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는 눈을 떴다. 언제부터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잘 잔 것 같은, 그런 좋은 기분에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살며시 웃었다.
방문을 열고 나온 선우는 식탁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엄마를 보았다. 선우의 엄마는 선우를 바라보며 늘 그렇듯, 따뜻한 미소만 지었다. 선우는 그런 엄마를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지금이 아침은 아니죠?”
늘 어색해하며, 불편해하며, 서둘러 말해버리는 선우가 엄마를 향해 웃으며, 자연스럽게 말하자 선우의 엄마는 순간 당황해,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엄마, 제가 그렇게나 잤어요?”
선우는 엄마의 표정에 멋쩍어하며 또 다시 웃었다. 엄마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선우는 눈치 채지 못했다. 서둘러 마음을 진정시킨 선우 엄마는 선우에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들, 배고프지. 지금은 오후가 지났고, 저녁은 아직 안 온 시간이야.”
선우는 자연스럽게, 엄마 앞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
“배는 고프진 않은데, 뭐가 먹고 싶기는 해요. 엄마, 뭐 먹을 것 좀 주세요.”
선우 엄마는 나오려는 눈물을 꾹꾹 눌러 참으며, 선우를 보고 말했다.
“우리 아들... 뭐가 먹고 싶어?”
“코코아 있어요? 아빠가 늘 먹던 거요. 저도 그걸로 주세요.”
선우는 그렇게, 모든 게, 자연스럽게 말했다. 다 잊은 줄 알았던, 선우의 기억들은 그렇게 다시 선우에게 나타났다. 엄마는 그런 선우가 반가워서, 고마워서, 흐를 수밖에 없는 눈물에 서둘러 일어나 뒤돌아섰다.
“선우야, 금방 해줄게. 기다려.”
선우는 그렇게 아주 예전을 기억해줬다. 선우 엄마는 이 모든 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선우가 행복해 보여서, 그래서 자신도 더 행복했다. 선우가 온 뒤 제대로 느끼게 된 행복이었다.
“엄마, 밖에 눈이 와요.”
선우는 창밖에 내리는 눈에 신이 나서 말했다. 선우 엄마는 선우의 말에 뒤돌아 창밖을 봤다. 이곳에서 처음 본 눈이었다. 아마 이 모든 것도 선우의 행복한 기억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다행이었다.
선우는 이곳에서 드디어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선우가 달라졌는지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아마 선우는 서서히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선우에게 전해진 위로가 선우를 이렇게 이끌었음을... 그것 말고는 설명할 수 없었다.
선우는 엄마가 타준 코코아를 마시고 엄마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하늘에서 아직도 눈이 날리고 있었다. 선우는 손을 내밀어 내리는 눈을 받았다. 손 위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눈을 바라봤다. 자신의 손위에서 금방 녹아버리는 눈에, 선우는 쌓여 있는 눈으로 눈길을 줬다.
쌓여 있는 눈을 뭉쳤다. 기분 좋은 차가움에 선우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그 눈을 엄마에게도 전했다.
“신기하게도, 오랜만에 눈을 보게 되는구나.”
선우 엄마는 이 모든 게 선우 덕분임을 알았다. 선우는 엄마의 말에 웃으며, 손으로는 눈을 계속 뭉쳤다. 그리고는 작은 눈사람을 만들었다.
“엄마, 이 눈사람 잘 만들어졌죠?”
엄마는 선우의 지금 모습에서, 아주 예전의 그 어렸던 선우를 떠올렸다. 선우는 그때 참 즐거워했었다. 선우의 행복한 기억들에 이 장면이 있다는 사실에, 선우 엄마는 말없이 선우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때의 그 어린 선우가 다시 보여서, 그리고 이렇게 선우가 잘 자라줘서 너무도 감사했다.
선우 엄마는 선우가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늘 매순간 바랐던 것이지만, 눈으로 보게 된 선우의 모습에 가슴이 벅찼다.
‘선우야, 고마워. 그리고 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시 아침이 온 선우의 세계는 고요했다. 선우는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그 아침을 맞았다. 그리고 선우는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계시는 부모님을 위해 선우는 뒤돌아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선우 부모님도 손을 흔들었다. 부모님의 눈에서는 반짝이는 무언가가 가득했다.
선우는 문을 열었다.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을 선우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앞에서 은호가 걸어오고 있었다. 목도리는 손에 들고, 볼은 붉어진 상태로 살짝 빠른 걸음으로 선우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공원 앞 자판기 앞에 섰다. 은호는 살짝 웃으며 동전을 넣었다.
‘너, 밀크커피 누르면 안 된다.’
선우는 은호의 행동을 보며 혼자 생각했다. 그때 은호가 갑자기 뒤돌아섰다.
“한모금만... 알지?”
선우는 은호의 말과 표정에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신기하게도 익숙했다.
은호는 밀크커피와 코코아를 뽑아 들고 나무 의자에 앉았다. 나란히 내려놓은 밀크커피와 코코아에 시선을 한번 주고는, 은호는 한참을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선우는 은호 옆, 밀크커피 잔 옆에 앉았다. 아무 표시도 나지 않을 선우였지만, 선우는 그렇게 조용히 함께 앉아 있었다.
“안녕... 아빠...”
선우는 은호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은호는 당연한 듯, 선우를 향해 바라보았다. 분명 선우가 보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아빠. 그냥 아빠가 옆에 있다고 치고...”
그러고는 은호는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다시 말할게. 아빠가 있을 것 같으니까. 아빠... 너무 보고 싶어.”
은호는 눈에서 나오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입은 웃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나, 안 울려고 하는데... 아빠를 부르니까 눈물이 나.”
선우는 은호의 옆에서 은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아빠. 고마워. 이 좋은 곳 알려줘서. 그리고 이 맛있는 거 가르쳐줘서.”
은호는 어느새 밀크커피를 들고는 한 모금 마셨다.
“또 뭐라 할 거지? 나 이제, 고등학생이다.”
은호는 아빠와의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그때가 꽤 지났음을 실감했다.
“아빠 덕분에 좋은 기억들이 있어서, 나 다행인거 같아.”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다시는 갈 수 없는 그때라서, 그렇게 눈물이 났다.
“그리고 아빠... 미안해. 그 동안 잘 지내지 못해서 미안해. 아빠 실망했지?”
은호는 지난 3년의 시간들이 다시 떠올라 아파왔다.
“그때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뭘 해야 될지도 몰랐고, 하기도 싫었어.”
은호는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더 울지 않으려고, 웃어보려고 했다.
“아빠, 이젠 안 그럴게. 진짜야. 믿어줘. 아빠 딸, 이제 잘 지내볼게.”
은호는 꾹꾹 눌러 말했다. 목이 따끔거릴 만큼 참아내고 있었다. 다시 은호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런 은호를 선우는 바라보았다. 은호의 아픔이 느껴졌지만, 신기하게도 그 아픔 속에 있는 희망이 선우에게 전해졌다.
“아빠, 이거 봐라.”
마음을 가라앉힌 은호는 다시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자신의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빨간 줄에 동그란 새 시계가 반짝이며 햇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이제야 이걸 차. 지금까지 못했어. 아빠가 두고 갔는데, 아빠랑 같이 못 열어본 게 너무 싫어서. 그런데, 이제 이거 차려고.”
은호는 단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눈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았지만, 은호는 많이 아쉬워했다.
“그리고 나...”
한참을 뜸을 들인 은호는 결심이 선 듯 또 다시 허공에 대고 말했다. 선우는 그 모든 것을 은호 몰래 보고 있을 뿐이었다.
“엄마도 만났어. 처음엔 어색했는데, 나 이제 엄마도 있다.”
은호는 다시 울고 말았다. 이 좋은 소식을 이렇게 밖에 전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그러니까, 나 더 이상 걱정하지마. 나 잘 지낼게. 공부도 열심히 할게. 그러니까 아빠도...”
은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아빠도 거기서 할아버지, 할머니랑 행복했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은호는 진심으로 아빠의 행복을 바랐다. 아빠도 많이 힘들었으니까, 아팠으니까, 그곳에서는 이제 더는 안 그랬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바랐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은호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다시 웃음을 짓고는 자판기에서 뽑은 두 잔을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에 더 이상 코코아컵 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럴 수 있게 되었다. 습관처럼 손등을 입에 가져다 댔지만, 코코아는 손등에 묻어나지 않았다. 은호도 신기했고, 서운할 만큼 아쉬웠다.
은호는 모든 절차를 끝낸 듯,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는 편하게 이곳에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빠가 보고 싶으면, 이곳에 오기로 혼자 마음을 정했다.
“아빠. 또 올게. 안녕.”
선우는 은호의 행동에 웃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느꼈다. 신기하게도 슬프지 않았다. 그냥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안녕, 은호야. 내 딸, 우리 은호.’
선우는 웃으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