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3)
입구를 막고 선 자들 중 활 등의 원거리 무기를 손에 든 자는 없었다.
효령이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한 명씩 쓰러져 나갔다.
‘월도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효령은 집 안에 놓인 자신의 전용 장검 ‘월도’를 떠올리며 아쉬워했지만, 어차피 월도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지금 효령의 적수가 될 자는 없었다.
긋고, 찌르고, 피하고, 다시 긋는다.
효령이 상대하고 있는 고대인들의 육체는 어지간한 현대 무술인들의 육체보다도 골격과 근육 자체가 발달되어 있긴 하지만, 어차피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효령이 빙의한 파투 역시 고대인이며, 그 중에서도 파투는 본래 뛰어난 무사였다.
거기에 효령의 검술이 더해진 상태로 돌진하는 파투, 즉, 효령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동료들이 지원을 할 필요도 없이, 효령 혼자 열 서넛에 이르는 자들을 모두 쓰러뜨리는데 불과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전부 죽인 거야?”
효령과 함께 한 동료들 중 한 명이 질렸다는 투로 말하였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그의 말에 효령이 냉소하며 말하였다.
“그래. 이제부터는 살짝 쓰러뜨리기만 할게. 금방 다시 일어나서 동료를 불러모을 수 있도록. 물론 네가 우리의 맨 뒤를 맡아 주겠지?”
“……”
그렇게 상대의 입을 닥치게 만든 효령이 검에 묻은 피를 옷에 문질러 닦았다.
그 때 효령의 시야가 조금 어두워졌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효령은 경험을 통하여 익히 알고 있다.
이번 퀘스트에 주어진 시간의 대략 10% 정도를 사용하였다는 뜻이다.
시간을 더 소모할수록 점점 시야가 어두워질 것이다.
퀘스트에 실패하면, 글자에 담긴 힘은 그냥 허공으로 흩어져 버린다.
일단이 몇 달에 걸쳐 중국을 쏘다니며 애써 찾아온 글자가 헛수고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제기랄, 제한시간 한 번 오지게 짧군, 이번 퀘스트는.
“가자!”
효령은 그렇게 외치면서 문 안으로 내달렸다.
일행이 효령의 뒤를 따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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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안의 광경은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기 전 현대에 본 광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푸른 불이 붙어 있는 막대기들이 곳곳에 세워진 상태로 빛나, 현대에 효령이 설치한 전등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꽤 많은 인원들이 오가고 있었다.
탑 안에서 일하고, 생활하는 이들이다.
탑의 건설을 지원하거나 직접 건설작업에 참여하는 자들도 상당수 눈에 뜨였다.
의복과 건물의 양식이 다르다는 것만 제외하면 현대의 고층빌딩 안 사람들이 만드는 일상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않았을 것이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현재는 일상의 풍경이라고 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피묻은 검을 들고 탑의 중심부를 향하여 달려가는 효령 일행을 보며, 고대인들은 급히 일행으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으로 도망쳐 몸을 피하였다.
그래, 평소에도 파투와 이 일행들은 건축가의 지시에 의해서 집단적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지.
탑의 건설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효령은 달려가며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제까지 탑 안으로 들어오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파투와 그 동료들이 지금 흉흉한 기세로 피묻은 검을 들고 탑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어지간히 지능이 있는 자라면, 이것은 분명히 그들이 탑 바깥에 있는 경비들을 상대로 모종의 사달을 낸 것이리라는 점을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파투 일행으로부터 멀찍이 몸을 피하는 것이 안전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것 역시 곧바로 떠올릴 수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탑 안의 인원들은 마치 홍해의 기적 고대 버전을 몸소 보여주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달려가는 효령 일행을 피하여 허둥지둥 좌우로 비키기에 바빴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 김에 고대의 모습들을 하나라도 더 눈에 담아 두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을 일일이 살필 시간이 없다.
제한시간 안에 건축가의 방 앞까지 도달하는 것이 이번 퀘스트의 목표다.
그 뒤는 효령이 아닌 파투가 알아서 할 것이다.
파투가 건축가를 죽이고, 건축가는 죽으면서 저주를 걸게 되겠지.
기록에 이미 적혀 있는 대로.
한참을 달리던 효령 일행이 마침내 멈춰 선 곳은 거대한 기계장치 앞이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기계 장치의 신.
효령은 그 말이 생각이 났다.
기계장치는 마치 현대의 엘리베이터와 같은 구조였다.
다만 전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푸른 불에 의한 마법으로 움직인다는 점이 현대의 엘리베이터와 차이가 있었지만, 기계장치의 정교함은 현대의 엘리베이터에 버금갈 정도였다.
호군 영감(주 : 장영실)에게 보여 주고 싶은 모습인 걸.
이게 왜 현대의 유적에서는 없어져 버린 거지?
“이걸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파투?”
동료의 물음에 효령은 다시 정신을 집중하고 기계를 살폈다.
다른 동료들과 달리 파투는 이 기계장치를 사용하여 여러 층들을 오르내린 적이 여러 번 있다.
하지만 그것은 파투가 탑의 건설을 반대하다가 건축가로부터 외면당하고 탑에서 쫓겨나기 전, 그러니까 꽤 오랜 전의 일이었기에, 파투의 머릿속에서 이 장치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지 않았다.
효령은 시야가 아까보다 조금 더 어두워진 것을 느꼈다.
시간이 또 흘렀군.
효령은 약간의 초조함을 느꼈다.
제한시간 안에 계단으로 건축가가 있는 층까지 뛰어 올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이 장치를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망할 놈의 기억! 좀 생각나라!”
효령이 외치듯이 말하면서 기계장치의 이 곳 저 곳을 만져보고 있을 때, 동료가 급하게 외쳤다.
“근위대야!”
효령은 인상을 찌푸리며 기계로부터 눈을 떼고 몸을 돌렸다.
기계 장치를 살펴보느라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 한쪽에서 무장한 일단의 무리가 무기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열 명이 넘는 수였다.
단지 입구에 있던 자들과의 사소한 차이점이라면,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무기들은 모두 푸른 빛을 두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사소한 차이는, 이번에는 효령이 혼자 다 처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과, 따라서 효령의 일행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건축가의 근위대.
고대인 전사들 중 최정예인 자들이다.
그들은 그저 검을 들고 대오를 지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지만, 그들이 내뿜는 위압감이 효령 일행에게 ‘멈추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전사라 해도, 건축가의 근위대 전원을 상대로 압박감을 느끼지 않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 위압감은 근위대원들의 실력 자체뿐만 아니라, 건축가가 근위대원들의 정신에 미치는 강력한 지배력과, 그로 인한 근위대원들의 사기 및 전의의 강력한 상승효과 때문이기도 하다.
현대로 치자면 건축가의 ‘버퍼’ 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건축가의 근위대원들은 고대인들에게 건축가만큼이나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 위압감에 눌려서 얼어붙었을지도 모른다.
효령이 아니라 파투 본인이었다면.
그러나, 효령은 한 나라의 왕자였고, 600년을 살아왔으며, 조선제일검이었다.
더욱이, 본체가 아닌 분신이기에 설사 만에 하나 이 자리에서 패해 죽는다 해도 본체는 여전히 살아 있다.
심지어 이야기 속 본체 자체가 죽는다 해도 단지 퀘스트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현실의 효령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다.
일행 역시 이야기 속의 존재일 뿐이니, 싸우다 죽는다 해서 실제의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효령은 근위대원들이 다가오는 모습을 마주하고 서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하고 같이 온 이 놈들은 다르지.’
효령은 일행들을 재빨리 다시 확인했다.
총 여섯.
파투의 기억에 의하면 이 중 실력이 있는 자는 넷. 다른 둘은 그저 그런 수준.
후자 쪽은 근위대원을 상대로 아마 한두 합도 못 버티고 썰릴 가능성이 크다.
전자라 해도, 근위대원 열 몇 명을 상대로 살아남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효령 본인의 몸만 건사하는데 집중한다면,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행이 다 죽어버리면 퀘스트 달성이 곤란해진다.
효령이 기계장치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기계장치에 다른 방해꾼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지켜줄 인원이 최소 세 명은 살아남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