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일단 인원수대로 술이랑 고기 주문할게요."
중간 어디쯤 미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은 회사 근처 번화가의 한 삼겹살집이었다. 바쁜 업무 속 작정하고 마실 생각이었는지 사업 팀의 분위기가 좋았다. 다만 눈치 없이 따라온 민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신나는 기운을 억누르는 느낌이었다.
“자 서란씨, 여기는 비슷한 시기에 같이 입점을 시작한 분이세요. 이참에 같은 업종에서 일하시는 분끼리 인사하면 좋을 것 같네요”
“아.. 네 안녕하세요.”
“네. 반갑습니다”
미소는 서우의 옆자리에서 서우가 어색하지 않게 다른 판매자들을 소개해 주고는 곧 팀원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서우의 반대쪽, 테이블의 오른쪽은 왼쪽과 다르게 좀 더 시끌벅적하고 붐볐다. 그동안 서우는 옆 사람들과 어색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자자. 이번 성과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일단 다 같이 짠 한번 할까요?”
어느새 정리를 마친 미소가 전체 건배를 제안했다. 서우는 자신도 모르게 잔을 조금 들어 올렸다. 올린 잔 옆으로 미동도 없이 앉아있는 민우가 보였다. 서우는 애써 그 모습을 무시했다.
“짠! 모두 축하드리고 앞으로도 더 열심히 해봅시다!!”
미소의 말과 함께 모두의 잔이 흩어졌다. 서우는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려고 했지만 애당초 그런 쪽에 소질이 없었던 탓인지 대화는 금세 끊어지고 말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서우는 답답함을 느껴 가게 2층의 야외층에 잠시 올라갔다. 바람을 좀 쐬고 싶었다.
서우의 눈에 화려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네온사인이 보였다. 언제나 조용한 곳에 있었던 서우지만 이렇게 떠들썩한 곳에서 혼자 떨어져 있으니 느낌이 묘했다. 그리고 왠지 곧 민우가 자기를 뒤 따올 것 같다는 생각에 긴장되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서우는 민우가 자신을 항상 지켜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래층은 엄청 시끄러운데 위층은 조용해서 맘에 드네”
어느새 다가온 민우가 서우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의 말싸움으로 인한 감정은 이젠 많이 수그러진 분위기였다. 서우는 다가온 민우를 쳐다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네요.”
“.... 아깐 확실히 좋지 않은 말투로 얘기한 것 같아서 사과할게"
서우는 민우가 평소 알고 있는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 맘이 놓였다. 하지만 민우와의 대화는 여전히 서우에게 복잡한 감정을 남겼다.
“나는….”
아까 민우가 하려는 말이 뭐였을까? 서우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 네가 나와 어떤 사이인지 헷갈려”
“…어떤 사이라뇨?”
갑작스러운 질문에 서우는 빚으로 만나는 사이니 진지하지 않은 사이라고 말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차가워졌다.
“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확실히 알고 있는 거 맞아?”
“그건 확실히 잘 알고 있죠”
서우는 이런 상황에서 설렘을 느꼈던 자신이 서글퍼졌다. 민우는 꼭 주제 파악을 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좀 더 확실히 해줬으면 좋겠어”
“어떤 걸요?”
“태도를”
그 순간, 서우가 가진 달콤했던 기억이 와장창 부서지는 듯했다. 가슴 한쪽이 비참함으로 저렸다. 서우는 밀려오는 감정에 어지러움을 느꼈다. 자신이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서우는 민우를 좋아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말을 끝마친 서우는 민우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쓰라린 감정으로 가득 찬 속을 좀 더 쓰라린 것으로 채워버리고만 싶었다. 그렇게 오늘 이 밤을 보내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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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씨 괜찮으세요??”
흔들리는 시야에 미소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보였다. 회식이 끝나고 어느새 어두워진 거리에는 사람이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지금 시각은 새벽 1시. 길었던 회식이 막 끝난 참이었다.
“아아. 걱정 마세요.”
말을 마친 서우는 손사래를 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신은 멀쩡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기지 못할 술을 마셔서 몸이 맘대로 제어가 되지 않았다. 서우는 술을 마신 경험이 얼마 없어서 자기가 얼마나 취한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조금만 쉬고 싶었다.
“흠. 그럼 일단 제가 집까지 바래다…”
“미소님은 먼저 퇴근해요. 제가 서란 님 집 알고 있으니 바래다 줄게요"
회식 내내 굳은 얼굴로 앉아있던 민우가 갑자기 미소와 서우사이를 막아섰다. 미소는 이런 일에 잘나서지 않는 민우가 갑자기 적극적으로 된 것에 의문을 느꼈지만 또 챙길 사람이 많았기에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넵 알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저는 이만 저쪽에 뻗은 사람들과 함께 귀가하겠습니다. 쉬세요”
말을 마친 미소는 빠르게 사라졌다. 어두운 거리에는 어느새 주저앉아있는 서우와 그런 서우를 내려다보는 민우만 남겨졌다.
“하아”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와중, 민우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서우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분명 태도를 확실히 하라고 했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전 괜찮아요. 알아서 갈 수 있어요”
서우는 민우에게 보란 듯이 일어섰다. 그리고 불빛이 보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하지만 세상이 점점 기울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넘어질 것 같다고 느꼈을 때, 갑자기 앞쪽에서 푹신한 감촉과 향기가 느껴졌다. 민우는 어느새 서우의 앞에서 서우를 잡아주고 있었다.
서우는 몽롱함을 느끼며 잠시 동안 민우의 품에 안겨있었다. 말이 없는 민우의 품은 따뜻하고 다정했다. 이 품만 알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갑자기 슬픔이 밀려왔다.
“ 흑… 흑흑…”
갑자기 제어할 수 없는 눈물이 밀려왔다. 술은 감정을 두 배로 강하게 한다더니 진짜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서우는 서글프게 울었다. 민우는 조용히 서우를 안아주고 있었다. 잠시 안겨있던 서우는 서글픔이 지나가자 갑자기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야!!!!!!!!!!!!!!!!”
갑자기 서우가 소리를 지르며 민우를 노려보았다. 흐릿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민우는 당황한 듯했다. 서우는 이참에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 많으면 다냐!?!? 어?!?! 내가 그렇게 우스워?!?!”
소리치는 서우 옆으로 몇몇의 사람이 웃으며 지나갔다. 하지만 서우는 지금 그런 것을 느낄 세가 없었다. 지금 서우는 자신이 한없이 불쌍했다.
“꼬실 때는 엄청 잘해주더니 갑자기 선 긋는 건 뭔데!??!?! 네가 그러고도 남자야?!?!?”
첫 번째 얘기까지는 사람들이 웃고 지나갔지만 두 번째 서우의 말에 곧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민우는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나는.. 그.. 잠깐이었지만 엄청 좋았었다고!!!! 진짜로 좋아했다고!!!”
‘어? 저번에도 이런 고백한 거 같은데’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과거의 기억에 서우의 정신이 잠깐 돌아왔다. 하지만 서우는 곧 좋았었던 추억과 지금의 모습이 얼마나 다른지를 깨달아 버렸다. 또 서러움이 밀려왔다.
“으아아아아 흑흑흑….”
서우는 바닥에 앉아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주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민우가 황급히 달려와 서우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서우는 쉽게 당하지 않았다.
확실히 오늘 밤 서우는 진상이자 주정뱅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