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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공주가 돌아왔다
작가 : 아가씨
작품등록일 : 2016.8.24

차원이동녀x폭군 황제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 에리얼.
18번째 생일, 순백의 머리카락이 검게 물들면서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죽고만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땐 갓난아이가 되어 있었다.

"……왜 나를 미워했나요."

 
여는 이야기
작성일 : 16-08-24 10:16     조회 : 876     추천 : 3     분량 : 8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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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에서는 내 탄신일을 축하하는 연회 준비로 분주했다. 여태껏 치렀던 것과는 다르게 꽤나 신경쓰는 모양인지, 방 밖으로는 분주히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나의 18번째 탄신일이자, 성년이 되었음을 온 제국민에게 알리는 날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 탄신일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성년이 되었음을 알린다는 것은, 더는 폐하의 그늘 아래 있을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니 말이다. 무엇보다 탄신일이 지나고 보름 뒤면, 얼굴도 모르는 후작과 혼인을 치를 예정이다. 본디 공주라는 자리가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일면일식 없는 이와 미래를 설계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게다가 난 정실도 아니고 소실로 들어가는 터라, 앞으로 나와 함께할 남편은 스무 살도 더 많은 늙은이라고 한다. 그에게는 이미 내 또래의 자녀도 숱하게 있었으니, 팔려가는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라. 이게 어딜 봐서 남녀 간의 ‘맺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아아, 이런 최악의 혼인이 또 있을까.

 

 방 한쪽에는 내 탄신일을 기념하는 뜻으로 각 영지를 다스리는 공작들이 보낸 선물로 가득찼다. 저것을 주고 나를 얼마나 더 물고 뜯으려는 것일까. 산더미처럼 쌓인 선물을 보고 있자니 골이 지끈거리는 나였다.

 

 "많이도 모였구나."

 

 머리나 식힐겸 해서 창 밖을 보니 제법 많은 제국민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짜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문을 개방하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 같기도하다. 아무래도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으나, 그들이 나를 보기 위해 나와있는 것 또한 저 선물더미만큼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던져줄 것들을 기다리는 것이겠지."

 

 황족의 탄신일에는 선대부터 '귀족부터 거지까지 가리지 않는다.'라는 걸 강조하며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금화를 나누어준다. 마지막에는 모든 귀족이 먹고 남은 음식과 술을 나눠주기도 해서, 저들에게 내 탄신일은 풍족히 먹을 수 있는 날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나를 존경하지 않으면서도 저토록 애타게 기다리는 것이겠지.

 

 "마리."

 

 이제 슬슬 준비해서 나가야겠다 싶어서 시종을 불렀다. 그러나 몇 분이 지나도 마리는 커녕 다른 시종들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래도 방 밖에 대기하던 모든 시종이 에스텔에게 간 듯하다. 이런 일이 잦아서 그런가. 내 부름에 시종이 달려오지 않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되레 익숙했다. 에스텔에게 갔으면 반나절은 더 지나야 올 것이다. 늘 그래왔으니 나는 내 스스로 단장해야겠다 싶어서 창문가를 떠나,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아."

 

 거울을 보는 순간 세상이 멈춘 것과도 같은 착각이 들었다. 눈 앞에 보이는 내 모습에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아아악!"

 

 몇 초간 침묵 뒤에 간신히 정신차린 나는, 저절로 입이 벌어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간밤에 누군가 다녀가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잠옷 위로 살짝 드러난 목덜미에 시퍼런 멍자국이 보였다. 누군가 있는 힘껏 조른 것처럼. 하지만 이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를 경악케 만든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공주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을 열어젖힌 이는 잠깐이랄 것도 없이 내게 달려왔고, 나는 그제야 내 앞에 선 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

 

 내게 다가온 이는 휴에르 경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나와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공주님, 대체……"

 

 그는 시퍼런 멍이든 내 목덜미를 보고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오롯이 내 머리카락에 닿아있었으니 말이다. 그가 놀랄 법도 했다. 나 또한 지금 그러하니까.

 

 "여태껏 살아도 살지 않은 것처럼 조용히 지냈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내 머리카락은 본래 백색에 가까운 금발이었다. 모두가 나를 두고 '하얀 체스말의 공주님'이라 부를 정도로, 백색의 머리카락은 나를 가리키는 것이자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거울 속에 비친 내 머리카락은 순백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전혀 달랐다!

 

 "누군가 나를 음해하고자 벌인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공주님, 진정하십시오."

 

 내 아버지를 닮아 하얗기만 하던 머리카락이 하루밤사이에 검게 물들었다. 누군가 내 머리카락에 색을 입힌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절대 변할 리 없는 머리카락이 하필이면 금기시 되는 색으로 변했겠는가.

 

 "……전 이제 죽을 거예요. 평생 미움만 받다가, 이렇게."

 

 깊은 밤을 연상케하는 검은 머리카락은 절대 이 제국에서 절대 사랑받지 못할 것이었다. 아니,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아버지인 폐하께서, 흑발을 가진 이들을 볼 때마다 '죽도록 증오하는 이를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모두 처형했기 때문이다. 흑발을 연상케하는 짙은 고동색 머리카락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흑발은 절대 이 제국에서 찾아볼 수도, 존재할 수도 없었다. 한데 지금은 내가 그 머리카락이 되었다.

 

 폐하께서 죽도록 증오하는 이를 연상케하는 그 검은 머리카락을!

 

 신께서 나를 시험에 들게 하시는 것일까. 아니면 여태껏 지옥 같은 생활을 이어가게 한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이 하찮은 목숨마저 거두시려는 것일까.

 유일하게 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니만큼 절대 변할 리가 없으리라 생각했던 게 순백의 머리카락이었건만,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순간 실타래가 아무렇게나 뒤엉킨 것처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참으로 우습게도 지금 이순간 내가 드는 생각이라고는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였다. 이 제국의 유일무이한 공주인 내가, 어떻게 하면 폐하께 목숨을 구걸할 수 있을지 방도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간 폐하께서 공주님을 멀리한 것은 사실이나, 절대로 폐하께서는 공주님을 내치시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다는 걸 휴에르 경께서도 아시잖습니까?"

 

 내 말에 휴에르 경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것은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누가 이런 고약한 장난을 친 것인지 몰라도, 오늘이 제 마지막이란 것쯤은 잘 알겠어요."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폐하께 뭐라 말씀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복잡해요."

 

 "공주님."

 

 폐하께서 나를 아낀다면 내가 이토록 무서워 할 이유가 없었다. 이깟 머리카락쯤 아무 것도 아니라며, 오히려 내 머리카락을 이렇게 만든 이를 잡아 엄히 다스릴 테니 말이다. 하지만 가엾게도 나는 지난 18년간 단 한 번도 폐하께 사랑받지 못하였다. 유일무이한 공주임에도 미움 받고 있어서, 이렇게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일 정도랄까.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며, 공주임에도 공주가 아닌 경계에 서 있는 것이 나 '에리얼 칸 리이할트 허마이오네'이다. 고귀한 핏줄을 물려받았기에 내 성에 폐하의 존함을 담을 수 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황후와 황제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라는 ‘명분’때문이었다. 그는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또한 내가 사랑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덕에 나는 드넓은 궁정을 거닐 때마다 따갑게 쏟아지는 시선에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 수 없었으며, 혹여 폐하께서 하룻밤 상대로 부른 궁녀들이 나를 무시하더라도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했다. 내가 아무 말도 못하는 위치에 있다는 걸 안 그들에게 뺨을 맞는 것또한 예삿일이었으니, 이 궁정에서 내 입지가 어느 정도인지 성 밖의 걸인조차 알 터였다. 나는 태어나던 순간부터 줄곧 그런 존재였다.

 

 언제 버려질지 몰라서 다른 이들이 정해둔 길만 보고 따르는, 가치가 떨어지면 체스판 밑으로 굴러떨어지는……체스말과도 같은 존재.

 

 "여태껏 목숨을 구걸하며 살았으니, 이번 또한 그리할 겁니다. 그리 해서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래야만겠지요."

 

 이름 뿐인 공주인 내가 폐하께 목숨을 구걸한다한들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더구나 내가 흑발이 되었으니 이것을 명분 삼아 그간 내 자리를 탐내던 후궁들이 제 자식을 공주, 혹은 왕자로 앉히려 할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내 존재를 눈엣가시로 생각했기에 이처럼 좋은 구실을 놓칠 리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내 목숨을 구걸하는 것 외에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모를 일이니 여태껏 그래왔듯 목숨을 구걸하며 폐하께 아뢰는 것이 최선이다. 당장 내 목에 검을 겨누어도 폐하를 붙잡고서 구걸할 것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휴에르 경, 나와 약조해주시겠습니까?"

 

 "무엇을?"

 

 "내가 혹여 이 자리를 떠난다면 그때는 쥐도 새도 모르게 성을 빠져나가세요. 그래야 그대가 삽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는 오롯이 공주님 곁을 지킬 뿐입니다."

 

 "오, 휴에르 경. 제가 떠나고 나면 폐하 성정에 제 곁에서 가장 오랫동안 머문 그대를 가만 둘 리가 없어요."

 

 "언제나 함께하겠노라, 약조하셨잖습니까."

 

 "휴에르 경, 난 그대만이라도 살아남길 바라요."

 

 "저는 공주님을 외롭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앞으로도 변함 없습니다. 절대로."

 

 "난 그대가 나로인해 불행해지는 걸 원치 않아요. 아니, 난 그대가 그저 살길 바라."

 

 내가 마지막 말을 던졌을 때, 휴에르 경이 나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여느 때보다 강한 팔로 나를 꽉 안아주었다. 그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으나, 애써 눈물을 삼키며 침묵했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자기 자신보다 나를 더 위했으며, 모두가 폐하의 눈치를 보고 나를 멀리할 때 그만큼은 오롯이 나만을 바라봐주었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나는 그가 얼마나 나를 위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를 두고 가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것또한 이해한다. 하지만 허울뿐인 공주인 내 옆에 휴에르 경을 두는 것은 그의 인생을 너무나도 비침하게 만드는 것이 분명했다. 유년시절을 줄곧 노예로 지내다가 이제야 기사가 된 그에게, 나와 같은 길을 걸어달라 말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저는 준비되었습니다."

 

 그는 머뭇거리는 내게 나직하게 말했다. 당장 울음을 터뜨려도 이상할 것 없는 목소리로 담담히 말하는 것이, 마치 내게 두려워말라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째서 그대는 나와 같은 길을 가려하느냐고 물으려 했으나 관두었다. 나는 이미 그의 마음을 알고 있지 않은가.

 

 "미안해요."

 

 * * *

 

 나는 내 탄신을 축하하는 자리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 원래는 폐하를 먼저 찾아뵐 생각이었으나, 폐하께서는 집무실에 계시지 않아서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꽤 빨리 도착해서일까. 바벨 후작부인과 에스텔이 앉을 귀빈석이 비어있다. 텅 빈 의자들을 보고 있자니 갈수록 착잡한 기분이 든다. 바로 그때, 내 뒤편에 서 있던 휴에르 경이 말없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가 떼어냈다. 제국민이 나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자리여서 그런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귀가 얼얼했다. 그래도 휴에르 경이 옆에 있으니 그나마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슬쩍 바로 옆 폐하께서 앉을 자리를 보았지만, 주인을 기다리는 빈 의자만이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어머, 에리얼 얘는 아직 오지 않았나?"

 

 내 등 뒤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에스텔 바벨. 폐하께서 요즘 들어 바벨 후작부인의 침소를 드나든다는 이유로 그녀의 딸인 에스텔도 이 자리에 참석한 모양이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내 자리를 탐내는 인물로, 성미가 급하고 내 시종을 마음대로 부리며 자신이 공주인양 행동한다. 실제로 이 궁정에 속한 시종들은 그녀의 말이라면 모두 찍 소리도 못하고 따른다. 내가 황제의 미움을 받고 있으니 조만간 바벨 부인이 황후에 오르고, 그녀의 딸인 에스텔이 공주가 될 것이라는 풍문이 돌 정도다. 당연히 신료들의 지지도 에스텔의 어깨 위에 놓였다.

 

 "안녕하십니까."

 

 휴에르 경은 에스텔이 오는 소리에 내 옆을 떠났다. 그러고는 그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올 수 없게 먼저 운을 뗐다.

 

 "그래요, 안녕. 바지런하시기도 하지. 오늘도 덜떨어진 공주 때문에 휴에르 경이 고생 많네요."

 

 "……."

 

 "우리 에리얼은 든든한 기사님 둬서 좋겠네. 후후!"

 

 에스텔은 까르르 웃으며 내 바로 옆 의자에 앉았다. 우리가 앉은 의자 앞으로는 불투명한 천이 시야를 가리고 있는데, 탄신일 기념행사가 시작되면 저 커튼이 걷어질 것이다. 물론 의자가 놓인 곳마다 간신히 실루엣 정도 볼 수 있는 얇은 천이 쳐져있다. 의자를 둘러싼 천을 거두지 않는 이상 에스텔이 폐하보다 먼저 나를 볼 일은 없었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존엄하신 허마이오네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순간 섬뜩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드디어 폐하께서 오셨구나. 몸이 파르르 떨렸다. 폐하께서 앉으실 자리는 바로 내 옆. 폐하께서 이리로 오신다면 자연스레 내 머리카락이 바뀐 걸 알게 될 것이다. 칠흑과도 같은 머리카락을 어찌 감히 폐하께 보여드릴 수 있겠느냐마는 내가 도망갈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내 탄신일만 아니었다면 늘 그러했듯 방에 틀어박혀 지낼 터인데…….

 

 "경이 있는 걸 보니 공주도 도착한 모양이로군."

 

 "예, 폐하."

 

 휴에르 경과 대화를 마친 폐하께서 천천히, 커튼으로 손을 가져오셨다. 난 그의 손을 따라 커튼이 걷어지는 걸 보며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과도 같은 착각이 들었다.

 

 "조, 존엄하신 허마이오네의……."

 

 모든 커텐이 젖혀졌을 때, 나는 폐하를 향해 인사부터 건네려했다. 한데.

 

 "이수현?"

 

 폐하의 입에서 참으로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다음 말은 꺼내지도 않고 나를 바라봤다. 뚫어질 정도로 쳐다보는 통에 나는 내가 무엇을 말해야할지 고민되었다. 아울러 그의 표정이 묘하게 기쁜 것처럼 느껴졌다.

 

 "에, 에리얼이옵니다."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더니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에리얼?"

 

 "예, 폐하."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기 무섭게 폐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몸을 떨었다. 잠시 후, 폐하께서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는가 싶더니 다시금 입술을 들썩였다.

 

 "닮았다, 닮았다 했더니 아주 그 고얀 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구나."

 

 "폐, 폐하."

 

 "그간 그 검은 머리칼을 속이려 내 머리칼을 흉내 낸 것이었느냐? 천박하고 더러운 그것을 숨기려고?"

 

 "폐,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리 변했다고 말해야하는데. 그래야만하는데.

 

 "듣기싫다."

 

 폐하께서는 내 이야기를 듣고자 하지 않았다. 흑발을 가진 이들을 모두 처형하던 때에 지었던 표정을 나를 향해 지어보일 뿐이다. 일순간 내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분노에 찬 그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여기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어서, 내 발을 바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아니, 기함할 듯 놀란 탓에 어느 것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폐, 폐하."

 

 잠깐이랄 것도 없이 폐하께서 내게 검을 겨누었고, 그의 검이 단숨에 나를 꿰뚫었다. 이상하다는 걸 느껴서였을까. 휴에르 경이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고, 공주님!"

 

 가슴을 꿰뚫는 통증에 숨이 가빠지고, 정신이 아찔했다. 어째서 제 이야기는 듣지 않고 검을 겨누었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목소리가 나와야 할 목구멍에서는 그저 뜨겁고 비릿한 것이 올라오기 바빴다. 폐하를 바라보니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늘한 붉은색 눈동자는 여느 때보다 촉촉했다. 조금 전까지 나를 바라보던 시선과는 사뭇 달랐다.

 

 어째서 그런 슬픈 표정을 짓고 계신가요?

 저를 찌른 것은 폐하이시온데.

 

 점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정말 끝일까 싶을 정도로, 손이 너무나도 차갑게 식어서 얼음장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휴에르 경은 내게 검을 꽂은 폐하를 밀쳐냈다. 그러고는 내 가슴팍을 손으로 누르며 지혈하려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피가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촤르륵!

 

 안에 상황을 몰라서였을까. 의자를 감싼 커튼이 모두 걷어지면서 여태껏 목빠지게 기다리던 제국민들이 보였다.

 

 "꺄아아아악!"

 

 그리고 날카롭게 올라간 에스텔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주님, 눈을 감으셔서는 아니 됩니다! 공주님!”

 

 시야가 탁하게 흐려졌을 무렵, 머리맡에서 휴에르 경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들렸다. 분명 고함을 지르는 것이 분명한데, 내게 있어서 그의 목소리는 자장가와 같았다. 잔잔하다 못해 부드러워서, 이내 곧 잠에 빠지게 만드는……. 나는 그제야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옴을 느꼈다. 언젠가 읽어본 문학에서는 죽음이란 형용할 수 없는 공포라 표현했었지. 한데 지금 내게 찾아온 죽음은 정말이지 괴롭게도 따사로운 것이었다. 아울러 내게 근본을 알 수 없는 안식을 주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너무나도 쉽게 죽는 게 아닐까 싶어 서글펐다.

 

 적어도 난, 내 죽음이 이렇게 허무하게 찾아오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검을 맞은 연유 또한 참으로 우습다. 내가 원해서 머리카락 색이 변한 것도 아니잖나. 아직 못해본 것이 많은데 허무하게 끝내고 싶지 않아. 더 살고 싶어. 조금만 더. 하지만 내 몸은 간절한 바람과 달리 자꾸만 차갑게 식어갔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

 

 나는 그저 내가 사랑하는 이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고, 에스텔처럼 오롯이 나만을 바라봐주는 어머니가 있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이 입술로 감히 폐하께 ‘아버지’라 부를 수만 있다면. 아니, 가장 가까운 곳에서 폐하를 바라볼 수만 있기만 하다면야 무엇이든 참아낼 수 있었다. 하나 내게는 애초에 그런 기회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야속하게도 내게는 다음 생이란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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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사랑 16-10-28 21:07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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