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셀리아 력 8월.
남쪽에서 올라오는 찌는 듯한 더위와 서쪽 지방 특유의 습기가 어우러져 가혹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 디아드리아 공국의 어느 숲 속에서, 청년 로잘랜드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고급진 벨벳 튜닉엔 왼 어깨를 감싸고 내려오는 붉은 망토를 걸쳤고 목과 귀에는 값비싼 장신구가 치렁 치렁 달려있다. 허리엔 본래의 용도보단 권위를 상징하는데 더 유용해보이는 우아한 쇼트 소드를 차고있고 공국의 왕족임을 상징하는 황금 독수리가 그려진 반 장갑을 끼고 있는 이 남자, 로잘랜드 폰 디아그리아무스는 벌써 열 흘 째 지속되고 있는 이 여행에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윤기나는 금빛 머리칼도, 뽀얀 피부도 땀 범벅이 된 로잘랜드가 숨을 헐떡이며 숲의 오르막길을 오르던 중 미끄러져, 땅에 코를 쳐박자 그의 바로 곁을 지키고 있던 병사 한 명이 넘어진 로잘랜드의 어깨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전하!"
벨벳 튜닉과 얼굴에 흙을 잔뜩 묻힌채 일어선 로잘랜드는 얕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 빌어먹을 숲을 벗어나고 싶군, 제길 로드릭 대체 지금이 몇 시지?"
"한 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로잘랜드의 망토를 탁 탁 털어주며 로드릭이라 불린 병사가 말했다.
"오, 맙소사."
로잘랜드는 절망섞인 목소리를 내며 손사래를 쳤다. 로드릭의 말에 따르자면 400년 된 고목나무 밑에서 소금에 절인 육포와 야채로 끼니를 때우고 다시 출발한지 아직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던 것이된다.
로잘랜드는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열명 남짓 되는 부하들은 벌써부터 초죽음이 돼 있었다. 습기에 약한 벨벳이 이곳저곳 고장나 흉한 넝마 처럼 변해버린 로잘랜드였지만 적어도 사슬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고 무거운 창을 쥔 저들보다는 상황이 양반일 터다.
"조금 쉬는게 어떤지요. 많이 지쳐보이십니다."
"난 괜찮네만 저들은 금방이라도 쓰러질것 같군."
로잘랜드는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 내 잘못이야, 로잘랜드는 생각했다. 그들은 디아드리아 공국의 병사이지만 동시에 북부의 병사이기도 했다. 로잘랜드가 살고있는 수도 레헤른이 바로 북쪽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건 판게니움 대륙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만한 사실이지만 판게니움 대륙은 북쪽이 춥고 남쪽이 더우며, 동쪽은 건조하고 서쪽은 습하다. 즉, 이들은 남부의 병사들 처럼 얇고 질긴 스콧 울프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 대신 튜닉 위에 저킨을 덧입고 그 위에 사슬 갑옷과 숄더 메일, 투구를 쓴 뒤 은빛 클로크 까지 걸치는게 기본 복장이라는 뜻이었고, 그것이 북부의 추위에 견디기 위한 공국 북부 병사들의 상징이라는 것이었다.
남쪽에 있는 이 숲을 탐색하고자 마음 먹었을 때, 같이 동행할 병사들의 복장을 좀더 가볍게 바꿔야 했던게 아닐까. 부하를 사랑하는 로잘랜드는 후회했지만 엎질러진 물은 이미 주워담을 수 없었다.
"적당한 그늘을 찾은 뒤 저들을 쉬게하게."
탐험 첫 날 부터 저킨과 클로크를 벗어던진 병사들이지만 입고있는 사슬 갑옷과 투구, 창의 무게 탓에 자신 보다 몇 배는 더 힘들 병사들을 생각하며 로잘랜드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난 이 근처에 물가가 없는지 살펴봐야겠군."
"그런 일이라면 제가 하겠습니다."
디아드리아 공국의 백부장 로드릭은 근성이 대단한건지 클로크와 저킨을 아직까지 입고 있었다. 로잘랜드는 로드릭의 복장을 보며 허탈한 한숨을 내쉰 뒤.
"열흘 동안 이 숲을 돌아다녔지만 위험한 마수나 맹수는 보이지 않았네. 이 정돈 나 스스로도 할 수 있어."
"드넓은 산 속에 호랑이가 한 마리라도 있다면 안심할 순 없습니다. 최소한 동행은 허락해 주십시오."
"자네는 날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는군."
"공왕의 장남인 당신에게 무신일이라도 생겼다간 제 목이 달아날테니까요."
결국 로드릭이 동행하기로 했다. 로잘랜드는 나무 그늘 밑에서 땀을 식히고 있는 병사들을 돌아본 뒤 로드릭과 함께 숲을 가로질렀다. 1m쯤 자라있는 풀숲이 나타났다. 로드릭이 즉시 검을 뽑아 풀숲을 베며 길을 만들었다.
풀숲을 빠져나가자 50m 쯤 돼보이는 높다란 절벽이 보였고 그 위에서 떨어진건지 크고작은 바위가 땅을 뒹굴고 있는것이 보였다.
"조심하세요. 낙석이 빈번히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로드릭이 말했다. 하지만 로잘랜드는 아랑곳 않고 품속에서 웬 양피지 한 장을 꺼냈다. 돌돌 말려 끈으로 고정돼 있는 그 양피지는 커피를 쏟은 뒤 말린 것 처럼 곳 곳에 얼룩이 묻어나 있었다. 로잘랜드는 끈을 푼 뒤 양피지를 펼치곤 시선을 그 속으로 던졌다.
"고대 머맨드 족이 섬겼던 신 '아자르뷰스'가 깃들어 있다는 검이 정말로 이 숲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근처에 굴러다니던 돌을 발로 밀어내며 로드릭이 비아냥 거리듯 말했다.
"적어도 그 남자는 그렇게 말했지."
"그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 말이죠? 별로 신용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디아드리아 공국엔 그 남자 처럼 귀가 길고 피부가 잿빛이며, 기분나쁠 정도로 붉은 눈을 가진 인종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이 판게니움 대륙 어딜가도 찾아볼 수 없겠지."
로드릭은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바위들을 슥 훑어보았다. 떨어진 바위 위로 또 바위가 떨어지는 일이 많은 건지 많은 바위들이 완전히 박살나 있거나, 어딘가 패여있었다.
"'유령의 숲' 이라고 했던가요? 뭐, 이름하난 잘 지었군요. 열흘 째 지속되는 숲 탐험 도중, 돼지 한 마리도 찾아 볼 수 없었으니까요. 덕분에 제 부하들은 소금에 절인 육포와 쉰내나는 절임 야채들로 하루 하루를 버티고 있는 실정입니다만."
"그건 틀렸네 로드릭. 자네가 조금전에 베어버린 풀도 하나의 생명이지. 유령의 숲이란 표현은 잘못됐어. 애초에 생명의 보고인 숲과 죽음의 상징인 유령이 공존할리가 없지. 안그런가?"
"예?"
로드릭은 할말을 잃었다. 로잘랜드와 대화하다보면 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빠질 때가 있었는데 그의 주변인물들의 말로 미루어보자면 로잘랜드의 '철학적 관점'이 그 원인인 듯 했다. 학문에 연이 없는 로드릭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길이 없었으나 적어도 이런 일이 있을 때 마다 로잘랜드의 머릿속이 궁금해지곤 했다.
"이것보게 로드릭, 이 양피지에 있는 이 그림 말이야. 이건 확실히 고대 머멘드 족이 신을 섬길 때 만들었던 신전의 모습과 거의 틀리지 않았어. 이런 문헌은 레헤른의 도서관에도 찾아볼 수 없었는데."
"조작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럴리는 없네. 머멘드 족을 멸망시킨건 다름아닌 내 조상들이었으니까. 머멘드 족의 문명과 문헌, 자료들은 모조리 빼앗거나 불태워 버렸어. 그들이 멸망한건 2000년 전이지. 지금에 와서는 머멘드 족이 실제로 존재했는지도 모르는 시민들이 거의 대부분이야. 하지만 이것좀 보게."
로드릭은 곁눈 질로 로잘랜드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황금빛 독수리의 인장이 끝 부분에 희미하게 찍혀있었다.
"이 인장은 틀림없는 우리 디아드리아무스 가의 인장일세. 이 인장이 찍혀있었다 함은 즉, 이 문헌은 본래 우리 레헤른의 도서관에 보관돼 있어야 한다는 것과 같아.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아무래도 그 당시 누군가에게 도둑맞은 것일지도 모르겠어."
"참 심오하군요. 뭐, 제가 알만한 건 이 사람 한 명 살지 않는 숲에 발을 들이게 된 원인을 제공한게 그 미심쩍은 남자라는 것 뿐이지만요."
로드릭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이 길었군. 자, 계속 앞으로 가보자. 이 정도 크기의 숲이니 분명 어딘가에 계곡이나 냇가가 있을거야. 틀림없어."
"어디에 있느냐가 관건이지만요."
로드릭이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로잘랜드가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