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릴리는 그들을 포대 나르듯 한 팔에 하나씩 들었다. 그는 안전해 보이는 아무 방에나 그들을 던져놓은 다음 경고했다.
“얌전히 있어, 이 새끼 고양이들아.”
아니, 이런 개가......?
공윤이 항의할 새도 없이 릴리는 문을 닫고 가버렸다. 도와줬으니까 참는다, 망할 늑대 같으니라고.
공윤은 발목을 주무르며 서리를 돌아봤다. 서리는 언제 찾았는지 이불을 둘둘 감고 방 한구석에 공벌레처럼 찌그러져 있었다. 이불 더미 사이로 금빛 고수머리만 보였다.
아, 화도 못 내겠네.
“이리 와.”
이불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까 토한 거 묻었잖아. 닦아줄게.”
공윤이 무릎걸음으로 다가가자 이불이 슬슬 물러났다. 서리야, 너까지 나랑 밀당하지마......
“이제 누나 보기 싫어?”
이불까지 움찔거릴 정도로 서리는 당황한 것 같았다. 그 애는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웅크려서 안절부절못했다.
“아...... 아니이......”
너무 어리고 겁에 질려 말라붙은 목소리였다. 공윤은 살짝 다가가 이불을 조심스레 헤쳤다. 조그만 얼굴 위로 울렁거리는 초록색 눈이 드러났다.
진짜 오랜만에 본다. 이렇게 깔끔한 건 처음 보고.
공윤은 문득 감탄했다. 너...... 크면 굉장해지겠구나.
얼굴에 싹수가 보여.
“나, 나...... 또 다치게 해버려서......”
아, 발목. 이러다 애가 울겠다 싶어서 공윤은 애써 웃었다.
“아냐, 서리야. 누나 하나도 안 아파.”
사실은 아파 죽겠다, 젠장...... 공윤은 시큰대는 발목을 무시하려고 입 안쪽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것은 치명적인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거...... 거짓말.”
서리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히익. 공윤은 그게 눈가로 넘치기 전에 재빨리 끌어안았다.
서리는 공윤의 품 안에서 웅얼거렸다.
“보면, 화낼까봐, 다시는...... 아, 안 본다고 할까봐, 흑, 숨어 있었는데...... 왜 따라와, 왜, 다쳐...... 흐으......”
아이들의 사고란 종잡기가 힘들다. 공윤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토닥이기만 했다.
그래그래, 아이고 서럽다.
서리는 이제 바싹 달라붙어 미주알고주알 뭐라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대개는 알아듣기 힘들었다. 공윤은 그냥 안아주는 걸로 말을 대신했다. 중간에 릴리에 대한 욕이 들린 것 같았지만 넘어갔다.
더 욕하라고 말할 순 없잖아.
서리가 다소 진정되자 공윤은 릴리에게 짐짝처럼 들려오기 전에 챙겨뒀던 초콜릿을 입에 넣어줬다.
서리는 눈물 맺힌 눈으로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초콜릿을 오물거렸다.
공윤은 이불자락으로 서리의 턱과 볼에 묻은 토사물의 흔적을 닦아냈다. 그것은 대개 피였기 때문에 좀 섬뜩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서리야, 키론이 뭐라고 말했니?”
“어...... 자기랑...... 여기서 살지 않겠냐고.”
“넌 어쩌고 싶은데?”
“누나랑.”
어머나. 공윤은 놀라서 입을 벌렸다. 지금 날 누나라고 부른 거야?
그러고 보니 못 본새 어휘력이 많이 늘었다. 전엔 그냥 ‘몸으로 말해요’ 수준이었는데.
“누나랑 있을래.”
어쩌면 공윤은 그때 좀 더 따졌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 애의 상처에 안쓰러워하고 그 애의 극복에 대견해하기보다, 상황을 재어보고 냉정하게 판단했어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는 몰랐기 때문에, 그토록 쉽게.
“그래.”
공윤은 서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북슬북슬했다. 온기 없는 고양이를 만지는 것 같았다.
서리는 가릉거리며 눈꺼풀을 내렸다.
“있잖아, 피 많이 좋아하니?”
“안 먹으면 죽어...... 그리고 맛있어.”
확실히 필수 영양소라고 하니까, 좋든 싫든 먹어야 살지. 공윤은 문득 서리를 돌아봤다.
“그럼 내......”
쾅.
엄마, 깜짝이야! 공윤과 서리는 낚인 물고기처럼 파닥 튀어 올랐다. 키론과 릴리가 서 있었다.
뭘 하다 온 건지 키론의 셔츠는 원색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마치 발바닥에 온통 물감이 묻은 소형 동물에게 짓밟힌 것 같았다.
공윤은 반사적으로 발목을 숨기려고 했다가 아파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어딜 가나 했더니 키론을 부르러 간 모양이었다.
야, 이 고자질쟁이야. 공윤이 릴리에게 배신감 어린 시선을 쏘아 보냈지만, 그는 눈썹을 까딱거리는 것만으로 무시했다.
“이게, 대체......”
키론은 눈을 감았다 떴다. 공윤은 소심하게 주장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제가 공윤 씨를 어떻게 봤는데요.”
키론이 평온하게 대꾸했다. 글쎄요, ‘얠 대체 어쩌면 좋을까’ 내지는 ‘얠 어떻게 해야 안전하게 잘 둘 수 있을까’ 정도?
“일을 해결하는 방법이 너무 거친 것 같지 않나요?”
이미 다 알고 있나보다. 그는 공윤의 발목에 시선을 줬다. 그녀의 발목은 시퍼렇게 물들어 본래보다 두 배 정도 부어있었다. 공윤은 애써 웃었다.
당신만 하겠어요.
“청출어람을 몸소 실천하는 중이죠.”
키론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더니 공윤의 발목을 살펴봤다. 키론이 손을 뻗어 그녀의 발목을 살짝 만졌다.
“아.”
공윤은 통증에 숨을 들이켰다. 키론은 발목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미안해요. 잠깐만 참아요.”
그의 손가락이 발목을 감아쥐었다.
[rétablir.]
키론이 중얼거렸다. 전에 들었던 것과 비슷한 발음이었다. 그때처럼 격앙되어 있지 않아서 그런지, 이번에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지금은 감정을 감추기 쉬운 모양이었다.
한순간 소독제를 뿌린 것처럼 차가운 액체가 발목으로 울컥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괜찮아졌다.
그러니까...... 아프지 않았다. 발목을 보자 원래대로 멀쩡해져 있었다.
공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키론을 보자, 그는 생긋 웃었다.
“이젠 조심히 다녀요.”
그 사이에 제발, 이라는 단어가 생략된 것 같았다. 공윤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