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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예, 그럼…….”
“…….”
“…….”
“저, 술을…….”
“아, 예.”
“……마마, 기본적으로 술은 좌측부터 돌린다고 보시면 되옵니다. 그리고 항시 두 손을 모두 사용하여 술을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아, 그렇군요.”
그러곤 다시,
“…….”
“…….”
“뭐라도 말을…….”
“아, 제가 먼저 해야 하는 건가요?”
“……사실 꼭 그렇지는 않으나, 혹 말수가 적은 객들이 오신 경우에는 기생들이 대화를 주도해 나갈 줄도 알아야 합니다.”
“아하, 그럼 지금은 말수 없는 양반 역할을 하고 계신건가요?”
“……그…… 예, 일단은…….”
“음, 그럼 무슨 주제로 대화를 시도해야 하는 거죠?”
“객들의 성향이 저마다 다르기에 정답이 따로 있지는 않으나 대개는…… 그냥…… 그, 근황 같은?”
“근황이요?”
“예, 그냥 근황을 묻는 식입니다. 이를테면…… 그러니까, 어…… 요즘 왜 이리 걸음이 뜸하시냐…… 뭐 이런 식으로. 흠, 흠.”
“아하? 알겠어요. 그럼…….”
잠시간 호흡을 가다듬더니,
“요즘…… 왜 이리 걸음이 뜸하십니까, 나으리?”
교태어린 목소리로 아양을 떠는 것이었다.
홍월은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우와, 세자마마…… 이 정도면 타고 난 거 아냐?’
수줍은 듯 끈적끈적한 비음에, 사르르 사그라지는 엷은 웃음소리까지…… 귀로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솔직히 조금,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반면,
“……예? 아, 그…… 그러면 대충 바빴다는 이유를 댈 것이옵니다.”
방주란 양반은 그저 우물우물 쓸데없는 설명만 어물쩍 늘어놓는 게 아닌가. 역할극은커녕, 흥만 깨는 훼방꾼에 다름이 없었다.
“흠…… 뭐, 그렇겠지요.”
“그래도 자, 자네가 보고 싶어 다시 찾아왔다느니…… 그런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세자는 굳이 알려줄 필요 없다는 듯, 여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장 입을 열었다.
“제가 그리 생각나시었습니까, 나으리? 그럼 더 일찍 찾아오시지 않고…….”
홍월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시는구나!’
그러나 이번에도,
“흠, 흠…… 그럼 그냥 오늘 하루 잘 놀아보자……는 식으로 대답을 하면서 술을 가져오라 이를 것입니다. 대개 이 송화주를 시킬 터인데, 이는 저희 기방에서 가장 잘 나가는…….”
듣자듣자 하니 아주 가관,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아, 진짜 답답하네!’
역할극을 하라 했더니 뭐? 송화주니 기방이니 뭐가 어쩌고 저째? 듣는 것만도 열불이 터질 지경인데 옆에서 지켜보기까지 했다면 당장이라도 갑갑함에 졸도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이어 몇 합이 더 오갔으나 역할극은 영 진척이 되질 않았다.
‘뭐, 객들과 연령대가 비슷하니 좀 더 잘 할 수 있지 않겠냐고?’
“……개뿔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홍월이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저쪽에서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하여간 답답해, 답답하다고!’
여옥은 정말이지 저 자리에 자신이 왜 앉아있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기생과 객이 아닌 여전히 세자와 방주인채로 앉아있었으며, 이를 답답해하고 있는 세자의 마음조차 짐작하지 못하고 있을 공산이 컸다.
‘이건…… 이건 그냥 시간낭비일 뿐이야.’
홍월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럴 거면 차라리 어제처럼 기녀의 ‘기본’에 대해 몇 마디 더 일러주는 것이 백만 배 나으리라.
그때였다.
“하하, 안되겠다! 안되겠어요.”
세자가 갑작스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방주님과 역할극이라니…… 이거 원, 어색해서 쳐다보지도 못하겠어요.”
물론 죽어라 어색해한 이는 되레 방주 쪽이었겠지만, 그녀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저리 말한 것일 것이다.
“실은 저도…… 후, 송구스럽습니다, 마마.”
여옥은 눈에 띄게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그러곤 한결 밝아진 음성으로,
“애당초 기생과 객의 역할극이라니…… 괜한 꼬임에 넘어가 시간만 허비한 셈이 아닐는지…….”
‘허 참! 웃겨, 자기가 못해놓고선 남 탓을?’
그러고 괜한 꼬임을 제공한 당사자가 씩씩거리며 여옥을 마구 씹어대고 있을 때였다.
“아뇨, 역할극 자체는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확실히 긴장도 조금 되고, 왠지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듯해서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다만…… 방주님과 하는 게 문제일 뿐이지.”
“……예?”
“아무래도 조금…… 어색할 수밖에 없잖아요, 우리는. 서로 오래 봐왔고 그러니까…… 그렇지요?”
“예, 예…… 헌데…….”
“그래서 말인데…….”
이어 두 여인의 머릿속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리는 말이 세자의 입에서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작은 스승님? 혹, 거기 계신가요?”