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주치의는 비탄에 잠긴 얼굴로 잠시 머뭇거렸다.
“송구하지만 각하.”
그래, 어서 말해. 비올레타는 기대감을 가지고 마음속으로 의사를 재촉했다.
“남은 기간을 길어봤자 1년 일 듯합니다.”
침대 옆 의자에 앉아있던 가신 헤이바 자작이 하-하고 탄식했다. 의사는 비올레타의 시한부 판정이 마치 자신의 잘못이라도 되는 듯, 죄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오직 비올레타 만이 희열에 젖어 예정된 자신의 죽음을 기뻐했다.
이제야 황제와 부모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는가.
‘인내가 성공을 부른다 했는가.’
지금이 딱 그 상황이었다.
19년 동안 자신의 삶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인생을 살았던 비올레타 메이블은 행복하게 웃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녀는 의사와 헤이바 자작에게 단단히 당부했다.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
“예? 그래도 대부인께는…….”
“어머니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으니 함구해라.”
물론 거짓말이었다. 메이블 대부인이 비올레타의 시한부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그녀는 어머니와 황제에 의해 새로운 방법으로 이용당할 테니 절대 알려서는 안 되었다.
“절대, 아니 된다.”
“예……, 알겠습니다.”
주치의와 헤이바 자작은 예를 차려 인사를 올리고 침실을 나섰다.
비올레타는 자신의 죽음에 있어 단 하나, 안타까운 것을 생각했다. 그녀의 발치에 매달려 입술을 고집스레 물고 슬픔을 참고 있는 사랑스러운 아들 베르안.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기어코 이 속박에서 벗어나야겠구나.’
베르안이 선명한 자주색 눈을 깜빡이며 비올레타를 응시했다. 그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에 비올레타는 이불 속에 숨긴 손을 꽉 쥐었다.
“비안, 오늘은 함께 자자꾸나.”
“……좋아요.”
비올레타는 촛불을 불어 끄고 침대에 바르게 누웠다. 품속으로 베르안이 파고들었다. 6살 아이의 달콤한 체향이 그녀의 폐부를 간질이며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잘 자렴, 좋은 꿈꾸고.”
아이의 이마에 짧게 키스해주며 비올레타는 눈을 감았다. 뒤이어 베르안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의 따듯한 체온이 비올레타와는 사뭇 달랐다. 그녀는 아들의 행복을 바라며 잠에 들었다.
* * *
비올레타가 가슴의 통증을 참지 못하고 새벽녘 잠에 깨어났을 때, 베르안은 그녀의 품 안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초여름 특유의 시원한 바람이 열린 창문 사이로 불어들어 왔다. 비올레타는 허리를 꽉 껴안고 있는 베르안을 살짝 때어놓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어째서인지 열려있는 창문 가까이로 다가간 비올레타는 잠금 장치를 걸으려다 멈칫했다. 창틀 위에 탐스러운 꽃 한 송이가 놓여있었다. 특이하게도 꽃술은 자줏빛인 블랙 로즈였다. 검은 벨벳을 닮았다 해서 벨벳 로즈라고도 부르는 이 꽃은 남부의 셰잔 제국에서나 재배되는 희귀한 것이었다.
비올레타는 느리게 흑장미를 집어 들었다. 방금 놓고 간 것 마냥 싱싱했다. 바람이 불어 윤기 나는 흑발이 흩날리는 사이, 그녀는 천천히 향기를 맡았다. 강하면서도 몽롱한 향기.
“누가…… 이런 것을…….”
새벽의 흐린 느낌에 감싸인 비올레타의 자색 눈동자가 텅 빈 정원과 담장, 먼 곳에 펼쳐진 시가지를 훑었다. 검은색과 자주색이라, 마치 그녀의 머리색과 눈 색을 따라 하기라도 한 듯 일치했다.
“당신인가, 테스 백.”
하지만 비올레타는 알았다. 그는 절대 이런 낭만적인, 아니 시간낭비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 이혼한 전남편, 테스 백작 다니엘은 그녀와 동류였다. 그저 사무적으로 사람을 대하고 생명력 없이 살아가는 이.
그저 지나가던 누군가의 장난이겠지, 비올레타는 이내 테스 백작의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블랙 로즈를 창밖으로 떨어뜨렸다. 장미에 남아있던 딱 하나의 가시가 흰 손끝에 핏방울을 맺히게 하고 낙하했다. 정원의 돌길에 떨어져 꽃잎 몇 개가 떨어져 나간 장미를 바라보다 그녀가 시선을 돌렸다.
장미를 보냈을 누군가를 상심하게 만드는, 무감정한 표정이 얼굴에 떠올랐다. 비올레타는 망설임 없이 창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로 돌아왔다. 베르안이 칭얼거리며 팔을 그녀의 등 뒤로 돌렸다. 그녀는 아이를 다독이며 몸을 웅크렸다.
‘세상에는 참 할 일 없는 사람이 많구나.’
그 특별한 흑장미를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창문에 올려놓고 떠나다니.
잠시 뒤, 비올레타의 매정한 손길이 버려버린 장미 곁으로 한 인영이 다가왔다. 망토로 온 몸을 감싼 인영은 상처 입은 꼬마를 감싸 올리듯 장미를 집었다. 가시 끝에 묻은 피를 보고 그가 킥킥 웃었다.
“흔적을 남겼구나. 더 조심했어야 해, 비타.”
날 밀어내려면 아예 장미를 짓밟았어야지, 이렇게 네 손이 닿았다는 흔적이 있으니 내가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더 화나는 건, 날 네 전남편으로 오인했다는 거야.”
흑장미를 품안에 넣은 인영이 메이블 공작가의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사라졌다.
* * *
날이 밝자마자 갖가지 일거리가 그녀의 집무실로 몰려왔다. 메이블 공작으로서 해야 할 일, 메이블 공작가의 안주인의 업무, 황제가 그녀에게 미룬 산더미 같은 사안들이 책상에 쌓여 있었다. 비올레타는 빠르고 익숙하게 그 일들을 처리하고 메이블 대부인, 어머니를 찾았다.
막 43살에 접어든 젊은 대부인은 얼굴에 피곤이 내려앉은 딸을 짐짓 기쁜 척하며 맞아들였다. 그녀가 내어주는 차를 마시며, 비올레타는 실소했다. 이 모녀 관계에 거짓이 아닌 것이 존재하기는 했던가. 문득 회의감이 들어 표정을 감추는 것이 힘겨웠다.
메이블 대부인, 루이안 메이블은 거짓된 미소로 일관하며 딸 비올레타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주치의가 그녀의 침실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라 건강에 문제가 있나 의심이 갔다. 그렇다면 돈 많은 놈팽이와 결혼시켜 이득을 봐야 하는데, 루이안이 고민했다.
“어제, 주치의에게 검진을 받았습니다.”
“그, 그래? 뭐라더니?”
비올레타가 루이안이 마침 생각하고 있던 것을 언급하자 그녀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너무 과로를 했다던데, 그의 말로는 휴가를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하더군요.”
비올레타는 너무 눈에 띄게 안심하는 루이안을 못 본 척, 찻잔 속 붉은 찻물을 응시했다. 루이안은 분명 주치의의 방문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먼저 말을 꺼내는 게 상책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기색을 보이던 루이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리 딸이 요즘 많이 힘들 긴 했구나. 그러면 주치의의 말대로 세 달 정도 휴가를 갔다 오는 건 어떻겠니?”
비올레타와 꼭 닮은 자주색 눈이 반달로 접힌 눈 사이에서 간사히 빛났다.
‘꾀병인지 조사해보려는 것이겠지.’
아무래도 주치의에게 단단히 입단속을 시키고 뇌물도 좀 쥐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비올레타가 따라 웃었다. 오랜 노동력 착취에 단단히 말라 너무 가늘기만 한 몸, 눈가와 얼굴에 내려앉은 오래된 피곤함을 제외하면 어디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웃음이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잠시 휴가를 다녀올게요. 그동안 제 일은 별장으로 보내주시면 되요.”
“그래, 휴가는 어디로 가겠니? 아무래도 남부의 아멜리안 영지에 있는 별장이 좋겠지?”
“예, 요즘 남부가 날씨도 좋다하니 그곳이 딱 알맞네요.”
루이안의 웃음을 보며 비올레타가 속으로 생각했다.
‘아멜리안 영지의 시종인들 중 눈과 귀를 심겠군.’
가자마자 다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올렸다. 홍차인가, 찻물이 붉디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들어갔다. 이제 인생의 마지막은 조금 쉬면서 살 수 있을까, 비올레타는 자그마한 희망을 품었다.
그 뒤로 둘은 사소하고 영양가 없는 이야기-날씨가 좋다느니 잠자리가 불편하다느니-를 하며 시간을 소비했다. 햇볕을 조금 쬐는 게 빠른 회복에 좋다는 루이안의 말에 대부인의 처소를 나온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메이블 공작의 방 바로 아래에 위치한 내(內)후원이었다.
돌길을 따라 거닐며 루이안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비올레타, 이제 슬슬 재혼을 생각할 때도 되지 않았니?”
“오, 어머니. 제가 사랑하는 이는 베르안 뿐임을 잘 아시잖아요.”
비올레타는 재혼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렇게 피해갔다. 아들을 키우며 살겠다는 가련한 미망인에게 또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루이안은 작정을 했는지 여기저기 틈새를 파고들며 재혼을 재촉했다.
“비올레타. 나는 네 행복을 바란단다,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도 마찬가지고. 어서 재혼하는 길이 행복을 찾는 길이야. 이 늙은 어미를 생각해서라도 다시 생각해보렴.”
지랄 맞은 소리, 비웃고 싶은 것을 참으며 비올레타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아직은 못하겠어요.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면 그 때 결혼해도 되겠죠? 어머니께서 이해해 주실 거라 믿어요.”
“사랑하는 이라……. 알겠다, 비올레타. 그 사람을 찾으면 제일 먼저 내게 알려주려무나.”
“알겠어요, 어머니.”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발을 놀리던 그녀는 어느새 자신의 침실 아래, 새벽에 장미를 버렸던 그 곳에 도착했다. 비올레타는 무의식적으로 블랙 로즈가 아직 그 자리에 있는 지를 확인했다.
‘……없어?’
게다가 그 자리에는 새로운 꽃이 놓여있었다. 자주색 튤립이었다. 비올레타가 석연치 않아하는 얼굴로 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아챈 루이안이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꽃잎에 흠집 하나 없는 아름다운 튤립을 보고 바로 상등품임을 알아챘다.
게다가 비올레타가 당황하는 모습이라니, 루이안은 그게 미지의 남자가 놓고 간 것임을 짐작했다.
“어머나, 이 꽃은 뭐니. 우리 후원에는 없는 꽃인데.”
“글쎄요, 어머니. 바닥에 있는 것을 주워 무엇 하시게요, 더러워요.”
비올레타는 루이안의 손에서 자주색 튤립을 빼앗듯 가져가 멀리 던져버렸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우연이라고 볼 수 있었다.
‘잊어버리자, 그저 어떤 개자식의 유희거리겠지.’
사교계에서 비올레타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가시 돋친 꽃으로 알려져 있으니 그녀에게 작업을 걸어보려는 하나의 이상한 방법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변한 루이안의 눈빛을 흘낏 보고는 머리를 짚었다. 또 남자를 들이댈 생각이구나.
루이안은 비올레타가 외로워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몰래 남자를 불러들여 유희를 즐긴다고. 그걸 위해서 없는 병을 만들어 별장으로 나가는 거라고. 터무니없는 짐작이었지만 루이안의 생각으로는 가능성은 겨우 그것뿐이었다.
“……이제 들어가자꾸나, 비올레타.”
“네, 가요.”
“그리고, 황제 폐하께도 말씀드리렴. 많이 걱정하실 테니까 말이다.”
산 넘어 산이라고 루이안을 납득시킨 다음에는 황제가 있었다. 굳이 황궁까지 찾아가 여러 변명을 해대고 싶지 않은 비올레타는 쉬운 방법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편지를 보내고 바로 별장으로 내려가 버리면 되지 않겠나.
‘아멜리안 영지에 있는 별장이라……. 아마 집사의 이름이 로사나였나?’
아멜리안의 별장으로 가 휴식을 취할 생각에 빠진 비올레타는 황제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하러 집무실로 올라갔다. 루이안은 딸의 형식적인 인사를 사양하고 대부인의 처소로 돌아가 자신의 심복들을 불러 아멜리안 영지로 내려 보냈다.
아카데미에 간 베르안이 돌아올 때까지 편지 작성에 정성을 쏟기로 한 비올레타는 집무실 책상에 앉아 깃펜을 까닥거리며 편지지에 고풍스러운 글씨를 써내려갔다. 그녀가 편지지 한 장을 꽉 채운 후, 두 장째 종이를 반 정도 채웠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각하, 미에타 백작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들어와라.”
젊은 신참집사 유리가 잘 포장된 예쁜 상자를 들고 와 일에 열중한 비올레타의 오른편에 놓고 나갔다. 삼십 분 정도가 더 지난 후, 두 번째 편지지를 완성한 그녀는 그제야 검은 색 상자로 시선을 돌렸다. 미에타 백작이 누구던가……? 잠시 헷갈렸지만 비올레타의 머리는 곧 충성스럽지 못한 가신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어머니 루이안에게 충성하다시피 하는 자, 그녀는 실소하며 정성스럽게 묶인 리본을 풀어냈다. 부드러운 금빛 비단이 스르륵 풀려나갔다.
“선물이라…….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상자 안에는 손잡이에 정교하게 깎인 자수정이 붙어있는 장식용 단검 하나와 진홍색 편지지가 놓여있었다. 비올레타는 조심스럽게 단검을 집어 올렸다. 장식이 화려하고 비싸보였지만 날이 진검 못지않게 날카로운 것을 보아 단순히 장식용은 아니었다.
게다가 보석과 순금으로 된 장식은 사치의 극치를 달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무슨 꿍꿍인가 하고 편지지를 펼쳤다.
“……아들?”
세상에 이렇게 어이없는 내용이 있을 수 있을까. 비올레타는 조소를 금치 못했다.
‘평소 공작 각하를 존경하던 제 아들 녀석이 셰잔에서 입수했다고 이 단검을 가져 왔더군요. 그리고는 각하께 보내 달라 때를 써대는 통에…….’
비올레타를 존경하는 미에타 백작 영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게 있을 리가. 비올레타는 편지를 서류들 위에 올려놓고 단검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상한 핑계까지 대가며 미에타 백작이 이 단검을 보낸 이유가 뭘까.
자세히 보니 검과 손잡이의 연결 부분에 아주 미세하게 변색된 곳이 있었다. 또한 오래 전에 만든 검 같다는 낌새도 느껴졌다.
“셰잔의 것……. 블랙 로즈의 경우도 그렇고…….”
비올레타가 내린 결론은 결국 하나였다. 셰잔과 무역을 하건 셰잔의 사람이건 어떤 놈이 그녀를 놀리고 있다는 사실. 그녀는 단검과 편지를 다시 상자 안에 넣고 집무실 한 쪽 구석에 위치한 진열장 위에 올려놓았다. 설마 내일도 이런 것이 오지는 않겠지, 비올레타는 상자를 구겨 넣으며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