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드립니다. 임신 8주차이십니다"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스친다. 발은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이지 않는다.
한여름에 서리를 맞은 듯 뒤통수가 얼얼하다.
"시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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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 책임질께. 오빠믿지?" 이 말을 믿는 사람은 내 기준 세상에서 제일 덜 떨어진 인간이다.
책임지겠다는 말 함부로하는 인간치고 제대로된 인간 하나 못봤으니까
그런데 지금 나는 책임져 줄 사람이 아니라 하소연할 사람이 필요한 거니까.
혹시, 조금의 책임감이라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여보세요."
-"지금 집앞인데 잡깐 좀 나와주라."
세상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가정교육 잘못받은 쓰레기라도 집 하나는 더럽게 좋다.
"왜"
"쓸데없는 얘기 할꺼면 그냥 가라. 피곤하다"
"아무 토도 달지말고 대답만 해."
쉽게 떨어질 것 같았던 말이 혀 끝에서 잠시 주춤한다.
"뭔데"
"나 임신했어. 책임질거야?"
책임이라는 말, 질색이었는데 막상 책임이라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뱉은 말이 나도 짜증나지만 너라면 혹시나
"야 장난칠라고 이 밤에 사람을 불.....뭐라고?"
"니 애가 나한테 있다고. 내 몸 안에 지금 있는거라고."
"지금 뭐하냐? 내 애라고? 그말 책임질 수 있어?"
혹시나는 역시나이다. 혹시나하는 가정은 그야말로 희망이다.
"너나 빨리 대답해. 네, 아니오로 확실하게 책임, 질 수 있냐고"
벼랑끝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사람은 혹시 누가 잡아주지 않을까 하지만 혹시나는 역시나다.
깊은 어둠 속 절벽에서 구해줄 이는 있을리가 없다.
"하.. 미친 돈 필요하면 말을 하라니까? 이딴 소름돋는 말하지말고"
판도라의 상자에서 인류를 구원할 단 하나가 희망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절망의 끝의 사람에게 희망은 치명적이다. 그걸 왜 신은 몰랐을까 왜 하필 희망따위였을까.
"야..씨. 모르겠고 복잡 해 죽겠으니까 그냥 가라. 내일 얘기하자."
예상했던 반응. 예상했던 말들이다.
그런데 말 하나하나가 자꾸 심장을 짜른다. 무슨 대답을 기대했던걸까.
그 애한테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 생각해보면 틀린 말 하나 없잖아.
내 나이 18이다.
무슨 실낱같은 희망을 찾고 있었던 걸까. 생각하고 말고도 없었던거다. 그런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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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악-!
소녀 얼굴만한 손이 소녀의 위로 날아왔다.
'애미도 없는 년이 뭐? 너 지금 네 아빠 어떻게 된건지 알고 이러니?'
본인 일이 아닌 사람들은 서로 입방아 찧기 바쁘다.
'애 엄마가 바람이 나서..'
'에휴..쯧쯔 애가 불쌍해서 어쩌누...'
'저 친 딸 아니라는 소리도 있던데요 뭐.'
'딸은 엄마를 닮는다는데 벌써부터 싹수가 보여 싹수가'
니가 니 자식 낳으면 할 짓이 뻔히 보인다고 버릴거잖아 니 엄마가 했던 것처러...
"아니야..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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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으로 흥건하다. 또 꿈이다. 벌써 몇년째 반복된다.
무섭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 다는 말을 지겹게 들었고 그 말을 증오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똑같은 길을 걷고 있는게 아닌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어떻게해서든 그 말을 깨부술거라고, 뿌리를 뽑아버릴 것이라고 10년 동안 다짐했다.
나, 도대체 뭐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