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끝이야.
완벽한 침묵, 견고한 어둠, 묵직한 공기로 가득 채워진 세계.
한 번도 와본 적 없지만 너무나 익숙해. 난 이미 그 속에 있다, 그 속에 내가 있다는 걸 안다. 공기 속을 떠도는 날벌레 같은 진동이 나를 집어삼킨다, 아니 내가 집어삼켰나? 그 떨림이 아랫배에서부터 올라와 가슴으로 목젖으로 관자놀이로 그리고 정수리까지 이어지지, 내 몸에 흐르는 가벼운 지진. 걱정할 것 없어, 언제나 그래왔잖아? 들숨 한 번, 날숨 한 번, 그래, 호흡은 이렇게 이어지는 거야. 끝없는 반복, 반복, 반복으로……
“태인 씨, 스탠바이 3분전.”
……하지만 언제까지? 언제까지 계속되는 거지?
수많은 그림자들이 꿈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어. 너무 놀라지마, 아무런 감정도 갖지 마. 서서히 숨이 막혀 오는데? 괜찮아진다니까. 영원히 계속되는 고통이란 없어, 그 누구에게라도 반드시 한 번의 안식은 주어지는 법이니까. 그렇구나, 모든 의문들이 아스라한 숨결 속에서 사라져, 어쩐지 간지러운 느낌이야. 이젠 만족스러운 미소가 얼굴에 떠올라 있을 거야. 그래, 지금이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을 떠도 좋아.
화장대 거울의 사이드 라이트가 깜박거리고 있다. 대기실의 환한 빛에 익숙해지려 나는 눈을 부릅떴다. 두터운 파우더로 뒤덮여 솜털 하나 보이지 않는 새하얀 얼굴과 흑진주처럼 빛나는 아이섀도의 눈. 그 지독한 대조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약간의 현기증이 일었지만 숨을 고르자 곧 괜찮아졌다.
살짝 흐트러진 왼쪽 눈썹을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레 다듬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지그시 눌러 다시 앉힌다. 강한 힘은 아니지만 쉽게 뿌리칠 수 없을 정도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누구야? 누가 여길 함부로……
거울을 통해 그 누군가가 비친다. 그의 배가 가슴이 그리고 이내 얼굴이 드러난다.
...뭐가 그리 심각해?
거울 속의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건다. 입술도 움직이지 않고. 그러나 나는 그 목소리를 더 할 수 없이 선명하게 들을 수 있다. 심지어 그의 심장박동 소리, 혈액이 흐르는 소리까지도. 그 누군가의 얼굴이 내 얼굴 바로 옆으로 스윽 다가선다. 내 눈은 실핏줄이 터져나갈 만큼 커진다.
그는 나였다.
거울 속에 두 명의 내가 있다. 공포에 질려 차가운 땀을 흘리는 나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내 귓가에 뭔가를 속삭이는 내가. 순간 귀를 후벼 파는 금속성의 날카로운 이명과 절대적인 암흑이 동시에 나를 습격했다. 나는 귀를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도 어디선가 들려오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그들은 언제나 거기 있었고,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들을 만나러 가야만 했다.
반짝 눈을 뜨자, 어느 샌가 나는 무대로 향하는 복도에 서있었다. 머리는 어지럽고 속은 메슥거렸다. 복도 저 끝에서는 어슴푸레한 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천천히 한 걸음, 또 한 걸음, 저 빛을 향해 가야한다. 오래된 터널 안에 버려진 것처럼 걸음을 뗄 때마다 다시 숨이 막혀온다. 의식이 끊어질 듯 흐릿해졌지만 가야한다. 저 끝에만 가 닿으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내가 뭐라고 했었지? 나는 흐트러지는 기억을 붙잡으려 온 정신을 집중한다. 내가 했던 말은……
이봐,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이야.
단독! 아이돌배우 원태인, 무대 위 의문의 죽음!
특종!! 배우 원태인 의문의 최후!! 사고인가? 사건인가?
독점!!! 배우 원태인의 그 마지막 순간을 밝힌다!!!
-관련기사 2면에 계속
“어젯밤 9시 경, 연극 <왕관 없는 왕자>에 출연해 공연 중이던 배우 원태인 씨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최정상의 인기를 구가하던 젊은 배우의 죽음, 그것도 무대 위에서 벌어진 죽음이라는 사실에 충격은 배가 되고 있습니다. 원 씨의 죽음을 불러온 것은 단도로 심장을 찌르는 극 중 자살 장면, 원 씨는 장면을 마치고도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했고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스태프들은 황급히 공연을 중단하고 119에 신고했지만 원 씨는 구급차로 이송 도중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경찰은 공연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자세한 경위를 조사하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수사에 착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원태인 씨의 죽음이 전해지자 네티즌들의 접속으로 주요 포털과 인터넷 뉴스 사이트가 한 때 마비되는 등 추모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