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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은 씨 방송 잘 봤어-”
“어제 우리 드라마 방영됐던 거, 최고 시청률이 30% 넘었더라. 둘이 토크쇼에서 예쁜 케미를 보여줘서 사람들이 많이 봐줬나 봐.”
“시은 씨 물 무서워하는 거 왜 그때 말 안 했어? 나 그거 보고 얼마나 미안했는데.”
“마윤미랑 있었던 일은 좀 괜찮아진 거지? 스태프들이 다들 걱정하더라….”
토크쇼가 방송되고 나서 촬영장에서도 다들 그 얘기뿐이었다. 확실한 건, 그 토크쇼 이후로 내 이미지도, 우리 드라마 이미지도 좋아졌다는 거였다. 사람들은 더 이상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웬일로 촬영장에 최 작가님까지 와계셨다.
“웬일이세요?”
“오늘 좀 중요한 신이 있어서 직접 보러왔어.”
작가님은 대본을 느릿하게 넘기며 말했다.
난 또. 어제 처음으로 ‘별의별’ 시청률이 30%가 넘어서 온 줄 알았네…….
최 작가 입장에서는 이게 당연한 거였을 테지만.
“축하해요, 어제 30퍼 넘었던데요?”
“너도 보긴 봤구나.”
“항상 모니터링 하잖아요. 그 버릇 아직도 여전하거든요.”
“참 한결같아 넌.”
“그러게요.”
“그나저나, 난 좀 서운했다?”
“뭐가요?”
“왜, 말 안 했어. 토크쇼 너 나온다고 해서 본방사수했는데.”
“아…….”
내가 물을 무서워하는 것에 대해 따지려는 모양이었다.
“못하겠으면 전화를 했으면 됐잖아!”
“배우가 돼서 어떻게 첫 신을 무서워서 못한다고 해요. 게다가 난 작가님 낙하산이었는데. 괜히 찍힐 일 있어요?”
“낙하산은 무슨. 너 아니었으면 이 드라마 나오지도 않았어. 캐스팅 못 해서 끙끙 앓거나 아님 거지 같은 캐스팅으로 망했겠지. 내 인생 최초로! 하여튼, 미련해가지고는…. 무서워서 못한다는데 누가 뭐라고 한다고.”
“그냥 나 스스로 좀 그랬어요. 게다가 유진하랑 같이 찍는데 고작 물 무섭다고 하면 선배로서 창피하잖아요. 아마추어도 아니고.”
“참 내, 그거 좀 무서워한다고 아마추어면, 거지 같은 연기력을 선보인 김유민은 어떻고?”
“봤구나?”
“내가 진짜 걔는 안 넣고 싶었는데…. 너 도대체 뺨을 몇 번이나 맞은 거야?”
“아 그거…….”
고의로 계속 실수했다는 사실을 작가님이 알면 난리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대충 얼버무렸다.
“아무리 카메오라도 그렇지, 걜 넣는 게 아니었어. 완벽한 내 드라마에 유일한 오점이라고.”
“오점까지야…….”
살벌한 최 작가의 말에 팔을 쓸어내렸다.
“그나저나, 그 중요한 신이라는 게 뭐길래, 촬영장까지 행차하셨어요?”
“엄청 중요하지. 내가 ‘별의별’을 쓴 이유는 이 한 장면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나 같으면 안 나올 텐데. 이제 곧 봄도 끝난다고요. 더운데 사서 고생이에요, 작가님은.”
“야, 이거 네 인생작이라니까?”
“그거야 모르죠. 요즘 잘 쓰는 작가들 많던데..”
“허, 어이없어. 박배우, 네가 모르는 모양인데, 나 이번에 21세기 최고의 작가로 뽑혔다고.”
“오, 정말로?”
“그래 정말. 내가 이 정도 클래스야, 알아?”
내가 꽤 놀라자 그제서야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내가 보기엔 그냥 귀여운 허세였지만.
“아, 누나 벌써 와 있었네요.”
“야, 유 배우, 나도 있거든?”
“아.. 안녕하세요, 최 작가님. 근데 무슨 일로 촬영장에 오셨어요?”
“흥, 나는 뭐 오면 안 되나?”
“아, 그런 게 아니라..!”
“됐어!”
작가님은 진하가 못마땅한 건지,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는 대뜸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진하는 약점이라도 잡힌 건지, 안절부절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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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작가님이 중요하다고 말한 신은 대본리딩 때 읽었던 부분이었다.
그때도 그렇게 눈물을 쏟았는데, 오늘이라고 잘 참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잘할 수 있어?”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잘할 수 있어. 그럴 거야.”
“......”
생각해보면 참 이상했다. 작가님은 내가 뭘 그렇게 잘했다고 날 그리도 예뻐하는 건지. 확신에 찬 말투만 해도 그랬다. 내가 못 할 거라고 벌벌 떨 정도는 아니었지만, 부담이 안 되는 장면도 아니니까.
사람들이 내 아픔을 알게 된 이상, 내 연기를 더 자세히 볼 테니.
“부담 갖지는 말고. 여기서 네가 NG를 백 번씩 내더라도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
“…백 번씩이나 낼 것 같지도 않은데요.”
“그냥, 그렇다는 거야. 여기서 너, 아무도 못 건든다고. 그리고 뭐, 지금으로써는 아무도 건들고 싶어 하지 않지만.”
저번에 부담됐다고 한 말이 내심 신경 쓰였나 보다. 하긴, 여기서 내가 좀 못한다고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 작가가 직접 보는 앞에서 대놓고 내게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날 미워하지 않았으니.
조금은 부족해도 그런 모습까지 사랑해줄 거라고, 유진하가 그랬었는데.
그리고 이제는 그 생각에 동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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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조금 긴장되는 기분은 크게 숨을 내쉬며 모두 빼냈다.
“다훈 오빠, 난 항상 생각하곤 했었어. 내 주변에 넘쳐나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언제쯤 떠나갈지.”
“..리나야,”
“혹시 전처럼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나가진 않을까? 또다시 혼자가 되진 않을까? 그런 생각에 빠져서 내가 그 오랜 시간을 배우로서 허비했던 거야.”
“......”
“..사람들이 언제 떠나갈지 두려움에 떨면서 지내고 싶진 않아, 더 이상. 오빠가 아무리 나한테 잘해줘도, 나는 쭉, 두려울지도 몰라.
아.. 죄송……,”
아, 또 눈물이 나왔다. 원래는 담담히 말하는 장면이라 실수한 거니 죄송하다 하려고 했다. 괜히 내 눈물이 주책이라며 생각하려 했다.
“어어, 좋았는데. 왜 끊었어, 박 배우. 아까 감정 괜찮았어. 좋은데.”
“네?”
“좋았다구. 억지로 울지 않으려고 해도 돼. 눈물이 나면 그냥 울어. 그건 그것대로 또 좋으니까.”
“아, 네...”
“누나, 괜찮아요?”
“박시은 괜찮은 거지?”
“시은 씨 괜찮은 거야?”
다들 내 눈물 하나에 이렇게 관심을 주었다. 토닥이고 애정 어린 눈길로 날 바라봐 주었다.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진 것 같다. 옛날 생각을 하면, 가끔 슬플 거 같긴 하지만, 그래도. 이젠 정말 괜찮다. 활짝 웃으며 그들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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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 장면은 내가 우는 걸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우는 게 더 괜찮다나. 오케이 사인을 받고서 남은 감정들을 건네받은 휴지에 풀어내었다.
“확실히…….”
“왜?”
“누난 연기를 참 잘해요.”
“뭘.. 새삼스럽게.”
“그죠. 5년 동안 뭘 하다 왔나 했더니만, 연기가 엄청 늘었네요. 원래도 잘했지만.”
“얼굴이 삭진 않았고?”
“무슨 소리에요. 9년 전이랑 똑같아요.”
새빨간 거짓말일 게 분명하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다. 기분이 좋았다.
“그래, 다행이다.”
“…오히려 미모에 물올랐는데요.”
“참나…. 이제 완전 대놓고 말하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좋아서 웃었다. 더 예뻐졌다고 하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짝짝. 역시 유 배우. 수작 부리는 것도 수준급이야. 감탄이 절로 나오는 걸?”
“아, 작가님..”
최 작가님은 아직도 진하에게 삐진 게 풀리지 않은 건지 입으로 박수 소리를 내며 비아냥거렸다.
“박 배우, 얘가 얼마나 간사한 앤지 네가 알아야 해.”
“착한데요, 뭘. 작가님도 그만해요. 저러다 쟤 울어요.”
“허……. 너도 이제 내 편 안 드는 거야? 정말 실망이야.”
“너무 못살게 굴지 마요. 왜 그렇게 맘에 안 들어 하는 거예요? 작가님이 진하 뽑은 거 아니에요?”
“그렇지.”
“자기가 뽑아놓고 못살게 구는 건 뭐람.”
“네가 그 소리를 꼭 들었어야 했는데. 쟤가 나한테 지다훈 역 달라고 했을 때 뭐라고 한 줄이나 알아?”
“뭐라고 했는데요.”
“아니 글쎄, 통화하는 당사자는 난데, 너 때문에 하겠다고 한 거라잖아!”
꽤 분했나 보다. 소리를 꽥 질렀다. 그렇게 크게 안 말해도 엄청 잘 들리는데.
“아, 그 얘기 다 들었어요.”
“좋겠다, 넌 인기 많아서!”
“그래도 전 작가님 때문에 한 거예요. 작가님 아니었으면 안 했을걸.”
“...그래?”
“그럼요. 작가님 아니었음 저 강제로 은퇴할 뻔했잖아요. 게임에서 하는 강퇴도 아니고.”
“......”
“고마워요. 절대 다시 못 일어설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한테 이런 행복 같은 거 없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만들어준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작가님 덕인 것 같아서요.”
“그, 그래. 너도 축하해. 한 계단씩 오르고 있는 거.”
작가님은 답지 않게 부끄러워하며 나의 재기를 응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