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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라이트노벨
우리는 저마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부제: 난세살이)
작가 : 박은혜
작품등록일 : 2018.12.31

‘시집살이.’ 며느리들의 가슴을 철정 내려앉게 하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 며느리만 힘들까? 자신도 겪어온 며느리 시절을 잘 아는 시어머니가 왜 며느리를 괴롭힐까? 어쩌면 그 시어머니는 나름대로 잘 해보려는 게 아닐까? 언젠가 시어머니가 될 며느리는 자신의 며느리를 어떤 태도로 대할까? 어쩌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하던 그 시어머니와 똑같은 모습이 되어 있진 않을까?

“네가 뭘 안다고 끼어들어?!” 사건 당사자들이 그 일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경험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하지만 때로는 경험했기 때문에 모를 수도 있다. 한 걸음 물러나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해관계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면, 그것을 날 위한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 자신만을 위해 싸우니 해결도 있을 수 없다.

만연해 있는 고부갈등을 제3자의 시각에서 본다면, 끝없이 맞물려 있는 이 복잡한 문제의 원인이 어느 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단 시어머니와 며느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는 저마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 나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분도, 그도, 그녀도, 그 아이도 다 잘못 만났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잘 모른다. 당사자인 만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같고 상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 같다.

‘힘들어봤자 나보다 더 힘들까.’
‘내 주제에 지금 누굴 위로하고 있나.’

누군가를 위로하는 게 사치가 된 세상. 하지만 위로할 수 있어야 위로받을 수 있다. 그 사람이 시대를 잘못 타고났음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도 나처럼 난세(亂世)살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한다면, 조금은 불쌍히 여기며 감싸 안을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어쩌면 상대를 시대의 피해자로 바라볼 수만 있어도 조금은 달라 보일 것이다. 그 사람도 나처럼 힘겹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 자체만으로도 꽤 대단한 사람,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런 소소한 소망 하나를 던져주는 것이 이 책에 나올 인물들의 역할이다.

이 소설은 올해 서른셋이 된 주인공(나)이 세 살 즈음에 가지고 있었던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하지만 지울 수 없는 강력했던 몇 가지 기억을 토대로 전개된다. 그리고 올해, 세 살 즈음이 된 사람들과의 이야기들을 동시에 섞어가며 그들을 지배한 각각의 시대를 조금씩이나마 마주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올해 ‘세 살 즈음’이 된 등장인물들의 스펙은 저마다 찬란하게 서글프다.

- 일흔 세 살 즈음에
올해 일흔 세 살이 된 고모는 1946년에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비상한 머리를 써보지도 못한 채 국졸로 학업을 마쳐야 했다. 194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독일광부로 파견나간 아버지를 잃어야 했고 늦게나마 실현하려던 꿈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포기해야 했으며 194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애틋한 마음 한번 품어볼 기회 없이 원치 않는 결혼을 치러버려야 했다. 그리고 여생을 딸과 손녀를 위해 헌납해야 했다.

- 예순 세 살 즈음에
올해 예순 세 살이 된 아빠는 195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주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어야 했고,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을 거치며 우울한 대학시절을 맛보아야 했으며, 그토록 가혹했던 70년대의 군대를 경험해야 했다. 195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직장도, 집도 쉽게 구했지만 평생을 가족을 위한 ATM기계로 살아야 했고 퇴직 시기에는 첨단문명과 벗할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 쉰 세 살 즈음에
올해 쉰 세 살이 된 엄마는 196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끝까지 대학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지만 대학을 포기해야 했으며 남편이 번 돈으로 편히 산다는 시선 속에 무시를 덤으로 받으며 살아왔다. 거기에 196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맞벌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시대에 노년기를 맞아야 했고 결국 황혼육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 마흔 세 살 즈음에
올해 마흔 세 살이 된 외삼촌은 197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군대를 다녀오자마자 IMF라는 난국에 부딪혔다. 197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렵게 워크맨 사업을 시작했지만 MP3의 등장으로 사업을 시원하게 말아 드셨고,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여 얼른 MP3사업으로 전향했지만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하면서 또 다시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 서른세 살 즈음에
올해 서른세 살이 된 나는 198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군대에 다녀오자마자 미국발 경제위기와 마주했다. 취업난은 극도로 심각해진 상태였고 뭐라도 좋으니 해 보자며 원치 않는 직장에 들어갔다. 198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미친 듯이 벌어도 내 집 마련의 꿈은 현실이 될 수 없는 이상일 뿐이다. 친구들은 “그 나이 되도록 자리도 못 잡냐?”는 핀잔에 이미 녹초가 되어 있다.

- 스물세 살 즈음에
올해 스물세 살이 된 조카(고모의 손녀) 유진이는 199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IMF와 함께 유아기 시절을 보냈다. 199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다는 할머니(나의 고모) 말을 믿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더 이상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은 어려운 시대임을 알고 꿈을 하나 둘 접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포기하는 건데 욕심이 많아 결혼을 안 하고 있다는 핀잔까지 덤으로 들으며 살아간다.

- 열세 살 즈음에
올해 열세 살이 된 사촌동생(외삼촌의 아들) 영우는 2006년에 태어난 우등생이다. 하지만 임대아파트 스펙 덕에 친구조차 마음대로 사귈 수가 없다. 200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곧 다가올 이십대를 4차산업혁명 시대와 함께 맞이하게 되었고, 그동안 죽어라 공부한 외국어도 다 쓸데없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다. 꿈도 함부로 꿀 수 없는 그에게 어른들은 꿈이 없다며 혀를 찬다.

- 세 살 즈음에
올해 세 살이 된 나의 아들 우림이는 201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텅텅 빈 어린이집에서 7시 반까지 부모를 기다려야 한다. 201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진귀한 문명세계를 누리며 자라고 있지만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더없이 막막하게 다가올 뿐이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인생의 5대 난관인 ‘학업’, ‘결혼’, ‘군대’, ‘직업’, ‘육아’에 따라 뒤섞어볼 것이다. 누구라고 더 쉬울 것 없었던 각자의 난세살이를 잠시나마 여유롭게 구경해 보자. 이것저것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을지 모른다. 어쩌면 위로를 던질 여유까지 생길지 모른다.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는 끝난 지 오래다
작성일 : 18-12-31 01:46     조회 : 168     추천 : 0     분량 : 5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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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는 끝난 지 오래다

 

 고모의 손녀 유진이가 모유수유를 끝낸지 일주일이 지난 때였다. IMF 한파가 밀려오기 직전이라 여름인데도 왠지 쌀쌀했다. 뉴스를 틀면 한보사태를 비롯해 기업들이 이리저리 휘청이던 때라 그런지, 실제 기온이 높은데도 체감 온도는 오싹할 정도로 쌀쌀했다.

 그러나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든, 고모는 예쁜 손녀 덕에 웃을 맛이 났다. 28년 전, 딸이 태어났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렇게 쉰하나가 된 고모는 특별한 감격 속에 여름을 나고 계셨다.

 

 고모는 일 년 반 동안 육아로 고생했을 딸에게 선물을 해 주셨다. 5박 6일간의 괌 여행을 서프라이즈로 준비한 것이다. 사위와 같이 다녀오라며 두 장이나 끊어주셨다. 무리를 했지만 그래도 기뻤다. “그 기간 동안은 내가 유진이를 볼 테니 걱정 말라.”는 당부까지 덧붙이셨다. 마침 유진이도 모유수유를 끊었을 때라, 엄마가 잠깐 떨어져 있는다 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거기에 사위도 그때에 맞춰 휴가를 낼 수 있게 되어 참 다행이었다. 조퇴, 명퇴 붐이 일기 시작할 때라 휴가를 앞두고 눈치작전을 보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사위는 일주일 내내 야근을 감행하며 휴가를 당당하게 따냈다.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가는 듯 했다.

 

 딸 부부가 떠나고 몇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유난히 밝은 아침이었다. 문득 고모는 출국하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한 게 내심 아쉬웠다. 물론 돌이 막 지난 유진이를 들쳐 업고 공항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그건 오히려 유진이에게 미안한 일이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내 아쉬움을 접으려는데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아하, 오늘 이회창, 대선 후보 토크쇼 나오는 날이지?”

 

 고모 입장에서는 살다 보니 별 일도 다 있다 싶었다. 오십 평생 살아오면서, 대선 후보가 토론회도 아니고 토크쇼에 나온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것도 주부들이 즐겨보는 <10시 임성훈입니다>라는 아침 방송이었다. 시대가 변하니 이제는 이런 일도 생기나 싶었다. 솔직히 이전까지 고모에게 대선 후보들의 토론회는 꽤 부담스러웠다. 알 수 없는 정치, 경제, 국방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토크쇼는 그런 얘기는 다 덮어두고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위주로 나눈다. 고모에게는 제격이었다. 정치에 대해 깊게 알지 못했던 고모에게도 그 방송만큼은 흥미로웠다. 정치를 잘 몰라도 대선 때만큼은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고모에겐 그 하나도 작은 행복이었다.

 

 “열 시에 시작하지?”

 

 시간에 맞춰 텔레비전 전원을 켜고 채널을 돌렸다. 하지만 당연하게 나와야 할 그 프로그램은 나오지 않았고 뉴스 속보만 연이어 나왔다.

 

 “뭐야. 왜 안 나와? 무슨 일 터졌어?”

 

 뉴스 속보가 터지는 거야 가끔 있는 일이니 그러려니 싶었다. 한동안 한보청문회니 뭐니 하면서 속보가 난무한 적이 많아, 놀랠 것도 없었다. 기다리는 방송이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까지 유진이 이유식이나 만들어야겠다며 싱크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싱크대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괜히 뉴스 속보 소리에 발걸음이 멈춰졌다. 뉴스에서 흘러나온 것은 KAL기 추락사고 소식이었다.

 

 “괌에서 칼(KAL)기 폭파? 에구. 저런…….”

 

 고모는 휴머니스트였기에 마음이 아팠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도 우리 딸 부부는 대한항공 탔으니 다행이지.”

 

 고모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KAL기가 외국 항공사인줄로만 알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내 마음을 쓸어내리며 다시 싱크대로 향했다. 별일 아니란 듯이 이유식을 만들고 배고프다고 보채는 유진이에게 한입 두입 떠먹여주었다.

 

 “그나저나 토크쇼는 왜 안 하는 거야. 늦게 시작하면 못 보는데.”

 

 한 시간 정도 지나, 동생(나의 아빠)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과묵한 사나이였던 아빠는 흥분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누나. 누나! 어떡해.”

 “응? 왜?”

 “칼(KAL)기……. 칼(KAL)기 추락…….”“아이고, 야. 괜찮아. 난 대한항공 끊어줬어. 걱정 말고 일 봐.”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있다. 어쩌면 계속 모르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를 수 없고 몰라선 안 될 일이었다. 아빠와 통화를 이어가던 고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 영어를 모르는 고모는 대한항공의 약자가 KAL이란 것을 알 턱이 없었다. 아빠와의 통화로 사실을 안 고모는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 잠시 정신을 놓아버렸다. 쓰러진 고모 옆에서 유진이는 우리 아빠가 도착할 때까지 한 시간 내내 울기만 했다.

 

 그 해 여름, 열 두 살이었던 나는 처음으로 분향소라는 곳에 가 보았다. 그곳에서 고모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셨다. 그저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하셨다.

 

 “그래도 우리 딸, 원 없이 공부해서 다행이다.”

 “대학이라도 보냈으니 다행이다.”

 

 다행이라고 하시지만 그 ‘다행’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다행’은 아님을 거기 모인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고모는 자신이 못다 한 공부를 자신의 딸에게 원 없이 시켜주셨다. 동시에 고모의 딸, 그러니까 나의 사촌 누나는 그 와중에도 학업과 알바를 병행하며 고모를 틈틈이 호강시켜주었다. 하지만 사촌 누나의 효행이 이 자리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이럴 거면 효도를 안 한 게 더 효도일지 모르겠다 싶었다.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일까? 이제 열두 살, 학년으로는 6학년(빠른 86)인 내가 그런 역발상적 사고를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가장 큰 상처를 가슴에 묻은 고모는 이후 유진이만 바라보며 사셨다. 딸에게 했던 것처럼 유진이를 위해서도 온갖 노력을 다 쏟으셨다. 특히 학업에 있어서만큼은 더욱 그랬다. 자신만큼은 그 악순환의 고리를 꺾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걸 꺾었다.

 다행히 고모 머리를 닮아서인지 딸도, 그 딸의 딸도 머리가 좋았다. 머리가 좋으니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공부를 잘 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이는 사실 부모에 대한 아픔이 그리 크지 않다. 아무것도 모를 때 일어난 사고라 그냥 외할머니를 아버지이자 어머니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면서도 은연중에 느껴지는 외할머니, 곧 나의 고모에 대한 특별한 고마움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했다. 아니, ‘열심히’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무지막지하게 공부했다. 머리도 좋은데 노력까지 더하니,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앞날이 창창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거기에다가 그 나이에는 들기 힘든 ‘철’까지 겸비했다. 그마저도 지 엄마(나의 사촌누나)를 닮았다. 일찍 철이 들다 보니, 할머니에게 무리하다 싶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참고로 유진이는 외할머니를 할머니라 부른다). 나름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학원도 다니고 싶었지만 감히 그 소리를 꺼낼 수가 없었다. 고모가 학원 다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씀하실 때도 문제없다고 응수했다.

 

 “할머니. 나 똑똑한 거 알지? 학원? 공부 못하는 애들이나 다니는 거야.”

 

 고모도 당연히 그런 줄로만 아셨다. 고모 시대 때만 해도 그랬으니까. 아니 조카인 내가 공부하는 과정을 지켜보았을 때만 해도 그랬으니까. 정말로 학원을 안 다녀도, 사교육에 큰돈을 바치지 않아도 잘 할 사람은 잘 했으니까. 유진이도 당연히 그럴 줄로만 아셨다. 비록 고모가 직접 공부하신 것은 아니더라도 주변을 봤을 때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셨다. 심지어 유진이는 제 힘으로 명문고에 들어갔을 정도니 유진이의 말을 굳이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설마 착한 유진이가 거짓말을 할까.

 

 유진이가 원인 모를 재수생이 되고 나서야 고모는 알게 되었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십여 년 전부터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끝났다는 게 통계적으로 밝혀졌지만 고모는 2015년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고모는 유진이가 재수를 한다고 했을 때, 수능에서 큰 실수를 했나 싶었다. 그래서 아쉬웠지만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1년 더 공부하면 제 실력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진실을 안 것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유진이의 재수는 유진이의 실수가 아니라, 자기 잘못이었음을……. 내신 비율이 높아지면서 명문고 내신기출문제를 공유하는 학원에 보냈어야 하는데, 그것 없이 무식하게 공부하니 요령을 산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선배들이 치렀던 내신 기출문제가 학교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유되는 것은 옛날 말이었다. 명문고일수록 과거 기출문제를 꼭꼭 숨겼다. 그것을 유일하게 공유할 수 있는 곳은 내신학원이었고, 그 내신학원을 다니는 사람은 시험을 치를 때마다 익숙한 문제 앞에서 환호했다. 반면, 학원을 가지 못한 유진이는 아무리 실력이 좋다 한들, 한없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비상한 머리로도 극복 못할 그런 산이 존재했던 셈이다. 시험은 실력이 아닌 기술이었다.

 고모는 수시 전형이 바뀌어 교내 대회 결과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교외 경시대회 입상만으로 안심했던 것을 통탄하셨다. 그마저도 자신의 잘못이었다며 눈물을 보이셨다. 하필 유진이가 대학에 들어갈 그 시기에, 교외 경시대회가 더 이상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게 되었다. 대신 교내 활동이 중요해졌다. 조금 황당한 정책이지만, 실제로 그랬다. 그러니 엄마의 치맛바람에 의존할 수 없었던 유진이에게는 더없이 불리했다. 실제로 유진이보다 성적이 낮지만 교외 수학경시에서 상을 종종 탔던 아이가 명문대에 수시로 입학할 수 있었으니.

 고모가 생각하는 자신의 잘못은 한 가지 더 있었다. 다들 수시컨설팅 학원을 다니며 입학의 문을 넓혀 가는데, 그것을 유진이에게 해 주지 못했다. 그 역시 고모는 잘못이라 여겼다. 그러면서 꽤 오래 자책하셨다. 그 기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렇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던 고모는 모든 게 자기 잘못이라며 한참을 미안해 하셨다. 유진이는 그런 고모를 보며 모든 게 부족한 자기 탓이라며 미안해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쓸데없는 죄책감을 가진 채, 1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유진이는 악바리 근성으로 재수 끝에 명문대에 들어갔다. 원하는 학과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무리였다. 개천에서 용이 날 뻔 했으나, 그 기대는 무참히 깨져버렸다. 그래도 유진이는 만족했다. 이 정도만 해도 선방한 거라 믿었다. 실제로 입시 세계에선 그마저도 기적이었다.

 

 이후 유진이는 교수의 꿈을 안고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어느 정도 꿈을 포기한 상태다. 중고등학교 때만큼이나 열심히 공부하지만 그 꿈을 이룰 가능성은 현저히 낮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진이는 꿈을 꾸지만 동시에 꿈을 포기하며 살고 있다. 또한 꿈은 포기했지만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멈추지 않는다.

 고모는 아직 모른다. 유진이 정도면, 그 정도 뛰어난 아이라면 당연히 교수가 되고도 남는다고 믿고 있다. ‘유학만 다녀오면 교수가 되던’ 희망찬 그 시대의 꿈에 젖어 있을 뿐이다.

 

 그런 유진이와 고모를 볼 때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열렬한 지원으로 원하는 공부를 다 할 수 있었던 유진이나, 소원하던 공부를 처음부터 포기해야만 했던 고모나 결과적으로는 똑같다고……. 유진이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게 이 시대의 원칙 아닌가. 그러니 이래나 저래나 결과적으로는 똑같을지도 모르겠다.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고모도 안타깝지만, 고생했는데도 원하는 것을 못 얻는 유진이는 어쩌면 더 억울할 지도 모른다. 산꼭대기에 있는 보석을 갖고 싶어 하는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애초에 산에 오르지 못했고, 또 한 사람은 꼭대기까지 올라갔지만 선수 친 누군가에 의해 보석을 못 가졌다면 결과적으로는 둘 다 마찬가지 아닌가. 누군가는 오르는 과정에서 보람이라도 느꼈으니 된 거 아니냐고 할지 모르나, 직접 그 고생해 본 사람에게 보람 따위를 운운하는 것은 무지의 산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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