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 가운으로 갈아입은 미령이 침대에 누웠다. 허공에 시선을 둔 채
의지와 상관없이 두 다리를 벌렸다. 천장에 달린 백열전등에 강렬한 불빛
이 들어왔다. 집도의가 수술도구를 챙기는 소리가 들렸다. 미령은 체념
한 듯 눈을 감았다. 고요함 속에서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들
려왔다.
아기의 울음소리는 아닐까....
겁이 나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마취의가 좁은 튜브로 약물을 넣었다. 정
맥을 타고 들어온 약물이 차갑게 사방으로 퍼졌다.
낙태수술은 짧고 간단했다. 얼마 눕지도 않은 것 같은데.... 희미하게 시
뻘건 핏덩어리가 보였다. 왈칵 눈물이 났지만 입술을 꾹 다물었다.
수술실을 나온 미령이 휴게실에 앉았다. 배를 움켜졌지만... 아직도 아기
가 있는 듯 싶었다.
"남비서님... 나 회장님 곁에 있을 자격 있어요...."
저너머 남비서는 고요했다.
미령이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미안하다... 내 아기...
다음 세상에서는 축복받는 생명이 되렴...
엄만 널 잃게 만든 죄값을 받을 거야...
참았던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원길이 서랍을 열어 약병을 찾았다. 날카로워진 원길이 거칠게 숨을 쉬었
다.
"어디 간거야.. 어디 간거지..."
때마침 들어온 남비서가 화들짝 놀래 쓰러진 원길을 일으켜 세웠다.
"약을 줘. 약을 달란 말야!!"
"회장님...."
"너가 치웠지.. 너가 없앴어!!"
미친 사람처럼 입가에 거품을 물었다.
"회장님.... 그 약은 아까 다 드셨잖아요...."
좀처럼 같지 않게 난폭해졌다.
"안돼... 안돼..."
감정 기복이 심해진 원길이 벌벌 떨고 있었다.
"회장님!!"
"미령이가 간단말야... 저 녀석한텐 간단 말야..."
헛것이 보이는 듯 문을 향해 손짓했다.
원길 눈동자에는 성현과 미령이 손을 맞잡고 씩 웃으며 고별 인사를 했
다.
약병을 챙긴 남비서가 비서실로 나와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황박사님. 여기 회장실입니다. 저 좀 만나셔야겠습니다."
황박사가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주여....
성수를 찍어 묵주기도를 올렸다.
"회장님이 왜 저렇게 되셨죠?"
황박사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남비서가 안주머니에서 약병을 내밀었다.
"무슨 약입니까?"
".........."
"황박사님!!"
성난 사람처럼 으르렁거렸다.
"내 다 얘기하리다..."
"하나라도 빼놓지 말고 얘기하세요..."
"이건 마약입니다....."
남비서가 휘둥그레져서 약병을 내려봤다.
"의학계에서는 정신분열증 치료제로도 사용하고 있지만 그 예가 적습니
다. 위험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회장님한테 투약했습니까?"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어디 그 뻔뻔한 이유를 들어보죠!"
"이 소라라는 비서가 있었죠?"
"이 비서?"
"그 아가씨가 내 아들 병역문제를 막아주었습니다."
"뭐라구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도 협박 받는 입장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은 용서를 빌고 죄를 씻고 싶습니다."
남비서가 약병을 쥐고 벌떡 일어났다.
"용서라구요? 황박사님에겐 용서도 사칩니다!!"
황박사는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