 아빠더러 “남들 다 피는 바람, 당신은 왜 안 피냐?”며 말도 안 되는 원망을 늘어놓으셨다. 어느 정도 경제적 지원을 받고 시댁으로부터 탈출할 기회는 그뿐인데, 바람을 두려워하는 아빠 덕에 그 기회조차 없었으니, 원망이 되셨던 모양이다.

 사실 처음에는 그것이 아빠에 대한 서툰 칭찬인 줄로만 알았다. “우리 남편, 바람도 안 피고 참 장해요.”라고 말하기 쑥스러워 반어법을 쓴 줄 줄로만 알았는데, 그건 칭찬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진심이었다.

 엄마는 아빠와 사이가 나쁘지 않다. 사랑해서 결혼한 건 아니라지만, 서로 배려하고 잘 챙긴다. 중매로 맺어진 인연이지만 점점 사랑해 가시는 듯 했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정기적으로 받는 무시와 상처는 아빠를 포기해도 좋을 만큼 강했다. 그래서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늘과 같은 발언을 하실 수 있었다. 심지어 아빠 앞에서, 그리고 며느리 앞에서.

 

 그날 이후 태도가 바뀐 사람은 아내뿐이다. 행여 엄마 말씀을 받들어, 당장이라도 나가는 게 아닌가 염려되었지만 오히려 아내는 부드러워졌다. 사실 아내는 가끔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이 힘들어 약간은 까칠한 말투로 한탄을 내뱉곤 했다.

 

 “그래도 어머님은 당신 키울 때 일 안 하고 육아만 했잖아. 우리 엄마도 그렇고. 에휴. 그때는 맞벌이 아니어도 생활할 수 있고 집도 살 수 있었는데, 이놈의 시대는 왜. 나도 옛날에 태어났어야 하는데.”

 

 하지만 엄마의 이혼 포기 사유를 정확하게 듣고 난 다음부터 아내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엄마의 발언 이후 우리 집 안에서 나타난 유일한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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