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N! 이게 얼마만이야? 잘 있었어?”
봄은 내 손에 들려있던 이동장에서 N을 꺼내더니 한참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의 재회다. 나와 엄마, 아빠는 보이지도 않냐며 한 마디 하려다 N의 보드라운 털이 그리울 만도 해 삼켰다. 대신 엄마가 N을 뺏었다.
“털 조심해야 한다며?”
“5개월 지났으니까 괜찮을 거야. 금단현상 일어날 것 같아. 다시 줘 봐. N!”
엄마와 봄이 N을 사이에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아빠는 준수의 안내를 받아 식탁으로 향했다. 나도 그 둘을 따라 식탁으로 가서, 어제 만든 초코타르트 케이크를 한 쪽 구석에 내려놓았다. 식탁은 이미 차려져 있었다. 밥과 국만 담고, 방금 볶은 것 같은 불고기만 접시에 옮기면 됐다. 준수는 아빠에게 줄 물을 따르고 있었다. 그릇을 찾아 밥과 국을 푸려는데, 봄이 말렸다.
“언니 생일상인데 내가 할게.”
“뭘 이렇게 많이 했어?”
“밑반찬들은 우리가 먹던 거고, 불고기는 샀어. 그래도 미역국은 내가 끓였다.”
“이봄한테 생일상도 받고, 내가 참 오래 살았네.”
“엄마 앞에서 할 소리야? 우리 봄이 고생했네.”
“그래, 고생했다. 고마워.”
튼튼이, N, 요즘 뉴스를 채우는 대통령 이야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대화가 이어졌다. 아빠의 베이지색, 엄마의 진분홍색, 봄의 노랑색, 준수의 연두색까지 모두 즐거워보였다. 평소에는 각자의 일로 바쁘지만, 누군가의 생일을 핑계 삼아서라도 가끔 모일 수 있는 물리적, 심리적 거리에 있는 우리가 참 다행이었다. 꽤 시끌벅적한 식사를 마치고 식탁을 한 번 정리한 후, 케이크가 주인공인 상이 다시 차려졌다. 봄은 찻물을 끓이고, 엄마는 과일을 깎고, 준수는 설거지를 했다. 아빠는 봄이 꺼내 준 디저트용 접시에 포크를 올렸다.
“그럼 다 준비됐지? 자기야 불 좀 꺼 봐. 언니는 이 모자 쓰고, 아빠 촛불 좀 붙여주세요.”
“고깔모자까지 쓰라고? 안 쓰면 안 돼?”
“일부러 사온 건데 당연히 써야지. N도 데려와서 같이 노래 부르자.”
“유난스럽게.”
“봄이 언니 생일이라고 많이 준비했네. 그냥 하라는 대로 해.”
낯선 곳이라 이동장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던 N도 궁금했는지 어느새 밖으로 나와 식탁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깔모자를 쓰고 N을 들어 케이크 앞으로 오자 생일노래가 시작됐다. ‘3’과 ‘0’에 붙은 불을 껐다. 봄이 하라는 대로 잠시 눈을 감고 소원도 빌었다.
“언니, 무슨 소원 빌었어?”
“말 할 것 같아? 이거 제가 어제 만든 케이크예요. 맛 좀 보세요.”
“맛있어 보여요. 아버님, 어머님도 어서 드세요.”
“우리 딸이 요리에도 재능이 있었나. 지난주에 만들어 온 것도 맛있던데.”
“좋은 선생님 만나서 잘 배워서 그래요.”
“아, 맞다. 냉장고에 호두파이랑 에그타르트도 있는데. 아빠, 그것도 드셔 보실래요?”
“어제 G에 갔었어? 파이 사러?”
“응, 오후 네 시쯤. 그 선생님도 볼 겸 해서.”
“이상한 소리 한 거 아니지?”
“언니 동생이라고 하고, 우리 언니는 자기 생일케이크를 직접 만든다고, 뭐 그 정도 인사만 했어.”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얘기했다고?”
“내가 뭐 잘 못 한 거야? 그 분도 알잖아?”
머리에 쓴 고깔을 벗어던지고, 거실로 향했다. 소파에 놓인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새로운 메시지가 있었다. 이상우가 아니었다. 태영에게서 온 것이다.
-이보라, 생일선물 제대로 할 수 있겠다. 오늘 보이는 날이야.
당장 이상우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그것도 주인공인 내가,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는 없었다. 오른손바닥으로 쇄골 절흔을 지그시 눌렀다. 다시 식탁으로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
“언니 생일이 비밀인거야?”
“비밀은 아닌데, 말은 안 했어.”
“자기야, 내가 실수했나 봐.”
“가지 말지 그랬어.”
“자, 자,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즐겁게 보내자. 이보라, 이봄, 알았지?”
“케이크 괜찮죠? 이제 더 안 만드니까 오늘 실컷 드세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려고 이런저런 대화에 몸을 실었지만, 머릿속 시간은 어제 저녁으로 되돌려져 있었다. 고개도 끄덕이고, 추임새를 넣어가며 맞장구도 치고, 알지도 못하는 연예인 스캔들에 거짓 호기심을 내비쳤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성호경을 긋고, 못 보내겠다며 글썽이는 봄에게서 N을 뺏어 이동장에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동장에서 나오자마자 짧게 몇 번이나 울어대는 N을 한 번 길게 쓰다듬어줬다.
“원치도 않는 외출하느라 너도 고생 많았어.”
사과를 받아주는 건지 N은 잠시 내 눈을 바라봤다. N이라도 앞에 놓고 이상우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싶었는데, 잠시 뒤돌아 있는 사이 내 앞에서 사라졌다.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몇 번이나 시간을 되돌려 봤다. 결론은 같다. 이상우는 내 거짓말을 모르는 척 했다. 눈 감아 주기로 한 거니까 나도 이대로 잠자코 있어야 하는 건지, 지금이라도 달려가 어떤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지, 원치도 않는 진실을 마주한 이상우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없었다. 나와 함께 침대에 널브러진 가방이 움직였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휴대전화를 꺼냈다. ‘구 남태평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