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기 전에
오늘은 2018년 11월 23일 새벽 1시 56분. 그리고 보니 할머니 생신이 내일이다. 나의 할머니 오노미님은 음력 1919년 10월 14일, 양력으로는 11월 24일에 태어나셨다. 유관순 누나가 3월 1일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다 옥고를 치르고 돌아가셨다는 그해에 태어나신 것이다. 꼭 100년 전 이야기이다.
며칠 동안 나는 계속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아프다.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서 이제는 그것을 외면할 수가 없다. 100년 전의 이야기가,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잠결에 들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계속 가슴을 쿵쾅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찬란한 어느 봄날의 버드나무 잎에서 풍기던 향기이고, 얼굴 가득 쏟아져 내리던 어느 여름날의 따가운 햇볕의 감촉이고, 가을에만 먹을 수 있던 달콤한 홍시 맛이었으며, 한겨울 서로를 부둥켜안고 자장가를 불러주던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 모든 감각이 내 안 어딘가에 고스란히 살아있었던 것일까. 사라져버린, 이제는 사라져버린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들이 자꾸 다시 되살아나서 내 심장을 두드린다. 깨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 이야기들이 깨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준비가 안 됐다고, 먹고 사느라 바쁘다고, 핑계를 대보지만 이제 나는 이 이야기들을 해야만 하는 모양이다.
열아홉 살, 당시로는 늦은 혼인을 했던 소녀 노미와 그녀의 남편 진화, 그리고 여섯 명의 시동생들 윤화, 남화, 석이, 민화, 태화, 정화 이야기. 나에게는 할머니 할아버지이시고, 또 작은 할아버지들이시다. 하지만 그 시절 그들은 열아홉 살의 소녀였고, 스물두 살부터 열다섯 살 사이의 소년들이었다.
일제 강점기 막바지였고, 그 탄압이 극에 달하던 어두운 시절이었다. 그들이 살던 동네는 경주에서도 동해 바다 쪽으로 한참이나 들어가는 감포 근처의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그러나 농사나 짓고 살던 순박한 가족들이라 해서 아픈 역사의 그림자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왠지 그 시대 이야기를 잘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공출, 몸빼바지, 배급, 위안부, 징용, 징병, 이 반갑지 않은 단어들은 오랜 세월 우리에게는 부끄러운 역사였다. 그래서 다들 모르는 척했다. 그랬더니 어떤 이들은 아예 그때 그런 일들이 없었던 것처럼 말한다. 우리의 부끄러움과 그들의 뻔뻔함이 이 시간을 우리의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지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들은 그 시절의 그들은, 그 소년, 소녀들은 그 누구보다도 찬란했고, 아름다웠고, 사랑스러웠으며, 따듯하고, 아프고, 슬프고, 그리고 행복했다. 처절하게 가난했고, 상상할 수 없는 비극을 겪어야 했으며,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하기도 했다.
우리네 인생이란 게 늘 그렇지 않은가. 옛날이야기 좋아하는 내가 조르면 할머니는 자장가 같은 그 이야기들을 한 개씩 한 개씩 꺼내어 들려주셨다. 짧기도 하고 길기도 했던 그 이야기들이 끝날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에고~~, 우예 그 얘기를 다 하겠노. 책을 100권을 써봐라. 그래도 그 얘기 다 몬한데이~.”
그랬나보다. 감히 그 얘기를 다 할 수 없기에 감히 이 이야기들을 꺼낼 수조차 없었나 보다. 할머니는 2012년 93세에 돌아가셨다. 그리운 사람들을 참 많이도 먼저 보냈다고 하셨다. 남은 아이들이 걱정되기도 하셨겠지만, 어찌 됐든 잘 살아 내리라 믿으셨다.
가끔 나 정말 잘살고 있나 하고 돌아본다. 잘 살아야지. 잘 살아야겠지요. 그래서 나는 이제 할머니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자꾸 뒤로 미루다간 아무도 이 이야기를 모르게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다 아는 이야기,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소녀 노미와 일곱 소년들 이야기. 그리고 그 소년들을 사랑한 소녀들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