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또라이 위에 미친놈
어떻게 말해야할까? 아니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 하는 걸까? 시작은 내가 어떤 또라이에게 납치되었다는 것?
‥‥‥빌어먹을.
라면을 먹다 깜빡 잠이 든 것이 화근이었다. 눈 떠보니, 손과 발이 묶여 있는 납치 상태였고, 나는 그렇게 약 일주일 동안 이 낯선 세계에 방치되었다.
난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빙의 되었다.
‥‥‥우선, 탈출부터 하자.
아직 다 먹지 못한, 이제는 식어버린 라면을 기억하며 나는 오로지 이 감방 탈출을 위한 정보를 차근차근 모으기 시작했다. 사실 감방 생활하면서 정보를 모으는 게 쉽지는 않다.
그래, 처음엔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 빙의 된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종종 소설을 보며 하루를 보내곤 했으니까.
그 중에서도 가장 재밌는 게 로맨스 판타지였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 오기 전 읽은 소설이 있었다. <몰락한 대공님의 시녀로 살아남기> 제목처럼 내 취향만 때려 박은 19금 소설이었다.
보통 최근에 보던 소설에 빙의되곤 하니까‥‥‥. 설마 내가 그 소설 속으로 들어온 게 아닐까? 온통 19금으로 펼쳐진 짜릿한 세계!
그렇다면 대환영이었다. 무료한 한국의 삶에서 지치던 찰나 뜻밖의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네 죄를 아직도 모르겠느냐?”
여기엔 절륜한 대공님이 없다. 또라이 납치범만 내 앞에 앉아 있을 뿐이다.
“하아, 모른다니까요.”
영문도 모른 채 빙의된 것도 모자라, 납치된 지 오늘로 딱 일주일.
대망의 디데이였다. 또라이한테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이런 멍청한 것. 너 때문에 지금 모든 게 다 꼬였다고. 얼른 기억해! 그렇지 않으면 오늘로 널 죽일 거다.”
저 빌어먹을 놈.
고약한 인상에 수염을 아래로 기르는 게 취미인 납치범의 이름은 로바인 베르테 자작.
하층민들에게는 임금 체불에 악덕으로 유명한 그는, 무고한 사람들을 수틀리면 바로 제 전용 감옥에 가둔다는 흉흉한 소문을 가진 자였다.
얼굴은 멀쩡하게 생겼더니, 그런 이상한 취향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나에게 납치범에 대한 정보를 배달하고 도움을 준 3번 방 동기 덕분에 나는 오늘 여기서 탈출할 기회를 얻었다.
“아니. 억울해 죽겠네.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이것 좀 풀어주면 안돼요?”
사실은 내 죄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모른 척 시간을 끄는 것 뿐. 3번 동기에게 듣기로는 나에게 괘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했다. 물론, 내가 빙의한 캐릭터의 능력이겠지만.
“안 돼. 또 날뛰면 어떡해? 우, 울지 마! 뭣들 하느냐! 당장 코를 막으래도!”
내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보던 베르테 자작은 기겁을 하며 코를 막았다. 코를 막아봤자, 별 수 있을까.
“‥‥‥.”
페르돔.
사람을 끌어당기고 매혹시키는 강한 능력. 페르몬과 비슷한 거 같은데, 약물 이름이 페르돔이라 한다.
이 페르돔의 능력은 꽤 상당했다.
울거나 웃거나 페르몬을 내뿜는 행동을 하면 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매혹시킬 수 있는 기이하고도 특별한 능력이었다. 대부분은 몸이 흐물흐물 거리며 힘이 사라지거나 사랑에 빠진 듯한 행동을 한다.
눈동자에 일시적으로 파란 기운이 도는 자는 필시 페로몬에 당한 거였으니, 그래서 이 곳 사람들은 내가 울기만 해도 벌벌 떠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간 정보가 1도 없었으니, 일주일째 차가운 감옥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흐‥‥‥.”
“울지마, 제발! 당장 저 자의 눈을 막고 귀, 아니 온갖 얼굴을 막아라!”
기사들이 내게 다가와 귀를 막고 눈을 막았다.
“읍읍!”
나는 속에서 할 말 못할 말 다 뱉으며 필사적으로 발악했다.
“흐응.”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기이한 소리가 흘렸다. 나를 막은 손들이 스르르 힘없이 풀렸다.
“‥‥‥뭐야.”
꼭 그렇게 나사 빠진 소리를 내어야 겠는가. 난 내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 두 눈을 깜빡였다.
“아이씨.”
베르테 자작이 몸을 배배 꼬며 사랑에 빠진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싫어 고개를 홱 돌리며 눈을 감았다.
뿐만 아니라, 내 얼굴을 막으려던 기사들까지 벌써 당한 모양이다. 그들은 헤실헤실 웃으며 온 몸을 흐느적거렸다.
그만해, 미친놈들아.
그만해, 미친놈들아.
“정말이지 넌, 내 마음을 몰라주는 구나아.”
베르테 자작이 기어이 내 앞에 다가와 서운한 티를 내며 말했다.
“모르고 싶어요, 이왕이면 평생.”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가 나를 책임져야하지 않느냐. 설마 그 날 일이 기억나지 않는 건가?”
그 말을 들은 순간, 스물여섯 평생 진심으로 짜증이 나 오만상이 다 찡그려졌다. 이러려고 내가 산 게 아닌데, 자괴감 들고 괴로워 미칠 거 같았다.
“정말, 넌! 나빠!”
내가 말했다.
“침 뱉어도 돼요?”
자작은 상처받은 눈을 하며 내게 가까이 다가와 양 어깨를 덥석 잡았다.
“힝. 네 침이라면 환영이지.”
와, 저 변태새끼.
“퉤!”
귀를 막고 싶을 만큼 엄청난 불쾌지수가 밀려왔다. 그만하라며 입을 막고 싶었지만, 자작의 헛소리는 계속되었다.
“넌 대체 왜 나를 이렇게 못난 사람으로 만드는 거냐. 왜 너의 고운 손에 밧줄을 묶게 만드는 거냐고!”
“‥‥‥?”
듣기로는 이렇게까지 심하지 않다고 했는데? 물론 효과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베르테 자작은 그 정도가 꽤 심했다. 나는 일단 생각을 접고, 베르테 자작을 향해 억지로 입 꼬리를 올렸다.
“그, 그럼 이 밧줄 좀 풀어주시겠어요? 손이 너무 아파서요. 발목도요.”
나는 최대한 얇은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러자 자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밧줄을 풀기 시작했다.
내 손을 묶어두었던 구속의 밧줄이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나는 손과 발을 이리저리 돌리며 자유를 만끽했다.
드디어 일어나 기지개를 켤 수 있고, 또 스트레칭을 할 수 있다니.
나는 풀려난 기념으로 일어나 베르테 자작에게 아낌없는 선물을 퍼부었다.
“에라이, 또라이 같은 놈아!”
있는 힘껏 자작을 발로 걷어찼다. 그간 묵은 체중이 싹 내려가는 느낌에 나는 크게 숨을 쉬고 뒤를 돌았다.
“얼른 저 자를 잡아라아. ‥‥‥흐흥.”
그들은 이미 페르몬에 취해 정신이 반절 돌아와도 행동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아무리 날 잡으려 소리치고 따라와도 소용이 없었다.
드디어 탈출이구나.
이제 새 인생을 살 생각에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았다.
나는 탈출을 기념해 두 손을 어깨너머로 쫙 벌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 그때였다.
콰콰광-!
“으아아악!!”
갑작스러운 큰 소리와 함께 저택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나 역시 굉음에 튕겨져 나갔다.
눈 깜짝 할 새에 넓은 저택이 반쯤 무너졌다.
대체 이 말도 안 되는 충격전개는 어디까지 갈 건지 앞길이 깜깜했다.
“아아..”
이 소설의 장르는 과연 로맨스가 맞는 걸까, 아니 나. 정말 소설에 빙의 된 게 맞긴 한 걸까. 의문이 생기던 찰나.
“‥‥‥.”
먼지와 파편들이 나도는 사이로 느리게 걸어오는 장신의 남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허리를 부여잡고 돌덩이들을 치우며 남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베르데 자작을 만나러 왔다.”
낯 선 남자는 어떠한 장치도 없이 저택을 폭발 시킨 모양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멀쩡히 걸어와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보며 무표정으로 말했다.
“약속한 물건은 잊지 않았겠지.”
동굴 속을 걷듯 저 낮고도 진중한 울림에 입이 쩍 벌려졌다.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통증에 아파하면서도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사채업자야?
이 세계는 도무지 답이 없어.
그리고 또 한 번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황은 답이 없지만, 그의 목소리는 계속 듣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죽은 건가.”
정적이면서도 낮은 목소리에 울림은 내 마음을 울렸고, 바람에 살짝 사분대는 저 찰랑이는 머릿결에 또 한 번 시선이 향했다.
“‥‥‥인간?”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려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누가 저 미남자의 성미를 건드렸을까.
“냄새가 좋지 않군. 설마.”
참으로 괘씸하기만 했다. 평소에 잘 듣던 말인데도 기분 나쁘다기보다는 저 살짝 찌푸린 미간에 끼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미쳤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인간, 자작과 아는 자인가?”
아는 사이는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하고, 납치당한 사이인데.
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은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지만 모르는 사이에요.”
“‥‥‥.”
“납치당했거든요.”
남자는 나를 보더니 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낮게 욕지거기를 내뱉었다.
남자가 목소리를 깔며 내게 말했다.
“네가 자작이 말한 그 물건인가?”
“이젠 하다하다 물건취급까지‥‥‥.”
나는 실소를 터트렸다. 웃으니,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아까 벽에 부딪힐 때 난 상처가 벌어진 모양이다.
남자는 내게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인간이 물건일 줄은 몰랐는데.”
“‥‥‥.”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맞는 거 같군.”
무심하고도 저 나른한 눈빛은 서늘하기 까지 해 쿨 해 보였다.
나를 향해 물건이라며 낮잡아 부르는데도 딱히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과 얼굴이 내가 흔히 보던 로맨스 속 주인공의 얼굴 같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답도 없는 상황을 많이 맞이해 생각하기를 포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일어나라. 물건이 인간이라면 사용법은 알려줘야 할 것 아니냐.”
남자는 나를 지나쳐 굴욕적으로 쓰러져 있는 자작을 혐오하는 표정으로 발로 툭툭 치며, 사용법을 물었다.
사용법이라니? 냄새를 말하는 거 보니. 무언가 느낌이 세했다. 그때 깨달았다.
베르테는 각종 물건을 거래하는 상인이었다. 어쩌면 저 놈이 원하는 건 물약, 즉 내가 흡수한 물약일지도 모른다.
이거 뭔가 대단히 일이 꼬인 것 같다.
그러니까,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나 자신. 즉, 내가 빙의한 캐릭터가 어떠한 연유로 베르테 자작이 거래할 물약을 모조리 마셔서 제 몸에 흡수를 해버렸다.
그 흡수한 물약이 이 특별한 능력인 페르몬 일 테지. 그래서 저 남자가 그 물약을 찾으러 온 거고.
이렇게 되는 구나. 그럼 난 저 남자를 피해야겠네? 남자가 베르테를 건드리며 무어라 말하고 있는 사이,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 일어나 움직였다.
“‥‥‥그만.”
“‥‥‥끅.”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질을 해버렸다. 하필 이 상황에서 딸꾹질이라니.
“아무래도 베르테 자작이 죽은 거 같다. 심히 유감이군. 뭐 딱히 정든 인간은 아니라 별 상관은 없다만.”
“끅.”
나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남자가 조소를 지었다.
“사용법은 차차 알아가도록 하지.”
아니야, 그거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널 데려가겠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절의 의미였다.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됐어요. 끅. 전, 베르테 자작하고 전혀 모르는 사이에요. 절대!”
“납치당했다며.”
그건 그렇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는 입 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내게 잘난 얼굴로 말했다.
“구해주는 거다.”
“‥‥‥.”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나를 한 번에 들어올렸다. 나는 놀라 버둥거렸지만, 그의 힘을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니, 그게 아‥‥‥.”
그의 힘 있는 목소리에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져 점점 몸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버티려 했지만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그 순간, 남자가 말했다.
“나는 널 살렸고, 넌 내게 구원 받은 거다.”
그렇게 난 또라이의 감옥에서 탈출했다. 그러나 이번엔 미친놈을 만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