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 씨. 당신에게는 이 여성을 조회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예상치도 못한 대답에 엘리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엘리야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외쳤다.
“네? 그래도 제가 헬레네의 전담 악마였는데, 조회할 수가 없다니요?”
엘리야 정도의 실적과 지위면 일개 인간의 조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그녀가 전에 헬레네의 전담 악마였다면 더욱 그녀가 못 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직원 천사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정확한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이 인물 자체가 미카엘 천사님 정도의 직위가 되어야 볼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어요. 미카엘 천사님 아래 일개 사원들은 볼 권리가 없습니다.”
직원은 이제 엘리야가 나가길 바라는 얼굴로 그녀에게 눈치를 주었다. 쫓겨나듯이 조회실을 나온 엘리야는 멍한 얼굴이었다.
‘어째서 헬레네가 미카엘 님 정도가 되어야 볼 수 있게 극비 인물이 된 거지? 환생한 헬레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엘리야는 마지막까지 괴로워하다 눈을 감았던 헬레네의 모습을 떠올렸다. 엘리야는 환생한 헬레네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엘리야는 등을 타고 올라오는 불길한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
‘헬레네의 전담 악마나 천사만 만나볼 수 있어도 안심이 될 텐데…!’
*
“사건 현장에서 제가 이걸 발견했습니다. 이걸 발견하자마자 정체 모를 자에게 기습을 당했고요.”
비비안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키리안이 가져온 장신구를 유심히 보았다. 자세히 뜯어보던 비비안의 얼굴이 아까와는 다르게 심각해져 있었다. 키리안은 항상 웃는 얼굴인 비비안이 저런 어두운 표정을 하는 걸 이번에 처음 보았다.
“이게 사건 현장에서 발견되었단 말이지…….”
키리안은 긴장한 얼굴로 비비안의 안색을 살폈다. 비비안이 그 장신구를 비눗방울 같은 모양의 구에 담았다. 그 장신구가 완전히 담기자 구가 허공에서 사라졌다.
“일단 이건 내가 가지고 있을게.”
키리안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짐작이 되는 용의자가 있나요?”
그 말을 듣고 비비안은 팔짱을 끼고 한참을 고심했다. 그녀는 눈을 빛내며 자신을 보고 있는 키리안을 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 너는 이 사건 조사를 맡고 있으니까, 극비 사건이라 해도 어느 정도 정보는 아는 게 맞겠지.”
비비안이 손가락을 튕기자 두 사람 사이에 작은 화면이 떴다. 작은 화면 안에는 한 빛이 태양처럼 크고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비비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회사의 보스라고 할 수 있는 '신'은 세계가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했지.”
비비안의 말을 들은 키리안은 화면으로 보이는 저 빛이 ‘신’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비비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 주변으로 그와 맞먹는 크기인 어둠이 닥쳐오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런 신과 마찬가지로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함께 존재했던 이들이 있어. 그들이 바로 7대 악마야.”
“7대 악마요?”
“응. 신과 7대 악마들은 인간의 역사를 지배하는데 누가 주도권을 잡을 것이냐로 아주 오랫동안 내전을 치렀어.”
비비안의 말에 따라 화면 안에서는 7명의 실루엣과 함께 있는 악마 군대가 천사 군대와 격렬하게 싸우는 장면이 펼쳐졌다.
“결과는 신이 거의 승리했고, 악마들에게 불리한 평화 조합을 맺게 했어. 7대 악마들을 제외한 악마들은 모두 신의 수족이 되어 신의 일에 성실하게 수행한다.
하지만 7대 악마는 그 업무를 수행할 의무는 없으며, 신은 그들이 무엇을 하든 관여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이 요구한 대로, 소수의 천사를 제외하고는 사내에서 7대 악마를 아는 것도 원래는 금기사항이야.”
이야기를 마친 비비안이 손바닥을 부딪치자, 화면이 꺼지며 사라졌다. 그동안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들은 키리안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선배가 그들의 이야기를 저에게 알려주신다는 건…….”
“그래, 이 장신구는 7대 악마라는 증표로 그들만이 지니고 있는 거야.”
“그러면 7대 악마들이 강력한 용의자인 거군요.”
비비안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였고 키리안이 되물었다.
“그들만의 특징이랄 게 있을까요?”
“사실 우리도 그들의 신원을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어. 그들 전체 멤버를 알고 있는 건 가브리엘 님과 미카엘 님 정도? 왜냐하면 그들은 변신술을 할 줄 알거든.
그래서 신이 계약 조건 중 하나로 그들을 나타내는 상징의 장신구를 계속 지니게 했어. 변신술을 했을지라도 7대 악마인 걸 알아볼 수 있게 말이야.”
'변신술?‘
키리안이 차분해진 얼굴로 돌아와 물었다.
“그러면 이제 엘리야 선배와 제가 7대 악마들을 한 명씩 심문할까요?”
“뭐? 아니!”
그 말에 비비안은 어찌나 크게 놀랐는지 몸을 펄쩍 뛰다 넘어질 뻔했다. 키리안이 휘청거리는 그녀의 팔을 잡아주었다. 비비안은 여전히 흥분한 얼굴로 키리안을 향해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7대 악마들은 흑마법 능력이 여느 악마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뛰어나. 환술이나, 저주를 거는 것 외에도 그들의 능력은 다 파악이 안 될 정도로 무궁무진해. 7대 악마들에겐 일반 악마들이 기절할 수준의 ‘권능’도 잘 통하지 않을 정도야.
너와 엘리야가 7대 악마들을 상대하는 건 정말 위험해. 일단 이렇게 계속 단서를 모아서 우리에게 보고해줘.”
“네 알겠습니다.”
키리안은 나가려다가 또 궁금한 게 있는 듯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비비안과 눈을 맞춘 키리안이 물었다.
“그럼 7대 악마 중에 이 회사에서 같이 근무하는 악마도 있나요?”
“7대 악마들은 신의 말을 듣기 싫어하니까 회사에 있는 경우가 거의 없지. 7대 악마는 다른 악마 사원들과 달리 일에서 자유로운 게 계약 내용이기도 하고. 그런데…….”
순간 비비안의 머릿속에 적금발의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남성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홍옥처럼 아름다운 붉은 눈을 가졌고 장난꾸러기처럼 짓는 미소가 매력적이었다. 끄응. 그를 떠올린 비비안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요즘, 일반 악마 사원 행세를 하면서 회사를 다니고 있는 7대 악마가 딱 하나 있어.”
비비안은 며칠 전에 회사 복도에서 그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를 기억했다. 비비안도 처음엔 그를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가, 몇 걸음 안 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약한 환술 정도만 걸어놓았는지, 비비안 정도의 천사는 그가 일반 악마가 아니라 7대 악마인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자 그의 붉은 눈과 비비안의 눈이 순식간에 마주쳤다.
그 순간 그는 검지를 들어 자신의 입가에 갖다 대었다. 7대 악마의 정체는 일반 사원들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신과의 계약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듯했다.
비비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신의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7대 악마의 특권이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왜 여기서 악마 사원으로 변장해 일하고 있는 것일까?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건지, 그 악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니까.”
비비안의 말을 들은 키리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앞으로 회사에서 마주치는 악마 사원들을 잘 살펴봐야겠군.’
키리안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사무실을 나섰다. 처리해야 할 서류를 마저 읽던 비비안은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어, 그러고 보니?’
비비안의 머릿속에선 일반 악마 사원으로 위장한 그를 복도에서 마주쳤던 그때를 되감고 있었다. 그의 옆에 또 다른 일반 악마 사원이 서 있었다. 둘은 담소를 나누며 휴게소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가 7대 악마라는 것만 빼면 평범한 풍경이었다. 비비안은 기억을 더듬어 그의 옆에 있던 악마 사원이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그때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그 악마 옆에 있었던 건…….’
엘리야인데.
*
그 후로도 엘리야는 일주일에 한 번씩 헬레네의 조회를 부탁하러 조회실을 방문했다. 안 될 걸 알면서도, 희망을 놓지 못한 그녀의 발걸음은 어느새 조회실로 향하곤 했다. 그녀가 허리를 굽혀 간절히 부탁해 보아도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이번에도 조회를 거절당한 엘리야는 기운이 없는 얼굴로 복도를 걸었다.
“안녕, 엘리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엘리야가 뒤를 돌아보았다가, 상대를 확인하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엘리야가 빙글빙글 웃고 있는 상대에게 장난스럽게 답했다.
“어지간히도 한가한가 봐? 레비”
붉은 기가 도는 금발을 가진 남성이 엘리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레비는 큰 키가 아니라면 여성으로 착각할 만큼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신이 섬세하게 조각한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중에서도 긴 속눈썹 아래 자리한 붉은 보석과도 같은 눈이 시선을 뺏기게 했다. 그 눈이 엘리야만을 향해 빛났다.
“그럼, 나는 워커홀릭인 누구와는 다르거든.”
적금발 머리를 한쪽으로 묶은 레비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앞만 보고 묵묵히 걸어가는 엘리야의 옆을 바짝 따라가며 말했다.
“어딜 다녀오는 거야?”
“……네가 알 필요는 없는 일이고.”
“이미 답을 해줬네. 이번에도 헬레네를 조회하러 갔구나?”
레비의 말에 엘리야의 빠른 발걸음이 뚝 그쳤다. 엘리야는 눈을 가늘게 떠 레비를 흘겨보았다. 레비는 그런 엘리야의 반응에도 변함없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까부터 봤는데 처진 어깨를 하고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잖아. 그리고 웬만하면 어디 다녀왔는지 나한테는 말해줄 텐데 말을 숨긴다는 건 뻔하지.”
엘리야는 들고 있는 서류철을 레비 쪽으로 날파리를 쫓아내듯 휘휘 젓더니 말했다.
“마지막 말 빼고는 정답이야.”
서류철을 빠르게 피하던 레비가 순식간에 엘리야의 앞을 막아서서 말했다.
“에이~ 왜 이러실까 같은 악마 동기끼리. 엘리야 너는 숨기는 게 많아서 탈이야.”
“너는 상대에게 관심이 너무 많아서 흠이고.”
엘리야는 귀찮다는 얼굴로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레비를 피해서 걸어갔다. 엘리야를 향해 레비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이상하지 않아? 네가 헬레네 조회를 할 수 없다는 게.”
그 말에 엘리야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레비 쪽을 향해 돌아보았다. 엘리야와 눈이 마주친 레비가 매력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네 실적이면 웬만한 인간들은 다 조회가 될 텐데. 그렇지?”
“물론 이해가 완전히 안 가는 건 아냐. 선배랑 파트너일 때 배정받은 사람이니까 꺼리는 건 알겠어.”
레비는 엘리야가 침착하게 대답하려 노력했지만, 뒤로 갈수록 그녀의 말끝이 떨리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빙긋- 눈웃음을 지으며 속살거렸다.
“하지만 그 뒤로 수백 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조회를 거부당한다는 건 이상하지 않아?”
“…….”
“상부에서는 이유조차 알려주지 않지?”
괴로운 얼굴을 하고서 엘리야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 레비.”
레비는 엘리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웃음기를 지운 레비가 엘리야를 향해 다가왔다. 엘리야의 등이 복도의 벽에 부딪쳤고 레비는 그런 엘리야를 내려다보았다. 레비가 엘리야의 한쪽 뺨을 검지로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내가- 환생한 헬레네의 전담 천사를 알고 있다면 어떡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