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검은 모자를 푹 눌러 쓴 남자 한 명이 나라의 집 앞을 자주 서성거린다. 그 때문이었다. 주환이 자꾸 어울리지 않게 나라의 곁을 지키던 이유는.
그는 나라가 낯선 남자의 행적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고 요 며칠 그녀의 시선을 제게로 돌려왔었다. 오늘 역시도 그래서 그녀와 함께 동행 하는 것이었다.
낯선 남자가 제 집 주변에서 얼쩡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고 그가 계속 그녀의 옆에 붙어있는 것이었다. 나라는 그런 주환의 손에 이끌려 정신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그런 와중에 주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참으로 멍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눈빛이 참으로 멍한 사람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등 뒤로 느껴지는 싸한 느낌에 나라가 뒤를 돌았다. 그 바람에 멈춰버린 그녀의 반동으로 주환도 발걸음을 멈추었다.
“뭡니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라가 곧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분명 누가 쫓아오는 것 같았는데…
나라가 금세 심각해진 표정을 지어보이자 주환이 걱정스레 그녀에게 물었다.
“왜요, 뭔데요? 말 해봐요”
“아… 아니에요”
무언가 본 것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 쎄한 느낌이 들었을 뿐, 그녀는 그것을 그저 지나가는 바람처럼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실제로 본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주환이 멍한 표정의 나라를 돌려세웠다.
“갑시다, 그럼”
한시가 급하다는 듯 주환이 그녀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그런 주환의 손에 이끌려 나라가 또 정신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얼마 후,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둘은 곧 버스에 올랐다.
나라보다 먼저 버스에 오른 주환이 버스 맨 뒷자리로 가 앉았다. 그러자 뒤늦게 버스에 오른 나라가 쭈뼛거리며 버스 중앙에 자리를 잡고 섰다.
주환이 그녀를 향해 눈빛을 쏘아보았지만 그녀는 그 눈빛이 오히려 부담스러웠는지 그의 눈을 쭈뼛거리며 피할 뿐이었다.
얼마 후, 나라가 버스 중앙에서 손잡이를 잡은 채로 꾸뻑거리며 졸고 있자 주환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세웠다.
“…신 나라씨,”
속삭이듯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그녀는 여전히 잠에 취한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밤새 그렇게 자고도 또 잠이 오나, 병원 약이 그렇게 독한가…
그가 몇 번을 더 소리 내어 그녀를 불러보았다. 소리를 내어 그녀를 불러도 보고 손짓도 해보았지만, 조는 데에 완벽하게 심취했는지 그녀는 그가 저를 부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핸드폰을 꺼내든 주환이 곧 나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좁은 버스 안에서 벨소리가 세차게 울려대자 화들짝 놀란 나라가 당황한 몸짓으로 얼른 전화를 받아들었다. 그러자 그가 그녀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 나라씨”
“네?”
멍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은 나라는 여전히 주환에게 시선을 건네지 않고 있었다.
“이 쪽”
“네?”
“이 쪽 보라고”
그제야 그의 말을 알아챘는지 나라가 그에게로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가 까딱까딱, 그녀에게 이리오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왜요?”
그녀가 그에게로 총총거리며 다가서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주환이 그녀의 팔을 와락 붙잡았다.
“헛!”
주환이 그녀를 거세게 끌어당기자 그녀가 위태롭게 그에게로 끌려왔다. 비틀거리던 그녀는 주환의 옆자리에 간신히 걸터앉고 나서야 그를 짜증스레 째려보았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
톡 쏘아붙이려는 그녀가 귀찮았는지 주환이 한 손을 들어 재빨리 그녀의 입을 가로막았다.
“읍…!”
“저기 서서 졸다가 넘어지면 얼굴 갈아엎을 지도 몰라”
주환의 까칠한 말투에 나라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도 한 편으로는 여자라고 얼굴 다칠까봐 걱정해주는 건가 싶어서 수줍은 표정을 지어보이는 그녀에게 주환이 말을 덧붙였다.
“지금보다 더 망가지면 내 눈 상하니까, 눈 보호”
아우!! 바란 내가 바보지!! 어쩐지 오늘따라 잘 챙겨준다 했다!
어딘가 변한 줄로만 알았던 주환이 여전히 까칠하게 그녀를 챙기자 그녀가 뚱한 표정으로 삐죽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뾰로통한 표정을 한 채로 그녀가 까무룩 잠들어버렸다.
몽롱하게 눈이 풀린 채로 입을 삐죽거리던 나라가 어느 새 까무룩 잠들어버려서는 옆에서 자꾸 정신없이 헤드뱅잉을 하고 있자 주환이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제 어깨에 얹었다.
이윽고 그가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곰살갑게 넘겨주었다.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는 그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다정함이 묻어났다.
*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점심시간이 되자 나라가 지친 기색으로 축 쳐진 몸을 이끌고 주환에게로 다가섰다.
“편집장님, 저 점심…”
“같이 가죠”
“…네?”
그녀가 대답할 기력도 없는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행색으로 그에게 대답했다.
“오늘부터 식사 같이 합시다”
…왜요?
왜라는 말을 할 힘조차 없는지 그녀가 그저 그를 힘없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이끌었다.
“잠깐만요… 편집장님…”
그녀가 의욕 없는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지만 그는 그녀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법 빠른 그의 발걸음을 쫓아 그녀가 총총거리며 뛰어가더니만 이내 젖 먹던 힘을 쥐어짜내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편집장니임…!”
그제야 그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조금 화난 듯한 목소리로 그에게 쏘아붙였다.
“걸음…! 너무 빨리 걸어요…! 저 지금 걸을 힘이 없어요, 천천히 좀 가주시면 안돼요?”
어느새 찡그려진 그녀의 미간을 보며 그가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 조절하겠습니다”
“네에…”
나라가 그에게 무력하게 대답했다.
둘은 이윽고 근처에 위치한 백반뷔페에 들어섰다. 그가 가게에 들어서며 그녀의 눈치를 살짝 보았지만, 그녀가 딱히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는 것 같았다.
둘은 곧 햇빛이 드는 자리를 피해 시원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그렇게 적막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둘은 너나 할 것 없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주위 다른 테이블은 다 시끌벅적한 데 비해서 두 사람의 테이블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둘은 적당량의 음식만 리필해서 먹고 치우기를 반복했고, 둘 사이의 정적 또한 꽤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그런 가운데에서 먼저 고요함을 깨버린 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주환이었다.
“먹을 만…해요?”
그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네, 여기 생각보다 맛있네요”
그런 그에게 그녀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배가 불러진 건지, 아니면 어느새 기분이 좋아진 건지, 싱그럽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를 따라서 그도 함께 웃었다. 그런데 그 순간,
“합석 좀 하겠습니다”
둘 사이에 방해꾼이 나타나버렸다. 둘의 뒤로 갑자기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나라의 옆으로 한 남성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 그의 행동에 나라가 적잖이 놀랐는지 동그래진 두 눈을 굴려 남자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이내 그가 누구인지, 알아버렸다.
“리… 린?”
놀랍게도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남성은 다름 아닌 선우 린이었다.
그 남자는 나라에게 싱긋거리며 미소를 한 번 건네고는 식탁에 제가 가져온 음식들을 내려놓았다.
“린아, 여기… 웬일이야?”
묘한 상황이 이상하다는 듯, 나라가 조심스레 묻자 린이 그녀에게 활짝 웃어보였다.
“나 밥 먹으러 왔는데, 여기 마침 우연히 네가 있더라고, 그래서 합석했지”
너무나도 간단명료한 그의 대답에 나라가 밥을 먹는 것도 잊어버린 채 벙찐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너 일행은? 없어? 혼자 왔어?”
“응, 내 일행 여기 있네, 신 나라 너,”
“그게 뭐야…”
“나 신경 쓰지 말고 밥 먹어, 밥”
그가 그녀에게 밥 먹는 시늉을 해보이더니만 곧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만 해도 나라는 린을 피하는 데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그녀는 어째서인지 그를 피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걱정하는 듯한 눈빛.
그 눈빛이 싫다는 듯 주환이 그녀의 밥숟가락에 반찬을 하나 올려주었다.
“……?”
그 손길에 나라가 의아스러운 눈으로 주환을 바라보았다.
“밥 먹을 땐 밥만 먹는 겁니다. 딴 데 한 눈 팔지 말고 밥 먹어요, 밥”
밥 먹기 싫어서 딴 짓하고 있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주환이 그녀의 관심을 식사로 다시 돌려놓았다.
그러자 그녀가 주환이 제 숟가락에 올려준 반찬을 멍하니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크게 입을 벌려 숟가락을 깨끗하게 비워냈다.
그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잘도 씹어 먹는 모습을 보고서야 주환도 그제야 안심한 듯 끝나지 않은 식사를 마저 이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그들의 식사가 끝났는지 또 한 번의 정적이 그들의 주위를 휘감았다. 이번에는 그 고요한 분위기를 제일 먼저 깨버린 사람이 다름 아닌 나라였다.
그녀는 린에게 애써 시선을 고정하고는 그에게 쭈뼛대며 말했다.
“린아, 어젠… 고마웠어”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말을 건네는 나라를 보며 린 또한 애써 웃어보였다.
“밥 먹다말고 고맙다는 뭐냐”
어느새 올라온 그의 손이 여느 때와 같이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머리칼을 헝클었다.
“우으으…”
입을 불퉁하게 내민 나라를 보며 린이 의아스럽다는 듯 물었다.
“왜 이렇게 입이 삐죽 나왔어?”
“여기저기 민폐만 끼치고 다니는 것 같아서, 불편해…”
어느새 울상이 된 나라의 볼을 린이 제 두 손으로 붙잡아 쭈욱 늘렸다.
“머하는 거야…(뭐하는 거야)”
“미안하면 좀 웃어라, 넌 울상 지으면 못 생겼어”
“우으으…”
린에게 볼이 저당 잡힌 채로 나라가 입을 비죽여보이자 린이 그녀의 머리칼을 다시 잔뜩 헝클었다.
“으이구”
“익! 하지마아! 머리 엉켜!”
나름 머리를 꾸미고 나왔는데 그것을 린이 전부 헝클어버릴까봐 그녀가 서둘러 그의 팔을 쳐냈다. 린은 그런 그녀에게 헤헤 웃어보였다.
“그래 차라리 화내는 게 낫다, 우는 거 보단”
그런 둘 사이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주환이 끼어들었다.
“밥 다 먹었으면 그만 가죠?”
언제부터인가 가자미같이 제 눈을 쭉 찢은 채로 둘의 행동이 못 마땅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던 그는 이제 더이상은 못 봐주겠다는 듯 미간까지 잔뜩 찡그려버렸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목소리가 이미 둘의 귓가에는 들리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못 들은 듯 여전히 린과 아옹다옹 대는 그녀에게 주환이 좀 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갑시다, 신 나라 씨”
그가 다시 한 번 그녀를 보채 보았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주환이 조금 화가 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는 린과 그녀의 사이를 떼어놓기라도 하듯, 그녀를 잡아끌었다.
“가자니까, 내 말이 안 들려?”
그가 조금 더 격양된 목소리로 그녀에게 쏘아붙이자 그의 손에 붙잡혀 끌려가던 그녀가 이내 바동거렸다.
“자, 잠깐만, 편집장님! 잠깐만요! 꺅!”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리며 나라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