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대리, 장애 터진 서버들 위치가 어떻게 되지?"
"위, 위치요?"
의아해하는 안 대리를 침착하게 바라보는 이수.
"혹시, 그 서버들..
한 곳에 모여 있지 않아?"
일목요연하게 엑셀 시트로 정리된 서버 리스트를 찾아보는 안 대리.
"음, 맞아요. 팀장님.
서버 8대 전부 데이터 센터 5층, 7번 랙에 설치되어 있어요."
(정이수, 부디.. 네 직감과 촉이 무뎌지지 않았길 바래..)
"당장 서버 담당자한테 연락해서..
그 랙에 연결된 멀티탭 퓨즈가 내려가지 않았는지
확인해 보라 그래."
"넵, 팀장님."
"가능한 빨리 처리해! 1분 1초가 아까우니까.."
통화하는 안 대리의 목소리가 다급해진다.
"가, 강 이사님. 저희도 워크숍 진행 중에 이런 장애가 터져서.. 죄송합니다.
원인 파악해서 조속히 서비스 재개하겠습니다."
깐깐한 검색 부문 강 이사가 참지 못하고 연락을 했나 보다.
하태오 이사는 장애 현황을 간단히 설명하고, 정중히 양해를 구한다.
그는 통화를 끝내자마자 정 팀장에게 다가오는데..
"정 팀장. 어떻게든 원인 파악이라도 해보자.
뭔가 실마리 잡히는 게 있을까?"
"이사님, 혹시 2년 전에..
커뮤니티 서비스 장애 기억나는지요?"
"커뮤니티? 재작년 8월이었나?
그 한여름에 터졌던 장애 말하는 거지?"
"네."
그때 서버 담당자와 통화 중이던 안 대리가 그들에게 다가온다.
"팀장님. 7번 랙에 설치된 멀티탭 퓨즈가 계속 내려간다 하네요.
그 바람에 연결된 서버가 다운된다고 합니다."
(퓨즈가.. 계속 내려간다고?)
하 이사와 정 팀장이 뭔가 감이 잡힌다는 듯..
서로 마주 보더니 한 목소리로 외친다.
"과전압! 과전압이야."
"안 대리, 그 멀티탭에 혹시 서버 말고
다른 장비 연결해 놓은 거 있는지 확인해 볼래?"
"넵!"
잠시 서버 담당자와 통화하던 안 대리.
"팀장님, 7번 랙 주변에 냉방 장치가 고장 나서
오늘 오전에 대형 송풍기를 멀티탭에 연결했다고 합니다."
(그, 그 놈이 범인이야..)
"역시.. 그 문제가 맞았어. 예상한 대로야."
"안 대리, 당장.. 그 송풍기..
멀티탭에서 제거하라고 그래.
그것 때문에 과전압이 걸려서 퓨즈가 계속 내려가고..
검색 서버들이 강제 다운되는 거야."
서둘러 이수의 지시 사항을 담당자에게 전달하는 안 대리.
"그 송풍기.. 바로 제거했다고 합니다.
멀티탭 퓨즈 상태 보는데.. 괜찮다고 하네요."
컨퍼런스 룸 정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표시된
이미지 검색 서비스 상태가 빨간색에서
정상을 뜻하는 초록색으로 바뀐다.
"좋았어! 역시 '일당백' 정 팀장이야.
여전히 실력은 녹슬지 않았네."
기뻐하는 하태오 이사의 다소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모두들 정이수 팀장 곁으로 다가와 그녀를 격려해 준다.
"팀장님 덕분에.. 이렇게 빨리 장애 해결할 수 있었어요."
"당신이 도와준 덕분이야. 고마워, 안 대리."
"제가 뭘요.
전 팀장님 지시대로 따라한 거 밖에는 없는데요."
유 차장이 다가와 그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한마디 한다.
"자, 뻔한 공치사는 이 정도로 끝내고..
선행기술팀에서 급한 불은 껐으니
나머지 뒷수습은 인프라지원팀에 맡기라고.."
"유 차장님. 데이터 센터 5층에 냉방 장치 고장 났다는데..
확인해봐야 될 듯 해요."
"무더운 여름에 에어컨이 종종 맛이 갈 때가 많단 말이야.
최대한 빨리 조치할게. 정 팀장."
멀찍이 뒤에 서서 귀엣말로 수군대는 변 팀장과 주 과장.
"변 팀장님. 정 팀장.. 너무 나대는 거 아닙니까?"
"그러게. 항상 내 앞에서 걸리적거린단 말이야."
"가만 놔두면 안 될 거 같은데요.
적당히 견제도 하고, 태클도 들어가야.."
이때, 뒷담화를 즐기는 그들의 뒤로 살며시 다가온 하태오 이사.
"주 과장은 뭐 하고 있나?
어서 짐 싸서 체크아웃하고, 서울 올라갈 준비 안 하고.."
"이, 이사님. 서비스 장애도 해결됐는데,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자네가 이번 장애 해결에 보탬이 얼마나 됐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해 보게, 주 과장."
이대로 가만 있으면 자신까지 불똥이 튀겠다 싶은 변 팀장이 나서서 주 과장을 감싼다.
"당신도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연락하고 노력했잖아, 안 그래, 주 과장?"
"네, 네. 팀장님."
"아무튼 다음 인사 평가가 얼마 안 남았으니.. 잘 처신하라고.."
"명심하겠습니다. 이사님."
(이건 뭐.. 차라리 사무실에서 일하는 게 낫지.
멀리 제주도로 워크숍 와서까지
욕 먹고, 잔소리를 들어야 하나?)
한쪽 입가를 씰룩거리며 불만 섞인 표정을 짓는 변 팀장.
하 이사가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하려는 듯 박수를 두어 번 치더니
"자, 이제 업무 계획 발표는 이쯤에서 정리하고..
다음 일정이 뭐지, 유 차장?"
"호텔 앞 해변에서 물놀이도 즐기고, 자유롭게 쉬면 됩니다.
그 다음은 물회로 유명한 식당에 저녁 식사 예약 잡혀 있네요."
"좋아, 장애도 깔끔하게 해결했으니..
제주도 내려온 기분도 낼 겸..
놀멍쉬멍, 맘껏 놀고 먹고 쉬자고.."
사람들은 기쁜 표정으로 컨퍼런스 룸을 빠져나가고,
장내를 밝힌 화려한 조명은 이내 꺼진다.
***
<세 시간 후, 변 팀장이 묵는 호텔 룸>
"제가 특별히 제조한 '암바사 주酒'..
쭈욱 원샷해요.. 원샷!"
변 팀장은 테이블 주위를 둘러앉은
하태오 이사와 사람들을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둘러보며,
맥주잔에 소주와 맥주 그리고
우유 탄산음료를 적당히 따르더니
휴지 두 겹으로 잔 입구를 잘 막고는..
컵 바닥을 손바닥으로 세게 올려친다.
컵 안의 내용물이 강한 충격을 받아
빠르게 소용돌이치며
한 번 마시면 도저히 멈출 수 없다는
극강의 폭탄주가 만들어지는데..
잠자코 그 과정을 보고 있던 이사님이 한마디 한다.
"역시.. 변 팀장이 술자리에서는
최고의 분위기 메이커라니까..
그런 의미에서 제조한 사람이 먼저 원샷하는 게 어때?"
"네, 제, 제가요?"
"그래, 회사에서 자타공인 '술상무'하면
변 팀장 아닌가?"
"넵, 이사님. 그럼 제가 먼저.."
그는 이사님의 잔뜩 띄워주는 말에
금세 눈코입을 한가운데 모으고 함박웃음을 짓더니
망설임 없이 첫 잔을 한숨에 들이켠다.
"캬아아~!
제가 만들어서 그런지.. 더 맛있네요."
이어서 주 과장이 폭탄주를 제조하는데..
휴지를 반으로 접어 틀어막고..
손바닥으로 세게 올려친다는 것이
너무 힘이 들어가.. 삑사리가 났는지..
그만..
유리컵 안의 내용물이 폭발하듯 터지며
옆에 앉은 변 팀장의 번들거리는 얼굴에
직격으로 쏟아지고 만다.
"벼. 변 팀장님. 죄송합니다."
방금 전까지 자신만만했던 변태균 팀장은
비릿한 맥주와 소주 냄새가 작렬하는
자신의 면상을 가린 하얀 거품을
휴지로 닦아주는 주 과장의 손을 뿌리친다.
"죄송한 거 알면..
알아서 원샷해!"
"넵, 티, 팀장님."
주 과장은 허여멀건 우윳빛 액체가 반쯤 남은 컵에
소주를 3분의 2 쯤 채우더니..
망설임 없이 원샷한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마시자구. 마셔!"
"오늘 밤은 짧아. 미치도록 마셔보자구.. 원샤앗~!"
이후는 모두가 예상했다시피..
끊임없이 제조되는 각종 폭탄주의 향연이 펼쳐지고..
그 이름들 또한 무시무시하다.
사이사이 놓인 양주잔이 퐁당퐁당 차례대로 빠지는
칙칙폭폭 '열차주'에
방사능주, 고진감래주 그리고 홍익인간주 등등이
쉴 새 없이 만들어져
사람들의 식도를 통과해 위장 속으로 들어간다.
(정이수 팀장. 내가 당신을 위해
특별히 '한 잔' 말아줄 테니..
기대하라고..)
변 팀장은 테이블 아래 감춰 둔 유리컵에
소주에 맥주, 양주, 콜라
그리고 레드 와인을 골고루 뒤섞은
일명 '핵폭탄주' 를 몰래 만들고는
젓가락으로 두어번 휘젓는다.
"정 팀장. 이거 내가 스페셜 레시피로 제조한 건데..
한 잔 쭈욱 들이켜. 오늘 수고했잖아."
정체 모를 걸쭉한 액체가 담긴 유리잔을 이수에게 건네는 변 팀장.
어느새 변 팀장의 음흉한 의도를 눈치챈
주 과장도 정색하며 부추긴다.
"맞아요. 정 팀장님 아니었으면 전 지금쯤..
김포행 비행기에 몸 실었을 겁니다."
"원샷! 원샷! 정 팀장님.. 원샷~!"
주 과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법석을 떨며 원샷을 외치고..
사람들도 환호성을 지르며 이에 호응하는데..
(변태균, 당신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알고..
이거 마시면 그냥 '꽐라' 되는 거야..
정이수, 절대 마시지 마.)
이수는 잔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는데..
"따앙!"
갑자기..
테이블 위에 빈 유리잔을 세게 내려놓는 하태오 이사.
주 과장을 비롯한 사람들의
헤헤거리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데..
"정 팀장. 오늘 최고였어. 내가 한 잔 따라줄게."
빈 잔에 맥주를 가득 따르더니, 이수에게 건네준다.
"그 폭탄주는 내가 대신 마셔도 될까?
오늘은 당신 덕도 보고 했으니.
특별히 이번만..
정 팀장 '흑기사'하기로 하지."
하태오 이사의 폭탄 같은 발언에..
이수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지만..
자신의 흑기사를 자청한
그를 향해 번지는 옅은 미소를 감출 수는 없었다.
"이사님.. 원샷, 원샷!"
잠시 어색한 침묵을 지키던 사람들은
다시 이사님을 응원하는 함성을 내지르고..
태오는 변 팀장이 제조한 그 폭탄주를 단숨에 마셔버린다.
"우와.. 이사님, 대단해요."
이사님은 빈 유리잔을 테이블에 탁 내려놓더니..
주 과장을 부른다.
"저기.. 주 과장, 키친 수납장에 냉면 그릇 좀 가져와."
"넵"
이사님 앞에 빤뜩빤뜩한 양은그릇이 놓이고..
"아까 변 팀장이 폭탄주 만드는 거 보니까
결정적인 '한 방'이 빠졌더라고.."
그는 맥주와 소주, 양주, 와인에 탄산음료를 병째 콸콸 붓더니..
마지막으로 반쯤 남은 걸걸한 막걸리를
화룡점정으로 털어 넣고는..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 맛을 본다.
"크으으.. 맛나다."
"변 팀장! 내가 무지하게 당신 아끼는 거 알지?
그 사랑의 크기만큼 만들어 봤어."
변 팀장은 넙대대한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그릇을
두 손으로 받들고는 잠시 망설이며 되묻는다.
"이, 이사님. 이거 나눠 마시면.. 안 될까요?"
조용히 변 팀장을 손짓하며 부르는 이사님.
변 팀장은 양은 그릇을 든 채로
그의 곁에 바짝 다가앉아 귀를 기울이는데..
(변 팀장.. 앞으로 말이야..
이런 잡스런 폭탄주 말다가 내 눈에 걸리면
다시는 '술상무' 타이틀 못 달게 할 거야.)
"무슨 소리야. 당연히 원샷이지! 으하하"
"네, 이, 이사님. 원샷하겠습니다."
변 팀장은 냉면 그릇에 담긴 걸쭉한 액체를 남김없이 들이켰고..
5분도 안 되어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더니..
흔적도 없이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셀 수 없이 많은 빈 맥주와 소주병들이 바닥에 쌓여가며,
곤드레만드레 술에 취한 사람들의 얼굴이 불콰해지고
혀가 꼬이면서 하나둘씩..
곤죽이 되어 널브러지는 가운데..
(정이수, 이 타이밍에서 시원한 바람 좀 쐴까?)
이수는 답답한 나머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긴 복도를 걸어
때마침 도착한 빈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긴다.
육중한 철제문이 닫히려는 찰나
웬 사내의 손이 틈을 비집어 들어오더니
문이 다시 열린다.
"이, 이사님!"
"우리 바람 좀 쐴까?"
***
잠시 후 호텔 앞에 펼쳐진 중문 색달 해변을
천천히 걷는 이수와 태오.
철썩이는 하얀 파도가 백사장에 나란히 새겨진
그들의 발자국을 천천히 지워가는데..
"보름달이 참 밝아."
"어머, 밤바다가 너무 밝다 했더니.."
검푸른 제주 바다에 비친 휘영청한 달빛이
그들의 달뜬 얼굴을 환히 밝힌다.
"근데.. 이사님..
오늘만 그 '흑기사'..
해 주시는 건가요?"
궁금증을 못 참겠다는 듯 넌지시 묻는 이수.
"당신이 원한다면..
'영원히' 흑기사 해 줄게.."
얼핏 배시시 웃는 그녀의 표정이 스쳐간 듯도 한데..
세찬 파도에 실려온 바닷바람이
그들의 애매한 사이를 못 견딘 것일까?
태오의 손길이 이수의 부드러운 손등을 스치고..
그 짧은 순간..
두 사람을 관통하는 과전압이
이성의 양 끝을 접지한
'퓨즈'를 끊어지게 하는데..
멀어지려 하는 그녀의 손목을 휘어잡듯 붙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는 태오.
순식간에 수평선에서 멀어진 이수는
그의 넓은 가슴 안에 폭 안겨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를 마주한다.
"당신 눈동자에도..
보름달이 떴네.
눈부시게 이쁘다. 정이수.."
그의 짙푸른 눈동자에 깊이 빠질 듯..
우뚝하면서도 매끈한 콧날에 베일 듯..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단숨에 삼켜질 듯.
이대로 모래사장에 풀썩 쓰러질 것만 같아.
위태로이 비틀대는 그들의 그림자가
하나로 겹쳐지고..
이수의 잘록한 허리를 감싸 안은
태오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 29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