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부의 하얀 마루저(천상에서 자라는 닥나무 껍질로 만든 천인들의 종이)위에 피가 떨어지자, 마루저 위로 붉은 거룩어(신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꿈틀거리며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죽은 자의 이름이다!”
격앙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거룩어로 된 붉은 글자가 선명해졌다. 그러나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붉은 글자는 또다시 꿈틀거리더니 마루저의 지면 위로 떠올랐다. 그러더니 이내 모래알갱이처럼 산산이 부서지고는 연기처럼 허공사이로 사라져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나는 그저 어안이 벙벙하여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한동안 애꿎은 두 눈만 껌뻑껌뻑 거리고 있었다. 초점을 잃어버린 멍한 두 눈엔 옥색의 핏자국만 마루저 위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안 돼! 안 돼!”
정신을 차린 나는 연기처럼 사라진 글자들을 잡기위해 미친 듯이 양팔을 허공에 휘저었다. 나는 허겁지겁 책장을 넘기고 날카로운 손톱을 반대편 손등 깊숙이 찔러 넣었다. 손톱에 묻어나온 핏방울을 마루저위에 떨어뜨렸다. 똑같은 일들의 반복이었다. 무슨 실수를 저지른 것인지 따져보지도 않은 채, 이성을 잃은 나는 똑같은 일을 쉼 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그 어리석은 짓은 새벽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사자부의 마지막 책장위에 옥빛 핏자국만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허탈해진 나는 사자부를 땅바닥에 팽개쳤다. 바위에 등을 기대고 새벽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우박이 멈췄는지 성운이 동쪽지면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성운의 꼬리를 보자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운의 꼬리를 향해 미친 듯이 소리쳤다.
“왜? 왜 저를 버리십니까? 왜?”
그날이후, 나는 더 이상 기도하지 않았다. 바위에 걸터앉아 성운이 떠오르기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내팽개친 사자부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습관 같은 일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습관이라 봐야 고작 몇 개 되지도 않았다. 해가 떴는지 우박이 내리는지 며칠이 지났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냥 바위에 기대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두 눈은 뜨고만 있었을 뿐, 무엇을 보았는지 생각나지도 않았다.
“챠르르…챠르르…”
바람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바람에 쉼 없이 넘어가는 사자부의 책장위로 옥빛 점들이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이 별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힘겹게 일어나 사자부를 집어 들고, 다시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사자부의 첫 장을 펼치고 손등 깊숙이 날카로운 손톱을 찔러 넣었다. 손톱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손톱 끝에 방울졌다. 손톱 끝에서 대롱거리며 위태롭게 매달려있는 모습이 지금의 내 처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피로 나는 마루지 위에 한 땀 한 땀 정성껏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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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풍백이다! 먼 훗날 이 글이 어떤 의미가 될지 나는 모른다. 아니!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해도 상관없다. 그저 이 기록을 남긴 자가 나! 풍백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족하다. 나의 이야기는 아주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