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까지 뜬금없는 걸 물어보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질문 중 가장 생뚱맞은 질문을 꼽으라면,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지금 이 순간 듣는 저 질문을 택할 것이다.

　"역사에서 단 한 사건을 바꿀 수 있다면, 어떻게 할래? 어떤 사건을 어떻게 바꾸고 싶어?"

　난데없이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람?

　난 너무 뜬금없어서 오히려 할 말을 잃었다. 고시원에서 무슨 공사 계획이 있다는 통보를 받고 쫓겨나듯이 나와서, 당장 머무를 곳부터 구해야 하는 급한 처지였다. 저런 의미불명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는 것도 아니고, 지나간 역사에서 "만약에"를 논하는 것은 의미 없을 일이었다. 과거의 일은 어차피 바꾸지도 못할 거고, 변하지도 않을 테니까.

　그런데 옷을 좀 요상하게 입은 사람이 다짜고짜 날 잡더니, 천막 같은 곳 안으로 데리고 왔다. 다짜고짜 제발 와 달라고 워낙 간절하게 이야기하길래 오기는 왔는데, 그렇게 간절하게 사람을 데려와 놓고는 저런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런 엉뚱한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게 처절하게 사람을 데려온 거냐고 따지고 싶을 정도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겐 그 질문에 어울리는 대답이 있었다. 평소에 항상 하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충 대답하고 당장이라도 빨리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묻는 것에 대답했으면, 빠져나갈 구실로는 충분할 것이다. 해달라는 걸 하면, 더 붙잡아두지는 못할 테니까.

　"일본이 세계1차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편을 들게 할 겁니다. 그랬으면 일본은 세계 1차 대전에서 패배했을 테고, 한국은 그 때 독립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세계 1차 대전 보면서, 한국인 입장에서 가장 아쉬운 건 역시 저거였다.

　세계 1차 대전의 상황은 크게 분류하면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한 편을 먹고, 프랑스와 영국과 러시아가 다른 편을 먹었다. 그리고 일본은 전쟁이 시작된 직후에 프랑스와 영국 측으로 뛰어들고, 독일 측에 선전포고했었다. 하지만 막상 독일이 아시아 지역에 가지고 있던 식민지를 점령한 것 외에는 별다른 군사행동을 하지 않았고, 유럽 전역에서 전투하기는커녕 영국이나 프랑스가 병력을 요청하는 것도 무시했다.

　하지만 일단은 개전 초에 영국과 프랑스 측에 가담한 것만은 사실이었고, 덕분에 별다른 참전 기록이나 사상자도 없이, 세계 1차 대전에서 승리한 격이 된 것이다. 그 때 패배한 나라에서의 식민지나 속국은 대부분 분리독립되었다. 따지고 보면 목적은 식민지를 해방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패전국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패전국의 식민지는 독립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때 일본이 독일과 오스트리아 편을 들었다면, 그리고 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했다면, 한반도도 그 때 독립되었을 것이다. 난 그게 두고두고 아쉬웠다.

　절대평가가 아니라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맞대결이라면, 내가 잘 하기를 기대하는 것보다, 상대방이 실책을 저지르기를 기대하는 것이 훨씬 간결하고 현실성이 높아 보이는 법이다. 그걸 제일 절절하게 느낀 발상이기도 했다.

　"흐음,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예, 그런데요.“

　“만약 그렇게 바뀔 수 있다면, 현재 세계로 돌아오지 못해도 괜찮겠느냐?”

　“그럼요!”

　9년만에 식민지에 해방될 수 있다는데, 실제 역사에서의 36년 식민지보다 훨씬 마음이 가는 선택지인 게 당연하잖아? 현재 세계로 돌아온다 운운은, 아마 그 뜻일 것이다. 다른 뜻이 있을 리가 없고, 있을 수도 없으니까.

　“그럼 여기 연표에 그 구절을 써 주겠니?”

　그 사람은 연표가 인쇄된 책 같은 걸 갖다주면서, 내가 바꾸고 싶은 역사적 사건을 연표에다 써 넣어보랜다. 갈수록 황당해졌다.

　대충 적어주고, 끝내고 빨리 나가야지.

　내가 마침 가지고 있던 펜을 가방에서 꺼내서, 쓰려고 하던 참이었다.

　"다른 필기구 말고, 이 펜으로 적도록 해."

　아까의 질문만큼이나 의미불명이었다.

　하지만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물어보기도 귀찮고, 그럴 시간도 아까워서, 그냥 하라는 대로 하기로 했다. 펜을 바꾸기만 하면 되니,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니니까.

　그 펜에서는 무지개색 같은 영롱하고, 신비로운 빛까지 났다.

　난 그 책의 연표에서, 세계 1차 대전 대목에서 ‘일본이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있는 동맹국 측으로 참전하고,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국 측과 맞서며, 세계 1차 대전에서 패전국이 된 뒤 한반도는 패전국의 식민지로서 독립한다’라고 적어넣었다.

　적어넣는 순간, 연표 책에서 무슨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눈이 뿌옇게 흐려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광경은 대략 이러했다.

　널찍한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뭐, 뭐, 뭐야?"

　너무 놀라서, 상황을 파악하는 데 오히려 시간이 걸렸다. 상황만 보면 아무래도 1919년 3.1운동 현장 같은데....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라면 일단 3.1운동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내가 백 년 전 세계에 와 있을 리가 없잖아.

　영화나 드라마 촬영이라고 하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컸다. 아주 넓은 장소여서, 여기 모인 사람이 적어도 만 명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3.1운동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서라면, 넉넉잡아 수백 명의 엑스트라로도 충분히 그 때 분위기를 낼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진짜 같기는 한데....

　그럼 내가 백 년 전 세계에 와 있단 말이야?

　일단, 상황파악을 하려고 머리를 굴렸다. 정말 1919년 3.1운동 현장이라면, 고종이 사망한 뒤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죽었다. 그리고 고종의 국장이 3월 1일이었고, 바로 그 날에 3.1운동이 일어났다.

　어라?

　난 고종이 1919년 3.1운동 전에 죽었다는 것까지만 알고 있었고, 사망 날짜는 몰랐었다. 많은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말이다. 그런데 어느 새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순간, 내 머릿속에는 1920년, 1921년 등의 역사적 기록에 대한 정보가 줄줄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난 1919년부터, 내가 살던 세계까지 근 백여년 동안의 역사를 거의 통째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청나게 편리한 능력이었다. 마치 내가 있던 세계에서의 인터넷과 내 뇌가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역사를 알고 과거로 돌아가면,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 지켜보기라도 하겠다는 듯했다.

　그 때, 난 3.1운동 뒤에 일본이 잔혹하게 유혈진압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역사적 현장에 와 있다는 감격보다, 바로 다음에 비극적인 장면이 펼쳐질 거라는 두려움이 훨씬 컸다. 난 지금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텐데, 그런 광경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대한독립만세'라는 환호성만 울려퍼지고, 총소리 비슷한 것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난 옆에 있던 두루마기 입은 남자에게 대충 말을 걸었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은 가슴벅찬 일입니다만, 일본군이 총을 쏘거나 하지는 않을까요? 일본은 이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잖습니까. 일본이 과연 가만히 보고만 있겠습니까?"

　"댁은 어디 두메산골에서라도 올라오셨나보구려. 일본은 저번 전쟁에서 패전했는데, 그럴 힘이 있을 리 없잖소. 이제 우리 나라는 독립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아니, 이게 무슨 말이야?

　저번 전쟁이라면, 3.1운동 때이니 1차 세계 대전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본은 그 때 승전국 측에 가담했었다. 막판까지 유럽 전선에 변변히 참전하지도 않았지만, 일단 같은 편이랍시고 승전국 대우는 받았었다. 그래서 내가 그 때 일본이 다른 측으로 참전했다면, 세계 1차 대전이 끝나면서 독립할 수 있었을 거라고 두고두고 아쉬워했던 것이다.

　그런데 1919년 시점에서 일본이 패전국이라니, 대체 무슨 말이람?

　난 모르는 척하고, 설명을 들어보려고 했다.

　"제가 시골에서 살다가 막 여기 와서, 저번 전쟁 때 어찌 되었는지 잘 모릅니다. 제가 있는 곳은 신문도 제대로 구경할 수 없는 곳이었거든요. 제 날짜에 신문을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난 신문도 제대로 구경할 수 없는 곳에서 지냈다. 다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뉴스를 보지, 누가 신문을 보냐.

　난 제 날짜 신문을 본 적도 거의 없고, 폐휴지가 필요할 때 날짜 지난 신문을 적당히 구할 때 말고는, 신문에 손댄 적도 거의 없다.

　어쨌든 거짓말은 안 했다. 그리고 난 말을 이었다.

　"큰 전쟁이 있었다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제게는 그런 걸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어요."

　바로 아까 전에 이 세계로 떨어져서, 뭐가 뭔지 정말로 모른다. 일단 눈앞에 일어나고 있는 이 광경은 1919년 3월 1일 있었던 3.1운동 같기는 하다는 것, 그게 전부였다.

　"우리 나라가 식민지에서 해방된다는 겁니까? 정말로?"

　"그렇다고 하더군. 패전국 식민지는 이번에 모두 독립하게 된다는 거요. 그러니 일본이 패전국이 된 이상, 우리 나라도 해방될 수 있게 된 거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지요?"

　"일본이 이번에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와 독일 편을 들어 뛰어들었잖소. 그래서 전쟁에서 진 패전국 신세가 되었고."

　오스트리아와 독일이라니?

　이 시대에는 오지리와 덕국으로 불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럽을 구라파라고 부르던 시대였다.그런데 구라파, 오지리, 덕국이 아니라 유럽, 오스트리아, 독일로 들린 것이다.

　아무래도, 나한테는 일종의 통역 능력도 있는 것 같다. 백 년 전 시대와 달라진 언어를, 내가 익숙한 언어 기준으로 변환되어서 들리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방금 들은 말을 종합하자면, 일본이 세계 1차 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었고, 그 덕에 한반도가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단 것이다!

　내가 평소에 아쉬워하던 '만약에'가 실현되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정말로, 생생한 현실로 말이다.

　난 과거로 온 걸까? 아니면 이 곳은 평행세계일까? 아니면 혹시 많은 회귀물 소설처럼 그 연표책 안의 세계에 들어오기라도 한 걸까?

　이 중 어느 쪽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과거 세계든, 평행 세계든 상관없었다. 내가 연표 내용을 바꿨으니까, 바뀐 연표대로 흘러가는 세계에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 난 과거 역사의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상태로, 의사소통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내가 있는 이 세계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난 이 세계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