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 시간의 여관
“ 베일, 당신을 증오해. ”
아름답던 노을 진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핏빛하늘아래 맑은 눈물이 서린 눈망울은 그를 향한 증오로 가득 차있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꿈에서 깨어났다. 항상 반복되는 꿈이 이젠 익숙해진 그는 자리를 정리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문 밖에서 그가 일어나길 기다렸던 노아는 작은 손으로 노크소리를 냈다. 그는 소매로 이마에 송글히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 들어와. ”
문을 밀고 들어온 노아의 손에는 차가운 물 한 잔이 들려있었다. 언제나처럼 잔머리 하나없이 단정히 내려묶은 노아는 냉수를 건네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 기색이 좋아보이시네요, 마리안님. ”
“ 그런가. ”
마리안은 냉수를 거침없이 마시곤 컵을 노아에게 돌려주었다. 컵을 받고 돌아가야할 노아가 계속 우물쭈물거리며 주변을 서성이자 이유를 알아챈 마리안은 반달처럼 눈을 휘어 웃으며 말했다.
“ 라이언 아직 자고있지? 라이언이랑 테어 깨워서 마당으로 나와. 어제 다 같이 가족사진찍기로 약속했잖아. 약속은 지켜야지. ”
“ 아, 네. 바로 깨워서 데려올게요! ”
노아가 신이 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문을 닫았고 마리안은 아이같은 노아가 귀여워 입꼬리를 올렸다. 마리안은 사진을 찍기위해 자주 입던 어둡고 수수한 자주색 저고리를 재쳐두고 노아가 마음에 들어한 밝은 청색 저고리를 골라 들었다. 사진 찍을 준비를 하며, 마리안은 아까 꿨던 꿈을 다시 곱씹는다. 검붉은 피로 얼룩진 울퉁불퉁 패여진 땅,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저주를 퍼붓는 피에 물든 여자. 마리안의 볼이 선홍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 우린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요? ”
가늘게 찢긴 눈에 서운함이 비쳤다. 위층이 시끄럽자 마리안은 그녀를 생각하느라 멈췄던 손을 다시 바삐 움직였다. 낡은 나무계단이 부숴질만큼 짧은 다리를 허덕이며 급하게 내려오는 라이언과 주황색 곰인형머리가 굴러가는 모습이 그려졌다.
쿵쾅쿵쾅
라이언이다.
쿵쿵쿵
테어다. 천방지축인 그들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뒤따라가며 잔소리를 하는 노아까지. 일상인 셋의 걸음걸이도 마리안에겐 소소한 행복이였다.
“ 라이언씨! 테어씨!! 계단에서 뛰지 말라니깐요! 부숴진다구요!! ”
라이언이 마리안의 문이 부숴지도록 힘차게 열었고 문에 가려졌던 햇빛까지 라이언과 함께 들어왔다. 라이언의 금빛갈기같은 짧은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더 빛이 나자 마리안은 눈부셔 눈살을 찌푸려야했다. 신이 난 테어까지 굴러와 라이언은 집이 떠나가라 큰 목청으로 기쁜 포효를 질렀다.
“ 마리아아안!!! 얼른 준비안하고 뭐해! 빨리, 빨리. ”
“ 알았어, 알았어. 노아랑 같이 준비하고 있어. ”
“ 빨리 와야 돼! ”
갈기를 흩날리며 빠르게 앞마당으로 달려나가는 라이언과 뒤따라 굴러가는 테어. 뒤따라가던 노아가 한숨을 크게 한 번 쉬곤, 그들을 따라나섰다. 마리안은 낡고 물빠진 파랑색 머리끈으로 허리까지 오는 긴머리를 질끈 묶고 방을 나섰다. 화창한 날씨에 마당에서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얘들을 보니, 마리안의 얼굴엔 자동적으로 웃음꽃이 피었다.
“ 왜 이렇게 늦었어! 얼른 찍자! ”
“ 테어씨, 들어드릴게요. ”
“ 테어 몸은 어딨어? 전에 예쁜 걸로 구해왔었잖아. ”
“ 장 보고 오다가 비가 와버렸대요. 마땅히 남은 몸도 없고 해서요. ”
노아가 잔디에 처박힌 테어를 들려고 하자 벌레를 가지고놀던 라이언이 테어를 품에 꼭 안으며 노아의 손을 피한다.
“ 안돼. 테어는 내가 들고있을래. ”
“ ... 네, 뭐. 그러세요. ”
“ 찍자. ”
흑백사진은 낡은 나무액자에 걸려 카운터안에 남 모르게 장식되었다. 먼지 낀 마리안여관은 오늘도 친히 길 잃은 나그네를 받고 있다.
_모라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