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어스름하던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수호는 고목 아래 드리워진 어둠 안으로 들어섰다. 깊게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들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8시 10분. 인적 없는 길목들을 헤맨 지 여덟 시간 십 분째였다.
좁은 길을 달려오는 승용차가 수호의 시선을 붙들었다. 포장 안 된 흙길을 제법 빠르게 달리던 차량은 맞은편의 공터로 들어가더니 즐비하게 서 있는 자동차들 옆으로 나란히 섰다. 젊은 남녀가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동시에 내렸다.
차량을 주시하던 수호는 모자를 다시 쓰며 주위로 시선을 둘렀다.
몸을 숨길 마땅한 건물 하나 없는 휑한 마을이었다. 단층 혹은 이 층인 낮은 건물과 비닐하우스가 드문드문 서 있었고 그사이의 너른 공터마다 주차된 자동차들이 빽빽했다.
남녀가 멀어지길 기다린 끝에 수호는 나무 그늘 밖으로 나섰다. 빠른 걸음을 옮기며 주변 어둠을 훑었다.
-삼 팀. 추정자 발견-
기웅의 목소리가 귀 안에서 울렸다. 수호가 인이어를 깊숙이 고쳐 넣는 동안 무전이 이어졌다.
-승마경기장 뒷길 별관 지나서 동쪽 방면 이동 중-
-추정 몇 프로야.-
김 실장의 답신을 들은 수호는 뛰기 시작했다.
-오십 이상.-
-오십? 오십이 추정이냐! 김 대리 어디야!-
예상대로 김 실장의 짜증이 흘렀다. 수호는 뜀박질을 이으며 쇄골 아래 붙은 마이크를 눌렀다.
“김 대립니다. 궁말로에서, 올라가고 있습니다.”
-쫄랑아, 경기장 서쪽 길로 슬슬 와. 추정자 별관 사잇길로 우회전.-
늘 그렇듯 긴장감 없는 기웅의 무전이었다.
“삼 분 내 도착.”
밭은 호흡으로 답신한 수호는 차량이 즐비한 공터를 전속력으로 가로질렀다. 시설물의 경계를 구분하는 무성한 수풀 사이를 비집고 길과 대지의 경계석을 무시하며 땅을 박찼다.
시설들을 가로질러 도로에 들어서자 속도는 더 빨라졌다. 두 발로 허공을 휘저으며 날듯이 내달렸다.
-삼 팀, 면상 확인, 백 퍼센트.-
기웅의 무전이 수호의 뜀박질에 제동을 걸었다.
-살살 밟기만 해. 노출되면 다 깨진다.-
수호는 쇄골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가쁜 호흡으로 속닥거렸다.
“김 대립니다. 별관 앞 주차장 도착. 강 대리 어딥니까.”
-또 날아오셨네. 우리 쫄랑이는 거기서 그냥 쉬어.-
느긋한 대답이 흐르자마자 수호는 인이어를 헐겁게 뺐다. 예상대로 고함이 터졌다.
-영업 중에 누구 맘대로 쉬냐!-
-그럼 뭐하라 그래요. 제자리에서 뛰고 있으라고 할 순 없잖아요.-
-뭐 인마?-
-여기 인적 드물어서 둘은 눈에 띄어서 그러죠. 다 아시면서.-
이어지는 대거리를 들으며 수호는 모자를 벗었다. 땀에 푹 젖은 머리카락을 흔들어 털어냈다.
-알긴 뭘 알, 이 자식들이 근데 긴장 안 하고, 강 대리! 너 지금 밟긴 밟는 거야?-
-그럼요. 애마교 방면 도보 중-
모자를 다시 눌러쓰고 수호는 마이크를 눌렀다.
“김 대리 애마교로 이동합니다. 후방 대기하겠습니다.”
어둠을 골라 소리 없이 걷는 수호의 검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퇴근 시간의 복잡한 지하철 안이 사당을 지나며 한가해졌다.
이우는 빈자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출입문 앞에 그대로 서서 손목의 디지털시계를 들여다보았다. 08:05:35
평소보다 이삼 분 늦어진 시각에 초조해졌다. 출입문 위의 노선도를 올려다보며 도착역을 눈에 담았다.
-이번 역은 선바위, 선바위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기다리던 안내 방송에 이우는 출입문 중앙으로 섰다. 시각을 또 확인했다. 8시 10분을 막 넘어가고 있었다.
4-3번 승강구로 내린 이우는 플랫폼을 따라 잰걸음을 옮겼다. 주로 비어있는 6-2번 승강구에 오늘 저녁은 사람이 있었다.
짧은 플레어치마에 하이힐을 신은 늘씬한 여자는 뒤로 서는 이우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뾰족한 눈초리는 빈 승강구 다 두고 왜 하필 내 뒤에 서냐, 말하고 있었다.
이우는 시선을 깔았다. 괜스레 죄지은 기분이 되어 뒷걸음질로 그녀와의 간격을 벌렸다. 열차도착 경고음이 요란하게 터졌다.
이우는 다급하게 시계를 보았다. 08:11:57
자세를 반듯하게 고치고 눈을 감았다. 둥근 시계 안으로 돌아가는 초침을 떠올렸다. 셋, 둘, 하나.
카운트다운과 함께 눈꺼풀 안에서 흐르던 시곗바늘이 우뚝 멈춰 섰다.
귀청을 때리던 열차도착 경고음이 뚝 끊겼다. 승강장 전광판 시계의 8과 12 사이 콜론이 깜빡임을 멈췄다.
승강장에 드문드문 서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순간동작으로 멈춰졌다.
그렇지 않아도 조용하던 승강장은 통째로 진공관이 된 듯 적막으로 뒤덮였다.
정지된 시공간에 혼자 남은 이우는 눈을 떴다. 손목시계의 스톱워치를 눌렀다. [00:00:00]로 시작한 숫자가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배낭을 뒤적여 이우는 검은색 토시를 꺼냈다. 흰 셔츠의 소매 위에 덧끼우고 철길로 뛰어내렸다. 근처까지 들어오다가 멈춰진 열차의 헤드라이트가 철길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눈이 아프도록 강한 빛을 등지고 철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철로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차츰 길게 흐려졌다.
철길의 대피 공간을 구석구석 살피는 동안 이우는 스톱워치를 자주 확인했다. 하필 열차 도착 시각이 8시 12분이라서 불편했다. 시간 여유를 충분히 가지고 플랫폼으로 올라가야 했다.
7분 남짓 철길을 확인하고 승강장으로 돌아왔다. 짧은 심호흡을 훅 뱉고 플랫폼 턱 위에 두 손을 올렸다. 합, 기합을 뱉으며 아등바등 매달렸다. 수십 차례 기어오르고 있는 승강장이지만 매번 너무 높았다.
진땀을 빼며 올라온 이우는 몸에 묻은 검은 먼지를 털어냈다. 토시를 벗어 배낭에 넣으며 스톱워치를 들여다보았다. 8분 째 혼자 깨어 있었다.
가까운 대기벤치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벤치 앞바닥으로 엎어져 밑을 들여다보았다. 특이한 볼거리는 없었다. 옆 벤치에는 노인 여자가 앉아있었다. 노인 옆으로 고개를 바짝 수그려 밑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마찬가지로 볼 건 없었다.
볼거리 없는 벤치 밑바닥을 세 개째 들여다보고 다시 스톱워치를 확인했다. [09:34:47] 혼자 쓸 수 있는 시간이 25초 남아있었다.
서둘러 6-2 승강구로 돌아왔다. 짧은 스커트와 멀찍이 간격을 두고 섰다. 사람 없는 양옆 승강구를 번갈아 돌아보고는 스톱워치를 또 들여다보았다. [09:54:21]
원래 서 있던 대로 자세를 반듯하게 펴기 무섭게 요란한 열차 도착음이 터졌다.
철길을 밝혀주던 헤드라이트 불빛과 함께 열차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전광판 시계 8:12의 콜론이 다시 깜빡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