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에 핀 들꽃이 살랑이고
이슬을 머금은 나뭇가지가 뒤흔들려
물방울들이 우수수 떨어져내려도
나는 가지 못해 못내 너를 기다릴 것이다.
심장이 멈추고
숨이 멎는 한이 있더라도
너를 위해 나는 모든 것을 버리겠지.
불현듯 들려오는 그 음성에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안달내고 탐내다 내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어 나락에 이르렀음에도 결코 놓치 못하리라.
그것을 사랑이라 연정이라, 그렇게 깨우치지만 않았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네가 웃을 때면 가슴이 데인 듯 뜨겁고 괴로워
석양이 지듯
소금이 불타듯
차라리 이 몸이 저물어 타들어가길 바랐다.
그리고 진창에 빠져 홀로 침잠하며 이 운명을 비웃는 것으로
오고가도 못하는 세월을 영원히 끝맺길 빌었다.
나혜-
오로지 너를 위해.
사내가 손바닥의 옥잠을 세게 그러쥐었다. 장식 하나 없는 옥잠이 금방이라도 손에서 부서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근본 없이 조용히 떨리는 꼴이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하지 않음에도 잘 짜인 판에 올려 진 제 자신과. 그리고 그 시절의 그녀는 자신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하고 오만하리만큼 고고했다. 그 차갑고 여린 마음이 내게 조금씩 흔들리고 흔들려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모습을 사랑했다. 눈앞에 펼쳐진 낭떠러지를 뻔히 보고도 모른 체 할 정도로. 홀린 듯 미친 듯 결코 가질 수 없는 너를 원했다. 그것이 허황된 꿈이란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강물을 거스르듯 칼로 돌을 자르듯 순리를 어기면서도 너와 함께 있고자 했다. 그리고 모든 추억들이 족쇄로 돌아와 기어이 이 아화 땅을 벗어나게 했다. 명백한 인과였다. 제 인정 하나 필요하지 않은 본래의 질서.
한데 눈을 감으면 역시 지옥이라도 좋았다. 어디라도 좋았다. 언제라도, 몇 번이고. 네가 곁에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너와 만나 사랑한 모든 순간들을 껴안고 그대로 죽으라면 지금에라도 그럴 수 있었다.
그가 가는 옥잠의 모난 장식에 입을 맞추었다. 바다가 내뿜는 칼바람은 매서웠다. 도헌은 그 바람에 날아갈기라도 할 것처럼 무기력했다. 아니, 실은 이 바다에 몸을 묻고 싶었다. 세월이 흐르듯 흘러가는 물에 몸을 맡겨 그대로 사라 없어지길 기도했다. 그러나 차마 그 바다에 몸을 묻지 못했다. 그에겐 더는 죽을 용기도 싸울 호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덧없는 노래 역시 추억에 묻혔다.
괴어버린 역사
업화에 갇힌 생(生)
나락에 핀 꽃무릇.
다신 돌아오질 않을 추억처럼 노래는 잊혀 가는데, 되레 그 모습은 선명해 눈이 시큰했다.
실로 그런 사랑이었다.
손아귀에 든 힘이 천천히 빠졌다.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처럼. 그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지금 이것을 버리면 출렁이는 파도에 모든 죄가 씻겨나가고 마치 만들어진 것 마냥 완벽한 역사가 새로 세워질 것이다.
너도, 그리고 나도. 언제가 될지 모르는 인연을 기약하며 다시 눈을 감을 수 있겠지.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비로소 영원을 노래하리라.
세상을 삼킬 듯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 아래로 옥잠이 떨어졌다. 가벼운 무게에 비례해 그것이 빠르게 바다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사랑.
사랑.
업보와도 같은 사랑.
매화에 취해, 웃음에 빠져, 바람에 흔들려 너와 함께 나눈 그 모든 순간들은
금방이라도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았던 찬란한 빛이었다.
그리고 그 빛에 등진 어두움은 그들이 간과하고 있던 모든 것이고 추억이고 노래였다.
파도가 잠들어 나룻배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가 바다에서 눈을 돌렸다.
몇 번의 생을 거쳐 시간을 거스르고 거스르다보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악연이든, 인연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그들은 그러한 운명을 타고 났다.
한 때 아화를 돌았던, 그리고 아화와 존재했던 노래가 되어.
이 땅을 떠나면서도 잊지 못하는 서로의 정인이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